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하지만 나는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브라우니.”
“응?”
“브라우니야.”
나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리며 그 알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그, 그래. 알 색깔이 브라우니랑 똑같네.”
갈레트가 억지로 납득하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크레페가 이상해요.”
“드디어 미친 거지.”
카눌레가 혀를 찼다.
평소 같으면 웃기지 말라며 한바탕 입씨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알을 갖고 그대로 내 방을 향해 달렸다. 『내 인생 공략집』이 활약할 때였다.
“에, 에이미! 브라우니 준비해 줘요!”
엄마가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유,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
사실 따지자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죽을 때 겨우 일곱 살, 열 살의 아이일 뿐일 테고, 그들의 사인은 지병도 사고도 아닌 암살이었으니까.
압도적인 무력 앞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행한 것은 다소 수동적인 대비책들뿐이었다.
우리 가족을 배신하기 전에 카눌레와 친해지기, 엄마를 암살하기 전에 몽블랑 후작과 친해지기, 나중에 같이 마법 배우자고 갈레트와 약속하기 같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에 맞는 대비를 해야 했다.
어떻게든 암살 전에 호위를 강화하는 등의 일 말이다.
그리고 내게는 미래를 안다는 이점이 있었다.
몇몇 정세와 관련된 일 말고는 크레페의 신변잡기적 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도움이 될 만한 글은 분명히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남자 주인공인 아펠 황태자에 대한 정보였다.
그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을 만한 강자였다.
단순히 황태자라는 직위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펠은 마법도 검술도 뛰어났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항상 브라우니가 있었다.
그런 이름이지만 초코가 아니다, 초코가!
“후후후…….”
나는 음흉하게 웃으며 품에 안은 알을 쓰다듬었다.
최악을 달리는 아빠의 선물 센스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아마 나 말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빠는 이 알을 보내며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토벌 중에 발견한 알입니다. 열심히 품었는데 아무것도 안 나와요. 무정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고 예뻐서 보내봅니다. 깨지면 계란프라이 해 드세요.]
경악할 만한 문구가 몇 보이긴 했지만 차치하고, 나는 이 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우리 쉬제트 가문의 상징인 페가수스, 그 페가수스의 알이었다.
알에서 나오는 망아지라니. 어느 구전 설화가 생각나는 대목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아무튼, 나는 달걀을 품은 에디슨이 된 듯 내 몸통만 한 알을 소중히 보듬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내 인생 공략집의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이 앞부분을 펼치는 건 몇 개월 만이었다.
[크레페 15세 생일 파티.
아펠 황태자와 첫 대면.
황자가 파티에 참석한 이유는 쉬제트가에서 보내준 페가수스의 알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랬다. 원작에서 크레페는 당연히 이 알에 눈길도 안 준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게 페가수스의 알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아버지는 황태자에게 이것을 진상한다.
황태자는 알을 부화시켜 브라우니를 자신의 애마로 삼고 그 보답으로 내 15세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는 스토리였다.
말하자면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황태자와 크레페의 인연을 이어준 것이 이 브라우니라는 페가수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우니는 나중에 아펠 황태자의 보디가드이자 생체 병기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음후후, 이제 그 보디가드는 내 거야!
…그런 심산이었으니 내 웃음이 당연히 음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브라우니를 키우게 되면, 아마 황태자와의 연애는 없는 일이 되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입맛이 썼다.
하지만 애초 황태자와의 연애라는 것도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니 큰 미련은 없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크레페는 황태자와 약혼했다가 오해로 인해 파혼당한다.
그러니까 뭐, 일단 가족부터 살리고 보자.
“크레페……? 브라우니 가져왔어.”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갈레트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가족은 여전히 나를 브라우니에 미친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았다.
으음,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려나.
“드러와아.”
나는 알에 뺨을 문대며 말했다.
갈레트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와서 브라우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 뭐 하고 있어?”
“이거 부화시켜 보려구.”
내 대답은 곧장 나왔지만 갈레트의 표정은 그리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갈레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표정을 짓더니, 뭐라 대답하는 대신 바닥을 더듬어 아빠가 보낸 편지를 찾았다.
“크레페, 봐봐. 글 읽을 줄 알지? 응? 무정란이 뭔지 알아?”
누굴 어린애로 아나.
물론 그렇겠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스스로 반박하고 갈레트에게 둘러댔다.
“하지만 나도 책에서 봤단 말야. 달걀보다 이이따만큼 큰 알 얘기.”
“무슨 얘기?”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동물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구!”
일부러 아기처럼 과장하는 어투로 말했다.
당연히 나는 알 어쩌고 하는 책을 읽은 적도 없었고, 페가수스에 대해 따로 조사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냐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곤란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순진한 어린아이인 척했다.
겉보기엔 어린이, 두뇌는 어른! 어쩌고 하는 어느 만화의 등장인물처럼 말이다.
“타조 알이라거나 페가수스 알이라거나 몬스터 알 같은 거!”
