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48)

* * *

소르체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아침이 밝았다. 아리아드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가.’

깊이 잠들지 못한 것은 아리아드네만이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좀 어수선했던 것 같은데…….”

얼굴이 까칠해진 달미에르가 제 턱을 슬쩍 문지르며 물었다.

“그랬어? 난 전혀 몰랐는데…….”

하지만 달로아는 홀로 숙면을 취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조금 둔감한 편이 정신 건강에는 유리하긴 하지.”

달미에르가 슬쩍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똑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르체에서 이른 아침부터 아리아드네를 찾을 사람이라곤 조셉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조셉이 신시아나 알버트의 거처를 알아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들어와.”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허락에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조셉이 아니라 소르체의 집사 아귈라였다.

“이런…….”

짧게 탄식한 아리아드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반가워요, 아귈라.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죠?”

“가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숙였던 고개를 든 아귈라가 명료한 목소리로 가주의 말을 전했다.

“페렌트의 미래를 이끌 동량들이 소르체에 방문한 기쁨을 나누고자 오늘 밤, 작은 연회를 열 터이니 자리를 빛내 주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르체 가주와의 만남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주님께 초대에 기쁘게 응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다시금 몸을 숙여 인사를 한 아귈라가 그대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아귈라.”

아리아드네의 부름에 아귈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소르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귈라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 또한 오늘 연회에 참석하면 알게 되실 겁니다.”

“고마워요.”

작게 고개를 숙인 아귈라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아귈라가 사라지자마자 달로아가 득달같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뭐가?”

“아니, 언제는 만나자니까 말씀‘은’ 전하겠다며 비싸게 굴다가 하루아침에 태세 전환한 게 좀 이상하잖아.”

달로아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걱정되면 안 가도 돼.”

유진이 아리아드네의 손을 슬쩍 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아니, 걱정만 하고 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래도 신시아도 저들 손에 있는 것 같고.”

아리아드네는 조금 전 대화에서 저들이 신시아를 볼모로 잡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기우가 사실이라면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봐야 하는 사람이야. 상대를 알아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정할 수 있을 테고.”

신시아를 만나 현 상황을 파악하고, 소르체의 가주를 만나 연합 전선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이곳에 온 이유였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피할 수 없었다.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에 들이닥친 시녀와 시종들이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연회 준비를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든 연회에 지루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르르 쓸려 왔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연회 준비를 마친 아리아드네가 제 몸을 감싼 소르체의 의복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감싼 천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습을 바꾸었다. 연회 복식에도 성별 간에 큰 차이는 없었는데, 여자의 것은 색이 강렬하고 남자의 것은 장식이나 옷감에 놓인 수가 정교하고 화려했다.

해가 저물자 그들을 맞이하러 나타난 사람은 아귈라였다.

“모시겠습니다.”

아귈라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연회장에 도착했다. 페렌트의 연회장은 보통 화려한 샹들리에와 넓은 홀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소르체의 연회장은 익히 보아 온 모습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화려한 구슬을 꿰어 만든 주렴이 길게 늘어져 있고, 복잡한 수가 놓인 휘장이 연회장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 테이블의 형태였다. 큰 테이블에 둘러앉는 형태가 아니라 사람 수에 맞춘 좌석과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행이 시종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에 들어서자 가장 큰 휘장 뒤편에서 중년의 여자가 걸어 나왔다. 체구가 작고 인상이 온화한 여자였다.

그녀의 등장에 연회장에 자리한 소르체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바로 수호의 소르체,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소르체의 주인 이엘라 소르체였다.

가주의 뒤에는 하얀 머리를 지닌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는데 치유의 힘을 지닌 소르체의 혈족인 듯했다.

그중에는 13년간 메르디에스 주치의라는 신분으로 지낸 코라도 있었다. 코라가 일행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아는 체를 해 왔다.

“소르체 가주 이엘라입니다. 소르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계의 방문자님.”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이는 유진이 한 나라의 국왕과 동격의 대우를 받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대답 없이 고개만 까딱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에겐 어느 날 뚝 떨어진 지위 따위 안 맞는 옷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에게는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힘이 있었으니까.

