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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7화 (77/488)

77화

결정이 필요했다. 이 방향대로 곧장 날아가면 르네가 말한 그 협곡이 나온다. 눈이 안 보여도 방향만 잡으면 협곡에 다다를 수 있다. 매에게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오드의 성력으로 나무를 전부 밀어 버리는 게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투시력이 있는 매가 허위 결계를 금세 눈치채고 추격할 텐데……. 이엘은 땀이 묻은 손을 옷에 닦고 오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오드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팡이를 바닥에 찍어 내렸다. 땅이 으드득 갈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빼곡한 나무가 전부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소리였다. 이엘은 본능적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성전에 쳐 두었던 허위 결계가 아주 잠깐 사라졌다가 생겼다. 주변을 서성거리던 매들이 주춤하는 게 보였다.

“어서 독수리로 변해서 날아가세요! 곧장 날아가면 협곡입니다. 냄새만으로도 어딘지 당신들은 알 거예요.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도망치세요!”

그 말에 테르들이 날아오르자 우논들도 황급히 본체화를 해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들이 전부 날아오름과 동시에 저 멀리 매 떼가 이곳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이엘은 숨을 모았다가 뱉으며 손에 르네의 화살을 쥐었다.

다른 무기는 다 잘 써도 활은 영 꽝이라, 이렇게 먼 거리에선 늘 총을 쥐었는데. 근접전이 아니면 창과 검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이 화살을 던지면 되찾을 수 있을까? 르네가 찾으러 온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영지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매번 르네가 곁에서 자신을 신경 써 줬다는 걸 조금씩 알아차려 간다.

그녀의 곁으로 커다란 검은 늑대가 다가와 얼굴로 슬쩍 밀었다. 끝까지 이엘의 곁에 있겠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빠르게 해치우고 돌아가자.”

노아가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죽을 마음은 없어. 이젠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으니까. 노아의 등에 올라탄 이엘이 화살을 검잡듯 쥐었고 곁에서 오드가 얇은 결계를 쳤다. 심호흡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매를 향해 노아가 얼음 장벽을 세우려던 차였다.

“으아악!!”

“아악!”

“컥!”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정면으로 날아들던 매 떼는 갑자기 덮친 그림자에 의해 흩어지고 사라졌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내려와 매를 전부 다 먹어 버렸다. 난데없이 핀 먹구름 속에서 푸른색 생물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이엘은 눈을 치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돌아가기 귀찮다면서 잘만 변하는군.”

노아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시큰둥하게 말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돌려 산을 타기 시작했다. 옆에 선 오드도 황급히 노아의 등에 올라탔다. 이엘만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고개를 자꾸만 뒤로 돌렸다.

“폐, 폐하! 저게 무엇입니까?!”

“아군.”

“네?”

“확실히 공중전에선 저놈을 이길 종족은 없지.”

거대한 소용돌이가 하늘에서 내려와 매가 있던 곳을 전부 쓸어버렸다. 소용돌이는 그대로 반대쪽으로 지나가며 불타는 영지를 잠재웠다.

이엘은 점점 멀어져 가는 성지 쪽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짙은 먹구름 속에 있던 푸른색 생물이 아주 잠깐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본 것 같았다. 그림자뿐이었지만 눈만은 또렷했다. 분명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왜, 갑자기 밀로가 생각난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오드는 젖은 머리를 털며 숫자 세는 것을 마쳤다. 다행히 낙오된 독수리 없이 모두 도착해 있었다. 이엘은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동굴 입구에 서서 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옆엔 검은 늑대가 그녀를 지키듯 앉아 있었다. 그녀를 돌아보며 오드가 입을 뗐다.

“왜 그러니, 엘?”

“아니야,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매 떼를 습격한 뒤로 갑작스레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덕분에 불벼락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 가던 영지가 잠잠해졌다. 상당수의 둥지가 잿더미가 됐지만 늑대들의 영지에 비하면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이엘은 착잡한 눈으로 한참이나 영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푸른 눈. 분명 낯설지 않았어.

그녀는 조금 전 자신들을 구해 준―정확히는 구해 줬다기보다 적을 먹어 치워 버린―그 생물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이엘은 노아의 등 위에 타고 오는 내내 뒤를 돌아봤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한 뒤부터 그 생물체는 먹구름 사이로 사라져 다신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한다.”

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 내던 노아가 그녀를 채근했다. 밀로 녀석이 왔으니 독수리들은 괜찮을 테지만, 문제는 자신들이었다. 이 동굴 뒤로 이어지는 산을 넘으면 분명 뱀들이 숨어 있을 텐데. 뚫고 갈 수 있을까.

순간 심장이 크게 한 번 요동쳤다. 마치 숨이 멎는 것처럼 크게 수축하던 심장 때문에 늑대가 몸을 움찔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달리는 내내 수십 번의 고비를 넘기며 가까스로 참아 냈지만 고통을 억누르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그 먼 길을 뛰며 비까지 맞느라 흉통이 더 심해졌다.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티던 늑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결국,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폐하!”

놀란 이엘과 오드가 서둘러 늑대를 살폈다. 바닥에 쓰러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노아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토했다.

역시나 상처가 도졌다. 이엘이 막힌 숨을 열어 주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어 주었지만 숨을 가쁘게 쉬는 건 여전했다.

“오드. 폐하께서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야?”

“상처가 덜 나은 상태에서 너무 무리하셨어. 절대 안정이 필요했는데.”

“그럼 어떡해. 여기선 아무것도 못해. 이대로는 도망칠 수 없단 말이야.”

