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5화 (75/488)
  • 75화

    그 마음을 내가 배려하지 못했던 건가. 노아는 문득, 눈을 떴을 때 보았던 축축한 녹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인간은 이종족이랑 달리 감정이 예민하니까. 게다가 그녀에게 주드가 어떤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는 가만히 이엘을 쳐다보다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연회 다녀오지 말라는 뜻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저도 폐하께 함부로 말해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도 그만하고.”

    “…….”

    “춤 연습은 좀 더 해야겠지만.”

    이엘이 미간을 찌푸리자 노아가 엷게 웃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며 르네를 향해 못마땅한 눈짓을 보냈다.

    “네가 잘 리드해, 르네.”

    “에스코트받는 쪽은 내 쪽인데.”

    “…….”

    “그럼 리드는 오헬이 해야 하거든.”

    이래서 새가 싫다니까.

    *

    후작저에서 열린 연회는 상당히 성대했다. 황궁에서 주기적으로 열렸던 연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르네와 함께 도착한 이엘이 제 옷을 다듬으며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줄곧 남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남성 예복을 입으니 괜히 더 어색했다. 하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다.

    “늑대가 널 상당히 아끼나 보군.”

    “네?”

    르네는 말없이 턱짓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그쪽엔 와인이 담긴 잔을 흔들며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아가 기둥 앞에 서 있었다. 이엘은 그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방에서 좀 쉬라니까. 빨리 돌아가고 싶다면서 어쩌면 저렇게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드의 말이라면 잘 듣지 않았나? 주치의 말도 무시하니, 이젠 정말 나도 모르겠네.

    르네와 이엘이 연회장 입구로 들어서자 후작이 서둘러 그들을 맞이하러 다가왔다. 그의 곁에는 눈에 검은 천을 두른 소년도 함께 있었다. 메이슨은 오랜만에 맡는 이엘의 냄새에 입가를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오헬.”

    “메이슨, 안녕. 잘 지냈어?”

    “응. 춤 선생님까지 붙어서 열심히 연습했다며.”

    “……소문이 벌써 그렇게 났어?”

    그녀가 르네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르네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후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메이슨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앞에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내가 만든 거야, 쿠키. 오헬이 이걸 제일 좋아한다고 하길래.”

    “누가?”

    “폐하께서.”

    메이슨이 만든 쿠키는 늘 르네와 함께 하던 다과에서 먹던 것들이었다. 별 얘기를 다 했구나. 그녀는 기쁘게 그 바구니를 받으며 메이슨과 함께 먼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르네와 있을 때완 달리 혼자 들어오니 따가운 눈빛이 배가 된 것 같았다. 이제 이런 시선은 익숙해져서 대충 그들을 무시하며 마련된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헬은 오늘 누구랑 파트너야? 역시 폐하?”

    “응. 내 손을 잡고 춤춰 줄 독수리는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아서.”

    “나 있는데.”

    “후작님이 슬퍼하셔.”

    그녀의 농담에 메이슨이 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메이슨은 행동이 작고 조용했다. 늘 시끄럽고 사고만 치던 주드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 왜 난 메이슨의 모습에서 늘 너를 찾는 걸까, 주드. 씁쓸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지웠다. 지금은 그냥 이 평화를 즐기자.

    술렁이던 장내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연회장을 채웠던 모든 우논들이 들어오는 제 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 경의와 예를 표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메이슨도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엘도 얼결에 그들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내 파트너는 연회가 그토록 즐거워 본분까지 잊어버렸군.”

    믿기지 않게도, 웃음기가 섞인 르네의 목소리에 이엘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와중에 큰 키로 불쑥 솟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불에 타는 듯한 눈동자가 너무도 예뻐, 이엘은 그가 웃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다른 우논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르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에스코트했다.

    “폐하의 첫 춤을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일단 배운 대로 예법에 맞게 먼저 허락을 구했다. 슬그머니 제 눈치를 보는 인간 소년을 훑던 르네가 피식 웃더니 먼저 그녀의 허리에 제 손을 올렸다. 거기서 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리드는 제 몫인데요, 폐하? 마치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누가 리드하고 누가 에스코트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폐하. 저를 못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폐하를 밟기라도 할까, 염려되십니까?”