유진의 태도에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의 한쪽 눈썹이 치켜들렸다. 이엘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보다 아리아드네의 인사가 조금 빨랐다.

“메르디에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귀한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아리아드네의 정중한 인사에 이엘라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소르체 가주의 담담한 눈동자에는 흥미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리뮈르의 딸, 달로아입니다.”

“리뮈르의 아들, 달미에르입니다.”

“성 상티모니아의 성기사 리카르도라고 합니다.”

달로아와 달미에르, 리카르도의 인사가 차례로 이어졌다.

“한자리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조합이로군. 그럼 자리에 앉지.”

옅은 미소를 지은 이엘라가 먼저 착석하자 이국적인 음악이 연회장에 은은히 울려 퍼지며 요리가 날라져 왔다.

향신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화려하게 꾸민 미남들의 손에서 각자의 테이블로 옮겨졌다.

요즘 들어 인생의 만족도가 부쩍 높아진 달로아가 음식을 나르는 남자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렇게 연회장 전체를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허리에 얇은 검을 패용한 여자였다.

높게 틀어 하나로 묶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유리알처럼 매끈한 검은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과 정면을 응시한 시선.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연회장 곳곳에 서 있는 호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안의 무감한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아리아드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여기 소르체였지.’

당연한 것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제 앞에 놓인 기러기 구이를 잘게 잘라 먹었다. 바짝 구운 껍질에는 자작나무 향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코라가 지루했는지 작게 하품을 하자 그 옆에 앉은 여자가 주의하라는 듯 팔꿈치로 가볍게 툭 쳤다.

코라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였는데, 공교롭게도 여자의 눈동자는 붉은 기가 도는 보라색이었다.

여자의 보라색 눈동자는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자의 모습을 살폈다.

‘코라와 그렇게 닮은 것 같진 않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젊은 여성이라는 외형적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코라와 그 옆의 여자는 그다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체구도, 이목구비도, 풍기는 분위기까지도 너무 제각각이었다.

‘가까운 혈연관계는 아닐 듯하고.’

아리아드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이엘라가 음료가 담긴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아리아드네가 따라 잔을 들려는 순간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내내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 듯했다.

탁, 이엘라가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아리아드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자 이엘라가 옆으로 돌아보며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내 아이들일세.”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섞여 있긴 하지만 짙은 갈색 머리였다. 눈동자도 붉은색도 보라색도 아닌 녹색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런 외형들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첫째, 소르체의 가주 위에 오르는 것에 치유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둘째, 치유의 힘을 지닌 자들끼리 닮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서로 가까운 혈연관계는 아니다.

셋째, 소르체의 가주는 치유의 힘을 지닌 자들을 제 자식으로 삼는다. 생각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대꾸했다.

“소르체의 미래를 책임지실 분들이군요. 혈통이나 지위보다 더 무거운 것들이 있지요.”

아리아드네는 그녀들이 ‘가주의 혈육이나 후계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알아차렸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래. 이 아이들은 내 배로 낳은 아이들도 다음 가주 위를 계승할 후계자도 아니지.”

이엘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숨긴 것이 아니니 이 정도는 알아차려야 대화가 되지.’

이엘라는 은백색의 광택이 도는 주석잔 테두리를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소르체의 가주 위에는 어떤 피를 이어받았는지, 어떤 피가 발현되었는지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 혈통이나 발현과는 무관하게 가주가 다음 가주로 가장 적합한 자를 지명하는 방식이니까.”

아리아드네는 내심 소르체의 다음 가주로 유력한 자가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했던 ‘아귈라’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귈라는 평범한 시중인처럼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녀를 대하는 코라의 태도는 평범하지 않았다.

치유의 힘을 지닌 백자는 소르체의 시작이었다. 백자인 코라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눠도 괜찮은 지위, 아리아드네는 그것이 아귈라의 위치라고 생각했다.