“독수리의 영지도 한창 전쟁 중이라 돌아가지 못해. 방법이 없어. 이곳에서라도 쉬면서 회복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땀과 비에 젖어 노아의 낯이 완전히 질려 있었다. 그는 마치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가슴 부근을 손으로 누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렇게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팠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던 거야. 차라리 성전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편이 당신에겐 나았으려나. 이엘은 소매를 끌어 노아의 이마 위에 얹었다. 줄줄 흐르는 땀과 빗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노아, 제발…….”

이엘의 작은 목소리에 반응하듯, 노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던 그가 열기가 담긴 숨을 내뱉더니 작게 실소했다.

“……이번엔 나를 위해 울어 주려고?”

“안 울 겁니다.”

“그래. 울지 마. 나는 절대 죽지 않을 거니까.”

“…….”

“널 두고 가지 않을 테니 염려 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울고 있는 모습을 또 보긴 싫다. 말을 마친 노아는 눈을 감고 정신을 놓았다.

그를 믿는다. 집으로 가자고 했으니까……. 주드처럼,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제 망토의 물기를 전부 짜내고 노아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곁에서 한참이나 노아를 살피던 오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을 바라보았다.

“엘. 너 어디 아프니?”

“아니. 괜찮은데. 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그래? 비를 맞아서 그럴지도. 괜찮아, 난.”

오드가 이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살짝 뜨겁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 오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은 우선 위에 입은 옷을 하나둘 벗었다. 연회복이라 움직이는 데 상당히 불편한 데다가 물에 젖기까지 했으니, 쓸데없이 무겁기만 했다. 얇은 옷 하나만 남긴 채 그 위에 축축한 노아의 망토를 대충 짜서 걸쳤다.

독수리들은 저마다 울음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비에 젖은 몸을 말리느라 그쪽도 고생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점검 차, 독수리의 머릿수를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 그런 이엘의 곁으로 작은 독수리 하나가 다가와 부리로 그녀를 콕 찍었다.

“오헬.”

“메이슨?”

“응, 나야.”

독수리는 고개를 기웃하며 또 이엘의 손등을 콕콕 찔렀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이엘은 커다란 새끼 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은 안심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영지에도 불이 전부 꺼졌고, 몰려들었던 매 떼는 모조리 사라졌다. 물론 정찰병까지 보냈던 뱀들이 눈에 안 보이는 게 여전히 신경 쓰였지만.

이엘은 독수리들을 한데 모아 두고 동굴 뒷길로 빠져나왔다. 오드가 알려 준 약초와 먹을 것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허리를 숙여 풀이 무성한 숲으로 몸을 숨겼다.

분명 이번 습격도 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독수리와 매는 비록 영공의 소유를 두고 다투는 관계이긴 해도, 종족 간 관계는 썩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매가 급습을 했다면, 그건 분명 뱀이 부추겼을 터.

이 산만 넘으면 뱀들이 숨어 있겠지. 이엘은 고개를 들어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기만 넘으면 리플, 그자도 있을 거야. 화살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다른 뱀은 몰라도 리플, 당신은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 줄 거야.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확실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성지는?”

“매들이 전멸했습니다.”

정신없이 한참 동안 약초 찾는 것에 매진해 있을 무렵이었다. 이엘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입을 틀어막고 나무에 몸을 바짝 숨겼다.

귀에 익은 목소리. 음산할 정도로 고저 없이 딱딱한 목소리. 삐걱거리는 고개를 겨우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조금 더 수색할까요, 리플 님?”

“아니.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들킨 것이다. 머리가 좋은 독수리들이 눈치채고 우리 뒤를 밟으면 곤란해.”

“하지만 폐하께서…….”

“실망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

“예, 공작님.”

키가 큰 남자의 앞에 커다란 뱀 세 마리가 고개를 조아리며 길쭉한 혀를 날름거렸다. 이엘은 손에 쥐고 있던 화살에 본능적으로 힘을 담았다. 머리 위로 손을 올리며 언제라도 집어 던질 수 있게 기회를 보았다.

아― 너를 죽이려 하니 신께서 나에게 널 보내셨구나.

그래. 피차 너와 난 서로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는 나를 너의 왕에게 데려가기 위해. 나는 너를 내 손으로 죽이기 위해. 그래, 정말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거였어.

잡은 금화살을 손에서 홱홱 돌렸다. 마치 제 손에 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리플은 뱀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거리는 이엘에게 어렵지 않은 거리였다. 충분히, 연습을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거리.

긴긴 밤을 지새우며 후회했다. 그날 왜 네 존재를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로빈의 측근 중에 가장 가까운 자가 너였는데. 그 사실을 나만 알고 있었는데! 그날. 왜 다가오는 네놈의 검을 피하지 못했을까. 왜, 바보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려서 나 대신 주드가 검에 찔리게 만들었을까.

매일을 악몽 속에 살았다.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그날이 떠올라 손에 땀을 쥐었다.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도 늘, 이엘은 쓰러지는 주드의 모습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꿈속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하게, 무능력하게, 무력하게.

그저 죽어 가는 주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휙휙 돌아가던 긴 화살을 손에 쥐었다. 가진 무기라고는 르네가 준 화살뿐이니 이걸 리플에게 던지면 그 이후의 일은 오롯이 이엘의 몫이었다. 다른 세 뱀이 달려들어 독을 뿌리면 영락없이 로빈에게 끌려가겠지.

그래. 썩 나쁜 전개는 아닌 것 같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던 노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엘은 상념을 지우고 화살을 쥔 손을 위로 쳐들었다. 셋을 세고 던지자.

하나.

둘.

순간 리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셋―! 그와 동시에 이엘의 오른손도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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