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48)
  • * * *

    철컹, 짧게 열렸던 문이 다시 닫혔다. 기사들이 지하 창고로 던지고 간 것은 일행 중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조셉이었다. 오는 동안 몹시 거칠게 다뤘는지 조셉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아, 조셉마저도…….”

    내던져진 조셉을 본 신시아가 겨우 울음을 그쳤다. 신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조셉이 끙끙거리며 간신히 부은 눈을 떴다.

    “상단주님, 여기 계셨군요. 아무리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물어봐도 다들 대답을 피하는지라 도통 찾을 수가 없었는데…….”

    조셉은 허탈하단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적잖게 피곤했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신시아는 잠이 든 조셉을 내려다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정말 메르디에스 성이, 우리 성을 뺏겼다고요?”

    “그래. 신시아는 몰랐어?”

    신시아는 메르디에스 내에서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정말 아리아드네를 배신한 사람 중에 하나라면 이 모든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메르디에스 성의 상황은 밝혀도 괜찮은 정보였다. 신시아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더욱 알려 줘야 할 정보였고.

    아리아드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메르디에스 상황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게 제가 소르체에 들어서는 조건이었어요. 소르체에 있는 동안 외부와 연락하지 않겠다는. 그것도 모르고 소르체와 거래를 틀 거라고 여기 처박혀 있었으니…….”

    폐쇄적인 소르체라면 충분히 내걸 만한 조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하며 물었다.

    “성을 장악한 세력이 누굴까? 역시 1왕자 쪽일까?”

    “지금 상황에서 메르디에스 성을 노릴 사람이라면 1왕자이거나 최소한 1왕자와 줄이 닿아 있는 쪽일 테죠.”

    아리아드네도 신시아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카이엔을 빼고서는 그럴 만한 사람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와 리스벨 백작께서는 어디에 계신 걸까? 캐롤린을 내세운 걸 보면 아무래도 두 분께서 성에 억류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이 성에 남아 있었다면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에 도착한 날의 대치가 그렇게 싱겁게 끝났을 리 없다.

    “……아!”

    곰곰이 생각하던 신시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가 리스벨 영애로부터 소르체에 들어서기 직전에 받은 마지막 연락이 메르디에스 기사단의 흔적을 찾아 달라는 거였어요. 임무 중 기사 몇몇이 사라진 정도로 생각하고 인력을 지원했는데 그게 혹시 성주님과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게 어디였어?”

    “보우 강 상류 쪽이요.”

    보우 강은 리카서스에서 시작해 메르디에스 서남 평원을 흐르는 강이었다.

    “보우 강 상류라면 리카서스 땅이잖아.”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저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하얗게 질린 것은 신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리아드네와 같은 것을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두 분이 어떤 이유로 성을 비웠고, 그 사이 1왕자가 성을 점령한 거라면…….”

    레너드와 커티스가 성을 비운 것부터가 계략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1왕자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레너드가 성 안에 없다고 안심할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깊게 숨을 토해 내며 알아야 할 것들을 마저 물었다.

    “추수제에 참석한 남부 귀족들이 성 안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제가 소르체에 도착한 것이 추수제 전이라 정확한 명단은 저도 알지 못해요. 다만 그때 제가 파악하기로는 서른 정도의 가문에서 이백여 명 정도 참석할 거라고 예상했어요.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으니 아마 이것보다 더 많을 거예요.”

    신시아의 말대로라면 메르디에스의 추수제는 예년보다도 훨씬 큰 규모로 치러졌음이 분명했다.

    레너드가 그렇게 한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아리아드네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서. 점점 가슴이 뻐근해져 숨을 쉬기 어려웠다.

    “자세한 이야기는 소르체를 빠져나가야 확인할 수 있겠네.”

    “그런데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얕은 한숨을 내쉰 신시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신시아를 바라보던 아리아드네가 제 양손을 꽉 쥐었다. 신시아를 믿어도 좋을까, 떨어지지 않는 의심의 뒷면은 믿고 싶다는 희망이었다.

