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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6화 (76/488)
  • 76화

    실험의 완성이 종족 간 전쟁보다 더 중요하단 말인가. 그 미친 뱀이 벌써 두 종족의 영지를 습격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게 되면 나머지 종족도 사태를 마냥 관망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모든 위험성을 감수하고라도 오헬을 데려가려는 것인가?

    이젠 연구의 완성이 목적인지, 오헬 그 자체가 목적인지 전혀 모르겠다. 뱀의 집착에 혀를 내둘렀다.

    “네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말고.”

    “고맙다, 르네. 몇 번이나 네 도움을 받았어.”

    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르네가 잠깐 이엘에게 제 시선을 던졌다. 어린 꼬마를 품에 끌어안고 덜덜 떠는 인간 소년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 이런 습격에 익숙하게 대비하고 맞서는 자신들과 달리, 인간에겐 계속해서 트라우마로 남을 전쟁이었다. 아직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웃기게도 르네는 지금, 저 인간 소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고작 몇 달 함께 보냈다고 이렇게 마음이 가다니. 늑대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자조했다.

    뚜벅뚜벅, 그는 이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향했다. 메이슨을 달래는 건지, 자신을 달래는 건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가까워진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고맙다.”

    “네?”

    “우리의 미래를 네가 만들어 주었으니 이 정도는 표현해야 하지 않겠나.”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르네는 뒤에 있던 우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들고 있던 금화살 하나를 제 왕의 손 위에 올렸다. 활과 화살은 독수리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금화살은 공작의 직계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가보였고.

    “이걸 왜 제게……,”

    “주는 게 아니라 되찾아 갈 것이다.”

    “…….”

    “잘 갖고 있도록. 되도록 잃어버리지 마라. 값비싼 것이니.”

    전시에 때아닌 농담이었다. 그제야 창백하게 질려 있던 그녀의 얼굴이 차차 안색을 되찾았다. 이엘은 얼결에 르네에게서 화살을 건네받았다. 무게가 꽤 나가는 화살은 촉부터 오늬까지 전부 금으로 세공되어 있었고, 끝에는 적갈색 독수리 깃이 붙어 있었다. 독수리들이 사용하는 화살이라 길이가 상당히 길었지만 한 번 찔리면 그대로 꿰뚫릴 것처럼 얇고 가늘었다.

    “찾으러 가겠다.”

    그 말만 남겨 놓고 르네는 근위대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별로 없다. 노아는 못마땅한 낯을 일단 접고 늑대로 변한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검은 늑대가 코로 이엘의 등을 톡 건드렸다.

    “집으로 가자.”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려, 노아는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럽게 이엘을 재촉했다. 르네가 주고 간 화살을 꼭 쥐며 이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의 등 위에 먼저 메이슨을 태우고 이엘도 함께 올라탔다.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덜덜 떠는 메이슨의 어깨에, 입고 있던 연회복 망토를 덮어 주었다.

    메이슨은 과거의 잔상이었다. 해결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지지 않을 주드의 잔상.

    “폐하. 이번에도 뱀이 엮여 있습니까?”

    “…….”

    “그렇다면 저는……,”

    “아니. 안 돼.”

    “…….”

    “내게 뱀들을 추격하지 말라고 했던 것을 벌써 잊었나?”

    “폐하.”

    “그때 네 말을 들었더라면 나 역시 내 수하의 백성들을 잃지 않았을 거야.”

    “…….”

    “주드 역시 내 잘못이다. 내가 영지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그러니 사사로운 감정은 버려. 그의 목소리에 이엘은 주먹을 꾹 쥘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옳다. 지금은 로빈과 리플에 대한 원한을 잠시 묻어 둬야 한다.

    두 사람을 태운 검은 늑대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울창한 숲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엘은 제 등 뒤로 펼쳐진 불바다를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불화살에 독수리들의 둥지가 하나둘 재로 변해 가고 있었다. 하늘 위엔 수많은 테르 독수리와 매가 서로 부딪치며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노아 님, 잠깐만요.”

    “왜?”

    빠르게 달리던 것을 멈췄다. 노아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엘은 품 안에 손을 넣어 르네가 주었던 화살을 꺼냈다. 그녀는 긴 화살을 익숙하게 손바닥 안에서 홱홱 돌리다가, 창을 던지듯이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내리꽂았다.

    아무것도 없는 풀숲에 꽂힌 화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투명한 막이 벗겨지듯 그곳에 커다란 뱀 한 마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찰병이에요.”

    이엘은 화살을 뽑아 깨끗이 닦으며 담담하게 노아를 향해 말했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노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조차 매캐한 연기 탓에 뱀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했는데, 대체 보이지 않는 뱀을 인간이 어떻게 발견한 거지? 내가 많이 약해진 건지, 그게 아니면 저 녀석이 강한 건지. 좀체 알 수 없는 인간이다.

    한편 이엘은 뱀의 머리를 가만히 살폈다. 뱀의 머리는 자신들이 아닌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뱀의 역할은 은신하다가 도망치는 개체를 잡는 쪽이 아니었나? 정찰병은 대체 어딜 노리고 있던 걸까. 뱀이 향하던 곳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엘이 눈을 크게 치뜨더니 화살을 손에 꼭 쥐었다.

    “……성지입니다.”

    “뭐?”

    “오드가 아직 거기 있어요. 놈들은 제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성지 쪽에 불투명한 막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드는 그곳에 남아 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 자신에게 바로 달려오지 못했다는 건.

