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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74화 (74/488)

74화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참던 이엘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일순 환청이 들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분명,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며 노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놀란 걸 보니 내가 꽤 오래 잠을 잤나 보네.”

노아는 말을 하면서도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픔을 참아 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노아는 여전히 놀란 이엘을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바보처럼 그 자리에 잔뜩 굳어서 입술도 달싹거리지 않는 게 퍽 웃겼다. 노아는 혀를 차며 제 손등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우는 걸 보니 영락없는 인간이군.”

“…….”

“말 좀 하지 그래?”

꼴이 우습고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안도와 허탈이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닌가, 그 걱정이 얼마나 자신을 무섭게 만들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혼자가 되면 어떡하나. 얼마나 걱정했는데.

결국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십니까?”

“뭐, 일단은.”

“폐하께서 얼마나 오래 눈을 뜨지 못하셨는지 모르니까 그러시겠죠.”

“…….”

“그사이에 얼마나 많이…… 많은 일이 있었는데…….”

물론 그가 태평하게 잠을 잔 게 아니란 걸 아는데도. 이엘은 혼자만 속이 타고 슬퍼하던 게 분해서 말을 흐리며 등을 돌렸다. 깨어나셨으니 갈게요. 그 말과 함께 서둘러 방을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노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이렇게 있었는데, 내가?”

“…….”

“여긴, 냄새만 맡아도 알겠네. 독수리의 영지인가 보군.”

놔주세요.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 늑대의 왕은 손을 뗐다. 그러곤 이엘이 앉아 있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앉아.”

“…….”

“물어볼 것도 많고, 네게 들어야 할 말도 많고.”

“…….”

“무엇보다 네가 우는데 내보내는 건, 좀 그래.”

눈을 뜨자마자 본 게 이엘의 눈물이라니. 늘 음울하거나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저 녀석도 인간은 인간이었나. 물론 눈을 감기 전까진 웃는 모습도 곧잘 봤었지만.

놀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정작 저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간 고생을 한 건지 얼굴도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인간은 늘 섬세하게 대해야 했는데, 내가 또 몹쓸 장난을 쳤군. 이래서 장난 같은 건 치지 말라고 안드로가 그렇게 얘기했나.

“여긴 르네 님의 성이에요. 폐하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곳으로 잠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여기라고 별로 다르진 않았을 텐데.”

“혹시 또 뱀이 습격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

“2기사단과 3기사단에 사상자가 많이 나왔어요. 온전한 건 폐하와 함께 갔던 1기사단뿐입니다.”

노아가 주먹을 바르쥐었다. 물론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라면 그대로 추격해 보복을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왜 그 순간 오드의 간언이 생각난 건지 모르겠다. 하나라도 아끼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보복은 사라지고 용서와 감내를 배우라는 그의 말이, 이제야 조금씩 귀에 들렸다.

“그리고.”

“…….”

“그리고…….”

이게 문제였나, 내가 아니라.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엘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목이 멘 것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겨우 멎었던 눈물이 다시 맺히면서 결국 시트 위에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주드가, 주드가요…….”

“…….”

“죄송해요, 폐하. 제가 주드를…… 주드를…….”

언제나 희생은 아픈 것이다. 그게 누구든, 어떤 존재든 상관없이. 앤디가 고생을 하겠군. 나 대신 영지 일을 하느라, 동생을 보내느라. 노아는 그 생각과 함께 울고 있는 이엘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거렸다.

“네 탓이 아냐.”

“제 탓입니다. 저 때문에 영지가 그렇게 됐으니까요.”

“아직도 넌 그런 생각만 하나?”

“…….”

“넌 피해자고 희생자야. 그 짓을 꾸민 뱀들이 가해자고 원흉이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탓하는 버릇이 썩 좋지 않다. 여전히 아비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그렇게나 자신이 노력했는데도. 깊게 한숨을 쉰 노아는 어느새 길어져 구불거리는 소년의 머리를 살짝 쓸어 주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오헬.”

“…….”

“집으로.”

독수리들이 인간을 혐오하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 여기서 얼마나 박대받았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그러니 저렇게 눈치를 보며 자신을 탓하고 있는 거겠지. 내 노력은 전부 허사가 됐군. 속으로 혀를 차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물기가 어린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위협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그 녹색 눈동자를 조용히, 그리고 다정히 담았다.

“갈 채비를 해. 돌아가자.”

지금 그녀에겐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죄송해요.”

“…….”

“화나셨어요?”

은근히 놀리는 듯한 말투에 르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럽고 다시 해 봐. 그의 말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르네를 향해 제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이 제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언짢아졌다. 차라리 내가 널 에스코트하는 게 낫겠는데. 르네의 못마땅한 말에도 이엘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폐하의 에스코트를 받겠습니까.”

“그럼 네가 어찌 감히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것이냐.”

“그러니까 제가 연회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르네 님.”