    “신시아, 내가 소르체에 올 거라는 건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했어?”

    “……네, 전혀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신시아가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지내는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어요. 열흘 뒤에야 경비를 대동하고 허락받은 경로로만 이동할 수 있었고요. 알버트 경은 치료사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아직 얼굴도 못 봤어요.”

    신시아의 말대로라면 소르체는 이곳에 도착한 이들의 목적을 파악할 때까지 격리에 가까운 수용을 하는 듯했다. 폐쇄적인 소르체 문화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근래에는 그간 공을 들인 게 조금씩 먹혀 가던 중이었는데, 왜 그런 일이 터져서는…….”

    신시아가 원망스럽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라니?”

    그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아리아드네에게 신시아는 도리어 정말 모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젯밤 일이요.”

    “어젯밤?”

    “모르셨어요? 어젯밤 소르체에 침입자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경비들이 샅샅이 뒤지는 통에 엄청 시끄러웠는데 정말 모르셨어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좀 어수선했던 것 같은데…….

    귀가 밝은 달미에르 정도만이 그렇게 말했을 뿐.

    “우리가 묵은 곳은 동쪽 독채라…….”

    독채에 묵은 아리아드네 일행은 미처 그 소란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몇 번이나 침입한 자들과 무슨 관계냐고 추궁받다가 날이 밝기도 전에 여기로 끌려와 갇혔어요.”

    소르체에 침입자가 있었던 것이 정말이라면…….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소르체에 때맞춰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거네.”

    “아리아드네 님 일행이 소르체를 침입한 자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는 걸 테지요.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신시아와 아리아드네 일행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르체에서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궁금한 건 이쪽일세.

    그제야 소르체의 가주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자신들의 도착과 동시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니 폐쇄적인 소르체에서 예민하게 굴 만한 일이었다.

    “신시아, 누구였을까.”

    소르체에 쳐들어온 것은 누구였을까. 아리아드네는 굳게 닫힌 문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 *

    “아름다운 눈이야.”

    붉은 기가 살짝 도는 보라색 눈동자가 남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샐쭉 가늘어졌다.

    “…….”

    알버트는 여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조차 귀엽다는 듯 피식 가벼운 웃음을 지은 여자가 알버트의 팔꿈치를 꾹꾹 눌렀다.

    평소라면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팔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여자의 손이 닿을 때마다 시원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어서 나아야 할 텐데……. 그래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하지.”

    환부를 진찰하듯 누르던 손길이 다른 의미를 띠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은밀한 함의를 가지고 쓸어내리는 손길은 어느새 끈적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알버트는 주저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제 팔을 거두었다. 그의 단호한 몸짓에 여자가 목젖이 보이도록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수록 더 갖고 싶어지잖아.”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알버트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그의 몸이 쭉 딸려 올라갔다.

    아무리 부상 중이라지만 알버트는 촉망받는 기사였고 평생 몸을 단련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힘으로 제압당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여자의 신체는 남자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이 알버트가 살아온 세상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소르체에서 그가 알던 상식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눈앞의 여자는 체격도, 힘도 월등했다. 머리가 잡힌 것뿐인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짧게 자른 여자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찌를 듯이 다가왔다. 하얗고 빳빳하게 곤두선 머리카락마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바깥 것들은 참 웃겨. 너, 정말 여자가 타고나기를 남자보다 약하게 타고났다고 생각하니?”

    여자는 자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는 남자의 고집이 대견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남자는 한쪽 팔도 못 쓰는 주제에 자신을 에스코트하려 들었다. 새끼고양이가 내민 솜방망이 같은 팔이 퍽 귀여워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대로 꺾으면 저 팔마저 못 쓰게 될 텐데.

    “뭐,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바깥세상의 여자와 남자의 육체적 능력이 그토록 차이 나는 건 원래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야. 너희 세상에서 약한 여자만 남긴 거야.”

