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리아드네 일행이 갇힌 지하 창고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끼이익,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틀어 묶은 기사가 꽉 맞물린 나무문을 밀고 들어왔다. 유리알처럼 매끈한 검은 눈동자가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창고에 갇힌 사람들은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는 일행이 먹은 데켐의 해독제 리켐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리켐을 먹으면 반응이 둔해지고, 사고가 느려진다.
이 중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독이 듣지 않았던 유진뿐이었다. 벽에 기댄 그의 품에는 메르디에스 공녀가 안겨 있었다.
품속의 옅은 금발을 쓸어내리던 그가 눈을 들어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을 보는 회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소르체의 기사 시안은 남자와 눈을 마주한 채로 품에서 리켐을 꺼냈다. 분명 그녀는 약을 꺼내던 중이었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시안의 관자놀이에는 차가운 쇳덩이가 겨누어져 있었다.
“조용히.”
신의 현신이라 불리는 사내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끼릭, 소리를 내며 쇳덩이의 부품이 돌아갔다. 시안은 남자가 제 머리를 날릴 준비를 끝냈음을 알았다.
“이러신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제 머리가 날아갈 위기 앞에서도 시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달라질지 아닐지는 보면 알겠죠.”
시안의 말에 대꾸한 것은 유진이 아니라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리아드네였다. 리켐을 복용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명료한 목소리였다.
시안은 곧 그 이유를 알았다. 메르디에스 공녀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손에 상처를 낸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소란에 창고 안에 갇힌 사람들이 하나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 님!”
아리아드네의 찢어진 손바닥을 본 신시아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를 돌아본 아리아드네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을 가볍게 털었다.
“신시아, 나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서 갇힌 게 아니야. 독이 두려워서 따른 것도 아니고. 신시아를 만나게 해 준다길래 잠시 놀이에 어울려 준 것뿐이야.”
―안내해 드려라. 메르디에스 상단주가 있는 곳으로.
어쨌든 소르체에 온 것은 신시아를 만나기 위함이니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잠시 몸을 낮춘 것이었다. 신시아를 만났으니 다음 목표를 위해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리아드네가 이곳에 온 최종 목표는 케이루스와 리카서스의 연합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나는 소르체를 얻기 위해 이곳에 왔어.”
“이러면 소르체가 더 멀어지는 거 아니야?”
끄응,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난 달로아가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소르체와 한편이 되는 거야. 완전히 얻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어.”
“어떻게 하려고?”
“누명부터 벗어야지.”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감옥 비슷한 곳에 갇히니 옛 생각이 났다.
[내 가족을 돌려줘. 내 삶을 돌려줘. 내 시간을 돌려줘. 그리고 나를, 나를 돌려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제 팔다리가 차례로 끊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때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해야 했다.
“기사님, 소르체 가주님께 안내해 주시겠어요?”
아리아드네가 시안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곳은 소르체, 자신은 저 기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 * *
이슥한 밤, 소르체 가주의 집무실에는 중년의 여자 한 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웠다.
소르체의 가주 이엘라, 그녀는 밤이 깊도록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그때가 다가오는가?’
소르체의 가주에게는 전대 가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은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실현되리라 믿은 것은 아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해도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지 않듯이.
살랑,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과 책상 위의 종이 같은 것들이 가볍게 펄럭였다.
어느새 소르체에도 겨울이 성큼 다가온 모양인지 밤바람이 제법 선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을 닫으려던 이엘라는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방 창이 열려 있었던가?’
이엘라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그녀뿐이었던 집무실에 예기치 못한 손님이 방문해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처럼 요요히 빛나는 옅은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마치 보석을 박아 넣은 듯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르디에스 공녀 아리아드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비례를 이룬 이목구비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든 예술품 같았다.
“바람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었군.”
탁, 창틀에서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까딱이며 생긋 웃었다. 얼음 인형 같던 서늘한 얼굴이 삽시간에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 순간, 이엘라는 마치 달빛에 홀린 기분이었다.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가주님.”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아리아드네 뒤로 새까만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사람 하나를 내려놓았다. 유진이 내려놓은 사람을 확인한 이엘라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벌어졌다. 잘게 떨리던 입술 사이로 분기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협박을 하려는 건가?”
“협박이라니요. 저는 가주님과 대화를 원합니다.”
“인질을 데리고 말인가?”
“하나씩 주고받은 셈 치지요. 제 몸에도 가주님께 받은 선물이 남아 있으니까요.”
아리아드네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제 몸을 툭 건드리며 웃었다. 중독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여유였다. 이엘라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쉽게 제 감정을 내보였음을 깨달았다.