말 한마디를 안 지는군. 결국 르네는 이엘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르네가 에스코트를 받는다고 한들, 그게 우스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이 있던 시절엔 공작 부인이 공작을 에스코트하고 춤을 리드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독수리들은 그런 편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인간 소년이라는 건 매우 불편하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독수리는 늑대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단 하나의 반려와 보내게 된다. 그러니 보통의 연회장에서 춤 파트너는 오직 반려, 혹은 자녀뿐일 수밖에. 근데 그 연회에 인간 소년과 춤을 추게 되다니. 이 얼마나 불편하고 오묘한가.

“그러니까 내가 돌아가자고 했잖아.”

뒤에서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에 르네의 정갈한 이마가 갈라졌다. 덕분에 이엘은 또 발이 꼬여 르네의 발등을 콱 밟아 버렸고.

한마디로 여긴 엉망진창이었다.

“그만 네 방에 가서 쉬는 건 어때, 노아.”

“그러지 말고 같이 돌아가자니까, 오헬.”

“르네 님. 저 진짜 춤 안 추면 안 돼요?”

이건 뭐…….

어린 독수리들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왔던 오드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새끼 독수리들은 저희의 왕이 인간 소년과 함께 춤 연습을 하는 모습에 저희끼리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왕께서 인간이랑 손을 잡으셨어! 폐하를 인간이 에스코트하는 거야? 폐하도 연회에 오셔?! 그들의 웅성거림에 르네가 제 이마를 짚으며 이엘을 품에서 놓아 주었다.

“노아. 넌 아직 덜 나았다. 그만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보다 연회라니, 이 상황에 연회를 여는 건가? 독수리들은 좋겠네. 상황이 나쁘지 않아서.”

“폐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별안간 이엘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노아를 향해 표정을 구기며 따졌다. 갑자기 그녀의 잔소리가 제게 향하자 노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뭐. 내가 잘못 말했나? 자신이 잠들어 있던 그 며칠 새에, 이엘은 완전히 독수리화 된 것 같았다. 적어도 노아의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연회를 여는 게 잘못입니까?”

“그런 말이 아닌데.”

“이건 단순한 연회가 아니라, 다 새끼들을 위해…… 됐습니다. 그냥 제가 연회를 즐기는 게 싫으신 모양이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지?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유치하게 말다툼이나 하려고 온 줄 알아?”

“그게 아니셨습니까? 그럼 왜 여기까지 오셔서 자꾸 시비를 거십니까? 폐하께서 다 낫지 않으셨으니 당장 출발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상태론 뱀들의 눈을 피해 영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노아 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따박따박, 어쩌면 말을 저렇게나 잘하는지. 정말 독수리 자식들을 닮아 가잖아? 노아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흐트러진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겨 버렸다.

“돌아가고 싶은 건 나 혼자인가 보군. 그렇게 여기가 좋다면 머물러라.”

“…….”

“나는 오늘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니.”

어깨에 걸친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노아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기둥 뒤에 숨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새끼 독수리들이 빼액거리며 늑대의 왕과 인간 소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드는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어린 독수리들을 데리고 연회장을 나갔다.

“노아는 불안해하고 있다.”

“…….”

“여기가 제 영지가 아니니 더 그러겠지. 우린 겉으로 보면 전혀 동맹관계가 아니니까.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제 종족을 지켜야 한단 생각이 강해서 그러는 것이다.”

서둘러 돌아가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건 노아만큼이나 자신도 같았다. 연회에 가고 싶지 않은 건 나도 같단 말이야. 깊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래도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히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한 것 같다.

돌아가고 싶다. 노아가 완전히 낫기만 했어도 돌아갈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몇 달을 앓았고 겨우 이틀 전에 눈을 떴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면서 대체 어떻게 돌아가겠단 거야.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 앤디를 볼 자신이 없었다. 늑대들은 그녀의 귀환을 좋아하겠지만, 앤디는 여전히 자신을 마주하는 게 힘들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반겨 주겠지만 속내는 다르리라. 내가 아직도 주드를 못 잊은 것처럼.

거의 쫓겨나듯, 거의 도망치듯 그렇게 늑대들의 영지를 나왔는데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힘들다면 연회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와 함께 가지 않으면 돌아가는 의미가 없다고.”

르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회장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한껏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 노아가 뚜벅뚜벅 걸어와 이엘과 르네의 앞에 섰다.

“돌아가, 나랑. 네 집이 있는 내 영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 한 적 없어요.”

“그럼 대체 왜. 뭐가 문제지?”

“폐하께서 다 나으시면요.”

“난 우논이다. 그것도 직계 왕족. 이깟 상처, 정신 차리고 하루 이틀이면 멀끔히 나아.”

“……그리고 제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요. 죄송해요, 전부 제 탓이에요.”

“…….”

“저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있을 곳에 가고 싶어요, 폐하.”

“…….”

“하지만 거긴 주드가 있어요. 아니, 있었어요. ……그러니까 폐하.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조금만 천천히요. 폐하께서 나으시면 가겠습니다. 갈 겁니다,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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