“우습지 않은가? 혈족이라 불리는 소르체의 다음 가주가 내가 낳은 딸이 아닌 것도, 내 아이들끼리 닮지 않은 것도.”

이엘라의 말대로 소르체는 스스로를 혈족이라 칭하면서도 혈통보다 능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소르체의 피에 흐르는 치유의 힘은 모계를 통해 유전되지. 소르체의 피를 이어받은 여아들에게는 모두 치유의 힘이 흐르고 있지만 그 힘이 발현되는 것은 극히 소수뿐. 우리는 그래서 치유의 힘이 발현된 소수의 소르체를 백자라 부르네. 그래서 모든 백자는 내 딸이지. 비록 내가 낳진 않았어도.”

그것은 소르체 전체가 하나의 혈족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피에는 소르체의 시작이 남긴 치유의 힘이 흐르고, 누구든 그것이 발현될 가능성이 있었다. 가주의 딸에게도, 기사의 딸에게도, 상인의 딸에게도, 학자의 딸에게도,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악사의 딸에게도, 발현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가장 비천한 자의 딸이라 할지라도 핏속에 흐르는 치유의 힘만 각성한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소르체에서 백자의 발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신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였나? 궁금해할 줄 알았는데.”

이엘라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것은 무엇을 탐색하는 것 같기도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닙니다. 매우 유익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눈앞에 놓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음식이 좀 낯선가?”

이엘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눈앞에 놓인 잔이 흔들리며 순식간에 여러 개로 나뉘었다.

“본디 소르체에서는 요리에 향신료를 잘 쓰질 않아. 향신료는 재료의 맛과 향을 가리니까.”

아리아드네는 그중 무엇을 잡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요리는 저도 좋아합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와중에도 아리아드네 입에서는 기계적인 대답이 나왔다.

‘아, 가운데 잔이 진짜구나.’

아리아드네가 그 잔을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것 말고도 소르체에서 향신료를 쓰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지. 그것은 바로―”

와장창, 테이블 위의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졌다. 아리아드네 테이블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 위에 쓰러진 달로아의 모습이 보였다.

“요리에 독이 숨어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네.”

이엘라는 잔을 들어 그 안에 든 것을 단숨에 삼키며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이곳은 소르체였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약과 누구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을 만들어 내는 삶과 죽음의 조율사들이 모인 소르체.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어지럼증에 휘청 몸이 기울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녀의 몸을 붙든 유진이 그들을 향해 짓씹듯이 내뱉었다. 아리아드네는 흐릿한 눈을 들어 그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소르체의 독이 듣지 않은 듯했다.

“님들, 해독제가 필요하지 않은가 봐? 적당히 해. 그러다 정말 죽어.”

이엘라 옆에 앉은 코라가 빙긋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코라에게 소르체는 제 혈족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이든 소르체를 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둔중한 칼로 가슴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연이은 배신에 벌어진 상처는 아물 새가 없었다.

“……유진, 안 돼.”

튀어 나가려는 유진의 손을 붙든 아리아드네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달로아와 리카르도는 먹은 양이 많은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의심이 많은 달미에르가 그나마 정신을 붙들고 있었고, 아리아드네도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이러시는 이유가 무, 엇입니까?”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겨우 정신을 붙든 채로 힘겹게 물었다.

“소르체에서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궁금한 건 이쪽일세. 메르디에스 상단주를 보고 싶다고 했나?”

냅킨을 들어 입가를 가볍게 닦은 이엘라가 어느새 연회장을 가득 채운 기사들에게 말했다.

“안내해 드려라.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위압적인 발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 가까이 다가온 기사가 아리아드네 몸에 손을 댔다.

“그 손 놔.”

그러자 유진이 기사의 목덜미를 붙잡아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아리아드네가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제게 기댄 아리아드네 어깨와 무릎 아래를 감싼 채로 들어 안았다.

“방문자님께선 동행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지내시던 곳에서 머무르시죠.”

이엘라는 유진을 저들과 함께 두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말에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남자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저 남자의 목줄이 메르디에스 공녀라면 더욱더 같이 두어서는 안 된다.