“그래, 몬스터 알이면 어떡해! 크레페, 그거 당장 놔!”
“시러어어!”
슬쩍 정답을 섞어 말해 보았지만 갈레트는 헛다리만 짚었다.
괜한 짓을 했구나.
나는 눈을 꽉 감고 몸으로 알을 지켰다.
갈레트가 내 팔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금방 헥헥거리며 나가떨어졌다.
“잠깐만, 형. 그 얘기 이상하지 않아?”
카눌레도 내 방에 왔다.
나는 알을 껴안은 채 고개만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 이상해?”
갈레트가 날 대신하듯 물었다.
“페가수스가 알에서 나온다잖아. 말은 새끼를 낳는데 쟤는 그것도 모르나 봐.”
카눌레는 아무래도 내게 시비를 걸러 온 것 같았다.
갈레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
“끄응! 페가수스는 알에서 태어나는 거 맞아. 저번에 보니까 마탑에서 논문도 나왔더라.”
카눌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이유가 궁금하진 않았다. 나도 같은 표정일 테니까.
“…논문? 형 논문도 읽어?”
“오빠 열한 쌀 아니야?”
갈레트가 우리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우리 같이 마법사하기로 했잖아. 크레페 너도 페가수스 알 얘기 거기서 읽은 거 아니었어?”
“으, 응?”
“아니면 알 얘기는 어디서 알았어?”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당근이지! 논문에서 봐써!”
이래서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구나.
나는 다급하게 긍정하고 그들의 시선을 피해 애꿎은 바닥만 쳐다보았다.
카눌레가 왜 하필 당근이냐며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눌레는 당근을 싫어했지.
내가 새삼스러운 정보를 재확인하는 동안에도 갈레트는 내 손을 떼어내려 낑낑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가 숨을 고르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휴우, 아무튼 너도 논문에서 봐서 알겠지만, 그게 진짜 페가수스 알이라고 해도 품어서 부화시킬 순 없어. 오히려 품어서 부화하면 진짜 몬스터 알인 거지!”
“아? 어, 응… 그러치.”
이럴 줄 알았으면 논문 봤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을 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갈레트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까 내려놓았던 브라우니 접시를 들었다.
“그니까 아빠가 준 쓰레기를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자, 아~”
아빠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단어가 섞여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코앞에 가져다 댄 포크를 향해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쫀득한 브라우니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우물거리자 갈레트가 다급히 카눌레에게 손을 내저었다.
“지금이야. 빨리 알 치워!”
진한 단맛에 침샘이 자극됐다. 촉촉함과 쫀득함 사이 어딘가, 그야말로 황금 비율의 감촉이었다.
에이미는 디저트의 신이 분명했다. 여기에 생크림이랑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으면 환상일 텐데.
“우움……!”
한참 조용히 그 맛을 음미하던 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레트의 뒤에서 묵직한 알을 빼돌리고 있던 카눌레가 내 눈치를 보고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 포크를 준비하던 갈레트가 당황하며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왜 그래?”
“몽블랑 후작님한테 편지 쓸려구. 냉장 마법으로 여름에도 아이스크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볼 거야.”
알 얘기가 아닌 것을 듣고 갈레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곧바로 방을 나가 도서관으로 향했다.
물론 몽블랑에게 편지를 쓰겠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하는 김에 갈레트가 말한 논문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페가수스의 생식 및 알의 인공 부화에 대한 가설』 ―키슈 로렌 외 2인 공저.
나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찾아 들고 책상에 앉았다.
갈레트가 읽었다는 논문이 이게 맞겠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크레페의 몸으로 환생한 나는 쌩 논문을 접하는 게 처음이었다.
나는 긴장을 가다듬고 첫 페이지를 펼쳤다.
딱딱하고 가독성 구린 목차를 보니 완독하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열한 살짜리 갈레트도 읽은 걸 내가 못 읽을 리가 없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분도 안 돼서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고력 문제가 아니라 단어가 너무 어렵잖아!
“끄응…….”
나는 세 번째 참고 서적을 꺼내려 까치발을 했다. 아슬아슬하게 닿을락 말락 한 높이였다.
그때 카눌레가 다가와 대신 책을 꺼내주었다.
“아, 고마…….”
“『참 쉬워요. 어린이를 위한 마법 상식』?”
카눌레는 내게 그것을 건네주는 대신 책의 제목을 읽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카눌레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논문 읽었다는 거 거짓말이지?”
그런 잔소리나 하려고 온 건가.
“책이나 죠.”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책을 높이 들었다.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깡충깡충 뛰어도 손이 닿지 않았다.
“달라구!”
“흥. 쪼끄만 게.”
“…….”
이만하면 충분히 봐줬다.
나는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 카눌레의 명치에 펀치를 날렸다.
“크헉.”
카눌레가 복부를 감싸 안았다.
나는 내 눈높이로 내려온 책을 빼앗았다.
뭐, 쉽군.
“크윽, 망할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