    “인간을 어떻게 믿나.”

    그 말과 동시에 르네가 후작을 향해 손짓했다. 빙긋 웃은 후작은 모인 자들을 정렬했고 곧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과 그의 아비, 혹은 친지들이 짝을 이루어 춤을 추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다정한 종족이라니. 이들의 가족애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순간 제 허리에 닿았던 르네의 손에 힘이 조금 더해졌다. 그제야 옆을 바라보던 이엘의 눈이 르네에게 닿았다.

    “집중 좀 했으면 하는데.”

    “죄송합니다, 폐하. 너무 보기 좋아서요.”

    “…….”

    “이런 연회는 처음 보거든요.”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만날 여자와 남자가 짝을 이루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이렇게 부자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꽃이 폈다.

    이엘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르네도 더는 잔소리하지 않고 묵묵히 리드했다. 연습한 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건지, 처음으로 실수 없이 춤을 마쳤다. 그게 내심 뿌듯했던 그녀는 홀의 사이드로 걸어 나가며 르네를 향해 으스댔다.

    “보세요, 르네 님. 저는 실전에 강합니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 개가 여기 있는데.”

    “…….”

    “참고로 하나도 안 웃겨, 이 상황.”

    어느 틈엔가 가까이 다가와 있던 노아가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불쑥 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르네의 손을 한참 노려보더니 그 손을 냉정하게 쳐 냈다. 그러곤 이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독수리보단 내가 더, 파트너로서 나을 텐데.”

    왕들이 이렇게 유치해도 돼? 이엘은 르네와 노아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짧은 한숨 끝에 그의 손을 잡기 위해 자신의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기도 전에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음악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을 통해 거대한 독수리가 연회장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치, 침입자입니다!”

    피를 뚝뚝 흘리며 굴러떨어진 독수리가 르네를 향해 소리쳤다. 동시에 영지 전역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매가 오고 있습니다!”

    “…….”

    “습격입니다, 폐하!”

    이제 독수리의 영지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별이 반짝거리던 하늘은, 이젠 쏟아지는 화살촉으로 수놓아졌다. 공중에서 맞붙은 독수리와 매가 서로를 죽고 죽이며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시체가 하나둘 떨어질 때마다 대지가 울렸다. 퍽퍽 터지는 소리에 이엘은 그날 밤이 떠올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메이슨!”

    본능적으로 메이슨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기 시작했다. 후작은 기사단 통솔을 위해 자리를 떠났고 앞을 못 보는 메이슨은 의자 아래에 몸을 숨긴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엘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메이슨을 단숨에 발견하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괜찮아, 메이슨.”

    “오, 오헬…….”

    “괜찮아.”

    노아는 그녀를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주드의 그림자가 컸나 보군. 그는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어쩌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독수리의 영지가 이렇게 되었을까. 게다가 상대가 매라니. 독수리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딱히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뱀인가.”

    노아의 나지막한 말에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와 뱀이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게다가 둘은 천적 관계가 아니던가. 10년 전 종족 전쟁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역시 최근에 손을 잡게 된 건가.

    종족회의를 기점으로 몇몇 종족이 뱀의 연구에 동참하게 된 건 아닐까. 평화를 위해 모였던 자리가 되레 악의 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아. 오헬을 데리고 협곡 쪽으로 향해라. 그곳에 좁은 동굴이 있다. 동굴 뒤편엔 산으로 향하는 샛길이 있으니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곳이라면 눈이 좋은 놈들도 발견하지 못할 테니까.”

    “뱀이 껴 있다면 너희만으로 안 돼. 동맹도 없잖아, 너흰.”

    “매와는 비등비등하니 수적으로만 불리하지 않으면 나쁘지 않아. 게다가 놈들도 선두 몇 마리만 공격하고 있다. 섣불리 치고 들어올 것 같진 같아. 보아하니 앞에선 매들이 출입을 막고 뒤에서 뱀들이 포박할 생각인 것 같은데…….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오헬이다.”

    “…….”

    “로빈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