    가장 부드럽고, 유순하고, 약한 것들만 골라 그것들만 남기면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고르고 골라 그런 혈통만 세상에 남겼으니 바깥의 여자들이 약한 것은 당연하지. 선별이란 그런 거야.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를 말살당하는 것.”

    다양성이 말살된 개체는 필연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분재처럼 작은 화분에 가둬 벗어나는 가지는 모조리 잘라 낸 주제에 약하다며 조롱하는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는 행태였다.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그러했다. 더 강한 자만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 세상은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달라. 내게는 어떤 제약도 없어. 어떤 순간에도 나는 널 지켜 줄 수 있어.”

    알버트의 머리카락을 틀어쥔 여자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여자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선택을 종용했다.

    “날 선택해. 시시한 여자는 재미없잖아?”

    오만한 미소가 여자의 얼굴에 걸렸다. 자신만만한 여자와 마주하고 있으면 알버트는 환각처럼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이슬이 맺힌 붓꽃처럼 투명한 보라색 눈동자와 밤바다의 파도처럼 넘실대는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잡힐 듯 선했다.

    ―지금 날 재수 옴 붙은 고아한테 질투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알버트, 오늘도 훈련이야? 지겹지도 않아? 오늘 하루만 나랑 놀지 않을래?

    ―아버지껜 내가 말씀드릴 거야. 거기가 어디라고 가. 못 가. 난 너 못 보내.

    부모마저도 불길하다며 꺼렸던 그에게 애정이란 것을 알게 해 준 단 한 사람.

    ―내가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친 그보다 더 아프고 서럽게 울던 그의 정인. 알버트는 캐롤린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시간도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선택한 분은 시시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가 지금 널 위해서 뭘 해 줄 수 있는데?”

    비웃듯 이죽대는 여자의 물음에도 알버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저는 이미 오래전 죽었을 겁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의 대답은 오래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쳇, 여자가 혀를 차며 알버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거두었다. 아직 팔이 채 낫지 않은 알버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며 쓰러졌다.

    “살라.”

    그때, 잰걸음으로 다가온 사람이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 손의 살라, 그것이 지금 알버트의 신병을 구속한 여자의 이름이었다. 치유의 힘을 지닌 백자 중 한 사람인 그녀의 능력은 피부 접촉을 통한 치료였다.

    “고치라고 사람을 보내 놨더니 이게 치료하는 거야? 너 진짜 소르체 얼굴에 먹칠하는 짓 좀 하지 마.”

    까랑까랑한 앳된 목소리가 거리낌 없이 살라를 비난했다. 소르체에서 치유의 힘을 지닌 자들은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치료를 이유로 살라의 처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알버트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알버트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살라에게 저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 사람은 또 누구이기에…….’

    가까이 다가온 살라가 어리둥절한 알버트를 홱 잡아 일으키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물론. 확인해 봐도 좋아.”

    알버트는 그제야 앳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코라 의원님?”

    자신을 쳐다보는 또 한 명의 백자는 분명 메르디에스의 주치의 코라였다. 코라가 소르체의 혈족이라는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그가 소르체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아는 코라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알버트는 눈앞의 이 사람이 코라와 동일인인지 그저 닮은 사람인지 좀처럼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안녕? 기사님. 우리 오랜만이네.”

    코라가 붉은 눈을 접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붉은 눈으로 알버트의 다친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흐음,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코라의 붉은 눈은 알버트의 팔에서 부자연스러운 부분들이 빠르게 줄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살라가 제법 공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럴 줄 알고 보낸 거 아닌가?”

    살라가 자신보다 작은 코라의 머리에 팔꿈치를 턱 하니 얹으며 되물었다. 코라는 그런 살라의 행태가 익숙한 듯 제 머리에 팔 하나를 얹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팔꿈치의 관절과 근육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알버트가 다시 팔을 쓰기 위해서는 살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다행히도 유순한 얼굴 생김새 하며 순종적인 성격까지 알버트는 살라가 환장하는 타입이었다.