    “아이들이 아직 성전에 있는 것 같아요.”

    “…….”

    “제가 저곳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하지 않으실 거죠, 폐하.”

    노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메이슨을 태운 채로 저벅저벅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러곤 앞다리를 꿇어 몸을 낮춰 주었다.

    “약속 하나 해라.”

    “…….”

    “앞으로는 그 어떤 새끼에게도 주드를 투영시키지 마.”

    “…….”

    “네가 책임질 일 전혀 아니니까.”

    그건 전부 내 탓이다, 오헬. 그의 작은 목소리에 이엘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등에 올라탔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어. 그녀는 대답 대신 메이슨을 끌어안으며 주먹을 쥐었다.

    성지로 가까워질수록 불길이 거세졌다. 노아의 얼음이 그들을 막아 주긴 했지만 중심지는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불화살이 쌓이고 또 쌓인 탓이었다. 이엘은 메이슨을 얼음으로 적신 옷으로 돌돌 말아 단단하게 감싸 주었다. 노아는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불화살을 빠르게 피하며 속력을 높였다.

    “오드!”

    불투명한 막이 작게 일렁거렸다. 성전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몇 번의 공격을 막아 내던 오드가 그녀를 발견했다. 열린 막 사이로 파고든 늑대는 성지에 이엘과 메이슨을 내려 주었다.

    “엘! 이곳은 위험해. 어서 도망쳐!”

    “안에 어린 독수리들이 아직 남았지?”

    “응. 아직 피하지 못했어.”

    이엘은 재빨리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엉망이 된 성전 안에서 저희끼리 붙어 파르르 떨고 있는 온갖 독수리들이 보였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부 앞을 못 보는 개체들이었다. 모두가 절망하듯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폐하는 오지 않으실 거야……. 우릴 버리셨어. 우린 모두 잡아먹힐 거야.

    마치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같았다. 죽어 가는 왕성. 삶에 미련이 없고 의욕이 없는 왕. 르네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을 빼앗겼으니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좌절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울기만 해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도망치세요! 여기 이렇게 있으면 정말 죽어요!”

    “아아, 폐하……! 우린 꼼짝없이 죽는 거야, 여기서…….”

    “죽을 거야…….”

    몇 번이나 그녀가 소리쳤지만 그들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한창 전쟁 중인 밖보다 이곳이 더 전쟁터 같았다. 그들의 절망은 눈뿐만 아니라 귀까지 어둡게 만들었다. 이엘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가 작은 조각상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석상을 집어 던져 깨뜨렸다.

    와장창―! 귀청을 때리는 폭음에 그제야 흐느끼던 소리가 줄어들었다. 성전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정신 차리세요, 제발! 이렇게 죽을 겁니까? 정말 여기서 죽을 건가요?”

    “…….”

    “폐하께서 포기하셨다고요? 그럼 지금 밖을 지키는 건 누구죠? 누가 당신들을 지켜 주고 있단 겁니까?”

    “…….”

    “여러분이 미처 피하지 못했다는 걸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영지를 사수하려고 공중과 땅을 지키고 계신 거라고요.”

    독수리들이 그제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엘은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가 성전 안쪽에 위치한 쪽문을 열었다. 여길 벗어나면 오드의 결계는 깨지겠지만 이들을 도망치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협곡으로 갑시다. 제가 여러분의 눈이 되어 드릴게요.”

    “너는 인간……!”

    “맞습니다. 전 인간이에요. 근데 그게 어떻다는 거죠? 제가 인간이기 때문에 제 도움은 받지 않겠다는 겁니까?”

    “…….”

    “그깟 자존심 지키려고 폐하께서 꿈꾸는 당신들의 미래까지 망치지 마세요.”

    끼이이익―! 듣기 싫은 매의 울음소리가 다시 성지 밖에서 울려 퍼졌다. 몇몇이 더 다가오는 게 분명했다. 오드의 결계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노아는 이미 쪽문을 몸으로 부숴 공간을 넓힌 뒤였다. 그는 저 독수리들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버틴다면 이엘만이라도 태워 도망칠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매의 울음소리가 공중에서 들리자, 어린 독수리들이 먼저 더듬더듬 벽을 짚으며 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려움에 훌쩍였지만 모두 살고 싶었다. 오히려 그 열망은 새끼들이 더 강했다.

    하나둘 새끼 테르들과 우논들이 움직이자 성체들도 날개를 퍼덕이며 쪽문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날았다. 이엘은 메이슨의 손을 꼭 잡은 채 무리를 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지의 뒷산은 험준하고 가팔랐다. 이엘은 무리의 옆에서 방향을 일러 주었고 노아는 앞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뒤는 오드가 결계를 치며 습격에 대비했다.

    우논은 인간의 모습으로 걸어간다 치더라도 테르들이 문제였다. 나무가 빼곡한 곳에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날아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걷다가 날고 날다가 걷기를 반복하느라 고생이었다. 그렇다고 나무를 죄 밀어 버리자니 눈이 좋은 매에게 걸릴 확률이 높고.

    “엘. 이대로는 무리야. 성전에 걸어 둔 허위 결계는 금방 들통날 거야.”

    “…….”

    “협곡까진 너무 오래 걸려. 차라리 나무를 전부 밀어 버리고 테르들을 자유롭게 풀어서 빠르게 날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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