“공녀가 잡은 인질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자신하나 보군.”
슬쩍 발을 빼 보았지만 아리아드네는 걸려들지 않았다.
“물론이지요. 지금도 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눠 주고 계시잖아요.”
뻔히 보이는 모르쇠에 걸려들자니 아리아드네는 시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 소르체의 경계를 살 필요는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에게나 해독제를 맡기셨을 것 같진 않았어요. 이 기사님께서 그만큼 가주님의 신임을 받고 있단 말이겠죠.”
적당히 둘러대는 말에 이엘라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시안이 눈동자를 굴리며 피하는 걸 보니 이엘라의 의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주의 명을 거슬렀다는 말이었다. 시안은 가주의 친딸이라도 되는 걸까?
―우습지 않은가? 혈족이라 불리는 소르체의 다음 가주가 내가 낳은 딸이 아닌 것도, 내 아이들끼리 닮지 않은 것도.
아니, 소르체에서는 그런 것으로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시안의 지위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서 기인했다.
아리아드네는 가주의 숨통을 틔워 줄 요량으로 말을 꺼냈다.
“소르체는 혈족의 위험을 도외시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소르체의 원한을 사는 것이 두렵지 않나?”
“소르체는 제게 빚을 지게 될 겁니다.”
은원은 반드시 배로 돌려준다는 소르체의 원칙, 아리아드네는 소르체에 빚을 지울 속셈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제가 결백하다는 걸. 정말 절 의심하셨다면 저와 제 일행을 모두 한곳으로 몰아넣진 않으셨겠죠.”
용의자를 격리 수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소르체의 가주가 자신을 시험대 위에 세웠음을 알았다.
“그래서 인질을 잡아 도망가는 것이 공녀의 답인가? 코라가 공녀를 너무 높이 평가한 것 같군. 코라가 그리 자신하길래 좀 더 기대했는데.”
“가주님, 저는 갇혀 드린 겁니다. 도망이 목적이었다면 이렇듯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낭비할 리가 없지요.”
아리아드네와 이엘라 사이에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오고 갔다. 노회한 소르체의 가주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공녀의 눈에서 강렬한 의지를 읽었다.
“그럼 무엇을 하려는가?”
“제가 무도하게 소르체를 침범한 범인을 밝혀내지요.”
“여기는 공녀의 손짓 하나에 벌벌 떠는 메르디에스가 아닐세. 메르디에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공녀가 무얼 할 수 있나? 더구나 공녀는 지금 제집에서 쫓겨난 처지가 아닌가.”
아리아드네는 제 약점을 파고드는 말에도 태연하게 웃었다.
“제가 소르체에 있다고 메르디에스가 아니게 됩니까?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메르디에스의 딸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페렌트를 떠받치는 다섯 기둥 중 하나, 풍요로운 남부의 지배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메르디에스.
자신은 그 메르디에스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는 메르디에스가 아닌 페렌트 그 자체였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제 그릇이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이겠지. 그러니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메르디에스의 짓이 아님이 밝혀지면 그때는 가주께서 마땅한 보상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마치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오연한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엘라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아름다운 인형 같다고 평했던 조금 전의 제 안목을 의심해야 했다.
“알고 계시지요? 메르디에스는 결코 손해 보는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아리아드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거 기대되는군.”
“그럼 평안함 밤 보내시길.”
아리아드네가 밤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는 더없이 우아하고 정중한 자태로 대화가 끝냈음을 알렸다.
그러자 대화 내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던 유진이 시안을 풀어 주었다. 이엘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엘라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콰앙! 유진이 집무실 문을 부술 듯이 발로 차 열었다. 아리아드네에게 독을 먹인 분풀이가 분명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소르체의 기사들은 난데없이 솟아난 사람들을 보며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가주께서 명하셨다. 지내던 처소로 안내하라.”
아리아드네는 우왕좌왕하는 기사들을 보며 당당하게 제 요구를 꺼내 들었다.
이엘라는 확인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소리 없이 나타난 한밤의 방문자는 그렇게 온갖 소란을 피우며 사라졌다.
소르체 가주의 집무실에는 이엘라와 시안만이 남았다. 이엘라는 낮은 한숨과 함께 웃음을 흘렸다. 독을 먹인 이쪽에 비하면 몹시 온건한 대응이긴 했다.
이엘라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시안을 보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소르체를 방문한 이들이 궁금하다며 연회장에 나선 것까진 그렇다 해도 아리아드네 일행을 가둬 둔 지하 창고를 드나들고 있을 줄이야.