    “네 집에 들이고 안 내놓을 정도로 예뻐할 줄은 몰랐지만.”

    소르체에 침입한 자들로 한바탕 난리가 났을 때, 알버트 역시 감옥에 가둬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라면 내가 그를 치료 중이었어. 그 남자는 이번 일과 무관해. 이후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지.

    살라의 발언만 아니었다면 알버트는 지금쯤 고향 친구들과 재회했을지도 몰랐다.

    ‘알버트가 이 일을 알면 차라리 감옥에 보내 주기를 바랄지도…….’

    하지만 살라는 알버트의 바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서.”

    살라가 싱긋 웃으며 알버트를 향해 손짓했다. 주위의 시종들이 알버트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향한 손길을 거절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제게 배정된 곳으로 사라졌다.

    볼수록 탐이 나는 남자였다. 그저 아름답기만 했으면 싫다고 거절했을 때 금방 포기했을 터였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힘의 차이에도 제 고집을 꺾지 않는 남자를 보니 점점 욕심이 났다. 저토록 고고한 남자를 꺾어서 제 방에 두면 어떨까.

    “저 남자에게서라면 내 아이를 만들어도 괜찮겠다 싶어.”

    “뭐라는 거야? 드디어 미쳤어?”

    코라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살라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소르체에서 임신과 출산은 여자들의 지배 수단이자 무기였다.

    하지만 모두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살라처럼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자들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겪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넌 그러고 싶을 때 없었어?”

    “뭐, 미치고 싶을 때?”

    황당하다는 듯 툭툭 내뱉는 코라의 말에도 살라는 즐거운 기색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진짜 단단히 빠졌나 보네.”

    “주인이 와도 돌려주기 싫을 만큼.”

    낮게 속삭이는 살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또 나쁜 생각 한다. 너 진짜 언제 정신 차릴래?”

    코라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왜 귀찮은 것들을 끌고 와서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해?”

    살라로선 아직 알버트의 마음을 돌려놓지도 못한 이때, 연이은 메르디에스의 방문이 지긋지긋했다.

    알버트를 만나게 해 달라는 메르디에스 상단주의 요청이야 치료에 방해가 된다며 거부했지만, 메르디에스 후계에게까지 그런 술수가 통할 리 없었다. 주인이 제 기사를 만나겠다는데 막을 명분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정체불명의 침입자 때문에 백자 회의가 열리자 살라는 아리아드네 일행에게 극독을 쓰자고 주장했다.

    그런 살라를 말리며 데켐을 써 경과를 지켜보자고 한 것은 눈엣가시 같은 코라였다.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코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뭐, 네 덕에 그자들이 잠시 목숨을 연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르체의 피를 탐낸 자들이 살아서 이 땅을 떠나지는 못할 테고.”

    눈이 밝은 코라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가 잘못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살라는 백자의 피를 탐내는 자들을 조금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코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넌 메르디에스의 딸이 아직도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살라가 비스듬히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소르체밖에 모르는 살라는 언제나 자신감이 지나쳤다.

    “네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끝날 사람이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어.”

    코라는 아리아드네 일행이 소르체를 침입한 누군가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메르디에스 성을 빼앗기고 소르체로 오는 동안 코라는 아리아드네와 쭉 함께였다. 직감은 때론 이성보다 정확하다.

    “내기해도 좋아. 내가 지면 푸른 피 열 병을 내놓지.”

    살라의 한쪽 눈이 가늠하듯 가늘어졌다. 푸른 피 열 병이라니! 소르체의 치료사라면 탐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내기 품목이었다.

    “대신 살라 네가 지면 저 기사님은 그냥 얌전히 고쳐서 돌려보내. 추하게 매달리지 말고. 남자는 자연스럽게 따르게 하는 거야. 가둬 두는 게 아니라.”

    코라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덧붙인 말에 살라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난 이만 간다.”

    총총 멀어지는 코라의 그림자가 석양에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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