“아니, 나는 메르디에스 공녀와 함께한다.”

하지만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자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

유진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무엇이라 하든 제 앞을 막아선 이들을 모두 쓸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서넛만 살려 두면 해독제야 구할 수 있겠지.

“굳이 그러길 원하신다면.”

소르체의 가주는 두 손을 들며 물러섰다. 함께 죽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은 달로아와 리카르도, 휘청이는 달미에르, 유진의 품에 안긴 아리아드네. 일행은 그 상태로 기사들에 의해 연회장 지하 창고에 연금되었다. 지하 창고라지만 빛도 잘 들고 깨끗했다. 며칠 지내는 정도라면 큰 무리는 없을 듯했다.

일행을 지하 창고로 몰아넣은 기사들 중 한 명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약을 물 없이 씹어 드시면 고통이 가실 겁니다.”

유진이 거세게 약을 낚아채며 기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하나로 높이 틀어 묶은 기사의 검은 머리카락이 달랑이며 흔들렸다. 유리알처럼 매끈한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유진을 응시했다.

“조금 전 드신 독은 데켐이라는 것입니다. 열흘 동안 매일 이 해독제를 드시지 않으면 손끝부터 썩어 갈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기사는 유진에게 멱살이 잡히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높낮이조차 없는 말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유진, 그 사람 놔줘.”

겨우 눈을 떠 유진의 손에 잡힌 기사가 시안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리아드네가 그를 말렸다.

아리아드네가 힘겹게 손을 뻗자 유진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안았다. 그는 아리아드네 입으로 시안에게 받은 해독제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아리아드네는 시안의 말대로 물 없이 약을 씹어 삼켰다. 약을 삼킨 입 안에서는 비릿하고 쓴맛이 돌았다. 천천히 숨을 삼키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일행이 약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시안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아리아드네는 사라지는 시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을 먹은 일행들이 차츰 정신을 차렸다.

“망할 소르체…….”

순식간에 소르체의 평가가 수직 낙하한 달로아가 이를 갈며 뇌까렸다.

“정말 지독한 자들입니다.”

분기를 참지 못한 리카르도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창고 구석에 있던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며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아리아드네 님?”

차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리아드네를 불렀다. 아리아드네는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제게 점점 다가오는 누군가를 응시했다.

“신시아.”

그 누군가는 바로 신시아였다.

“정말, 정말 아리아드네 님이세요?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마침내 아리아드네와 마주한 신시아가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물속에서 잠긴 것처럼 입만 뻐끔대던 신시아가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메르디에스로 귀환하신다던 분이 소르체에는 왜 오신 거예요?”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신시아 역시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그런 신시아를 샅샅이 훑어보며 물었다.

“몰랐어? 메르디에스 성이 함락됐어.”

메르디에스 성이 함락된 시기에 신시아는 공교롭게도 소르체에 있었다. 그리고 코라의 인도에 따라 도착한 소르체에서 일행은 독에 중독되었고, 미리 감금되어 있던 신시아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만약 신시아를 고리로 메르디에스 성 내부의 누군가와 소르체, 이 셋이 결탁한 것이라면 어떨까?

정보를 다루는 신시아가 있으면 성을 함락하는 것도, 코라를 빼내어 자신들을 소르체로 인도하는 것도, 이곳에서 신시아와 마주치도록 하는 것도 모두 가능했다.

“어, 어떻게…….”

선한 갈색 눈동자에서는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메르디에스 성은 신시아에게도 삶의 터전이었다. 그곳에서 전해진 비보에 마음 아파하는 신시아의 눈물조차도 아리아드네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신시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정말, 정말이군요.”

가린 입 사이로 억누른 듯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신시아, 나 너는 믿어도 괜찮을까? 그런데 너를 믿지 않으면, 그러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아리아드네가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자이든, 그녀의 재산이 얼마이든, 그녀가 미래를 어디까지 알고 있든,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면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이 필요한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 점점 알 수가 없어져.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하지만 그런 투정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모두의 의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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