“궁금했습니다.”
시안은 연회장에서 자신을 보던 아리아드네의 눈빛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새파란 불이 붙은 것처럼 강렬한 눈동자, 그 눈동자가 자신을 샅샅이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내내 차분하던 가슴이 뛰었다. 숨어 있던 자신을 어떻게 알아본 걸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것이 자신의 망상이래도 상관없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 눈으로 자신을 찾아낸 것이 맞는지.
“침입자를 처음 발견한 건 저였으니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제가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이엘라는 그렇게 말하는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르체의 누구도 시안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시지요.”
소르체에서 가주는 다만 지키는 자일뿐이었다.
“다만 잊지 마십시오. 소르체의 시작과 끝이 오로지 시안 님께 달려 있음을.”
시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드러나며 방 안에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시안은 제 발끝을 바라보다 신발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복면을 쓴 침입자들을 처리하다 튄 피를 이제껏 모르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발끝에 튄 핏자국 따위 특별할 것도 없는데, 시안은 그것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다시 달이 구름 뒤로 숨어 사방이 어둠에 깔린 뒤에도 그녀는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피가 튀어 거무튀튀하게 말라붙은 그 자리를.
* * *
아리아드네가 잠든 방 안으로 햇빛이 밀려들었다. 모처럼 제대로 된 곳에서 잠을 잤더니 일어나기 싫었다. 아리아드네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가 싶더니 시원한 감촉이 뺨에 닿아 왔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큰 손에 뺨을 부비며 매달렸다.
“피곤하면 더 자.”
“아니, 깨워 달라고 한 건 나였잖아. 일으켜 줘.”
아리아드네가 손을 뻗으며 눈을 떴다. 작게 웃은 유진이 아리아드네를 감싼 채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안겨 있으면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둬도 괜찮아?”
그가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어차피 소르체에서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지금 아리아드네에게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일이 끝나면 무사히 풀려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말했다.
“코라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수호의 피를 지닌 코라처럼.
“준비하고 곧 나갈게. 응접실로 안내해 줘.”
아리아드네는 기대 있던 그에게서 제 몸을 떼어 냈다. 두 발로 제 몸을 지탱하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젠 제 발로 서야 할 시간이었다.
응접실 문을 열자 늘어져 있던 코라가 반쯤 몸을 일으켜 아리아드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하 창고는 어떻게, 지낼 만했어?”
“생각보다 괜찮던데. 귀한 경험하게 해 줘서 고마워.”
아리아드네가 자리에 앉으며 태연하게 말하자 코라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아드네 님 성격 진짜 마음에 들어.”
유진은 연회장에서의 일이 앙금으로 남은 듯 코라를 매섭게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유진과는 달리 코라에게 큰 유감이 없었다.
―님들, 해독제가 필요하지 않은가 봐? 적당히 해. 그러다 정말 죽어.
연회장에서 코라가 한 그 말이 뼈아프게 느껴진 건 잠시뿐이었다.
―코라가 공녀를 너무 높이 평가한 것 같군. 코라가 그리 자신하길래 좀 더 기대했는데.
소르체 가주의 그 말이 아니어도 조금만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하니 전혀 다른 것이 보였다.
“도와준 것도 고마워.”
코라는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줬다는 걸.
“아, 알고 있었어?”
쑥스러운 듯 코끝을 만지작거리던 코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푸른 피를 못 받았잖아. 난 그거 받아야 하니까, 뭐.”
쑥스러워하는 것도 잠시뿐, 코라는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유진에게 으스대듯 말했다.
“내가 한 번 살려 준 거야. 나 이젠 방문자님한테 빚진 거 없는 거지? 우리 계산은 깔끔하게 이걸로 끝내는 거다.”
유진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은원이니 뭐니 그런 것에 신경 쓴 적 없었다. 그저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그 사람을 구할 힘이 있으니 움직인 것뿐이었다.
“나 현장부터 가 볼까 하는데 안내 좀 해.”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까딱하며 말하자 코라가 알겠다는 듯 따라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 안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그 일의 목격자입니다. 제가 현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시안이었다. 일어나려다 시안을 발견한 코라가 깜짝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허억! 시, 시안 니이…….”
코라는 시안을 향해 손을 뻗으며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 시안이 여긴 어쩐 일이야?”
코라가 주위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말을 낮췄다.
“메르디에스 공녀를 도우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시안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코라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나야 고맙지. 잘 부탁해요, 기사님.”
아리아드네가 피식 웃으며 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