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세게 주먹을 날려봤자 여섯 살이었기 때문에 카눌레도 금방 통증을 추스르고 자신의 지정석, 그러니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나를 데리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 따라온 거야? 큰오빠는?”
“난 내 공부하러 왔어. 형은 자기도 후작님한테 편지 쓰러 가야겠다고 하던데. 동생한테 손대면 가만 안 있을 거라고 쓴댔나.”
“…….”
“아, 내가 말해 준 건 비밀이야.”
열한 살이 삼십 대 전후의 남자에게 보낼 만한 내용의 편지인 것 같진 않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카눌레도 대화를 잇는 대신 제 몫의 책과 공책을 꺼냈다.
요즘 독서보단 공부에 빠져있는 걸 보니 그도 슬슬 학교 입학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벌써 시험 보려구?”
“신경 끄고 네가 가져온 ‘참 쉬워요’나 읽어.”
굳이 그렇게 줄여 불렀어야 했나.
나는 그의 말대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기로 다짐하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리고 참고 자료로 가져온 책 세 권을 한쪽에 나란히 쌓고 논문을 펼쳤다.
“그러니까 논문 보기 전에…….”
제게 말 걸지 말라던 카눌레가 한숨을 내쉬며 내 참고 도서를 보았다.
『참 쉬워요. 어린이를 위한 마법 상식』이 첫 번째였고 그다음은 『학명 사전』, 마지막은 『마력학 : 생물이 가진 마나 파동의 기본』이었다.
카눌레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구래?”
“…됐다. 내가 말을 말지.”
카눌레가 인상을 찌푸리고 제 공부에 집중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공부하고 있는 책이 『어린이를 위한 산수 교실』이었기 때문이다.
‘참 쉬워요’만 안 붙었을 뿐, 내 마법 상식책이랑 비슷한 수준이잖아?
혹시 카눌레가 비뚤어진 이유가…….
나는 보던 논문을 슬쩍 덮고 카눌레가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열심히 손가락을 꼽으며 더하기 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오빠 아직 아홉 살이쟈나. 학교 가려면 5년이나 남은 거 아냐?”
“형도 열 살에 입학했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 말 시키지 마, 헷갈리니까.”
에구.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역시 그랬구나.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됐듯이 갈레트는 천재였다.
비록 천재성이 완전히 눈뜨기 전에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그가 열다섯 살에 암살당하기 전까지 학교에서는 물론 사교계나 학계에서도 그는 유명 인사였다.
반면 어린 시절의 카눌레에 대한 묘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갈레트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고, 커서는 크레페의 빛나는 미모에 가려 있었다.
나는 ‘참 쉬워요’를 들고 긴 책상을 크게 돌아 카눌레의 옆자리까지 갔다.
그러곤 끙, 소리를 내며 의자에 올라간 후 ‘참 쉬워요’를 펼쳐 카눌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오빠, 이거 무슨 뜨시야?”
“방해하지 마.”
“이것만 알려줘! 오빠 마법진 조아하잖아.”
나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매달렸다.
얼마 만에 찾은 돌파구인데, 시험도 해보기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갈 순 없었다.
이제야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나온 그의 무게감 있는 이미지 덕분에 지금까지 눈이 가려있던 것이다.
그래, 카눌레도 결국 어린아이일 뿐이었는데.
둥개둥개 둥기둥기 얼러줄 테니 어서 회개하려무나.
“쯧, 이런 것도 모르고.”
내가 연신 졸라대자 카눌레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서 내가 펼친 부분을 소리 내 읽었다.
“기본적으로 마법진의 문자는 마나 배열을 자극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기운은 마나의 배열로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을 문장화시켜서 재배치하는 것이 바로 마법…….”
이게 ‘참 쉬워요’가 맞나?
나는 카눌레가 중얼거리는 것을 가만히 듣다가 책의 제목을 다시 확인했다.
『참 쉬워요. (마탑의 신입생) 어린이를 위한 마법 상식』.
작은 글씨로 ‘마탑의 신입생’이라는 글자가 숨어있었다. 아차 싶었다.
마탑의 신입생은 두 종류뿐이다.
선천적으로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천재이거나 그냥 천재거나.
마탑 신입생이 어떻게 어린이야!
“…그래, 너 잘났다.”
카눌레가 읽기를 멈추고 책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서 그는 자신이 공부하던 교재를 바리바리 챙겨 도서관을 나갔다.
도서관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참 쉬워요’를 내려놓고 얼굴 모를 저자에게 이를 갈았다.
키슈 로렌. 이거 다 당신 때문이에요!
* * *
“크, 크레페? 괜찮니?”
식사 시간마다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내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건지 엄마가 내 이마의 열을 재보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밀어내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여…….”
“지쳐서 발음도 줄줄 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건 원래부터 그랬던 건데.
차마 그런 말은 못 하고 입을 다물자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알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그래? 내가 아빠한테 한 소리 해야겠다.”
“밥이나 먹죠?”
카눌레가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가 카눌레를 책망하는 눈빛으로 흘기고 내게 말했다.
“그래, 우선 식사부터 하자. 하지만 카눌레, 동생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갈레트가 없으니 네가 크레페를 더 챙겨줘야지.”
“혼자 논문을 읽는 애한테 제가 뭘 더 신경 써요?”
“공부 잘하는 거랑은 별개야. 갈레트도 공부는 잘하지만 크레페 앞에서는 바보 같잖아.”
“…….”
좋은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눌레는 받아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막말하는 건 우리 가족의 특성 같은 건가?
“끄응.”
가정 환경과 말버릇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찰할 여유는 없고, 나는 내게 조금 높은 식탁 의자에 올라가려 앓는 소리를 냈다.
엄마가 뒤늦게 내 몸을 들고 의자에 앉혀주었다.
“아무튼 크레페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둘 다 이틀 후에 시간 비워놓는 거 잊지 마. 알았지?”
“네에…….”
요 며칠 동안 나는 논문을 해석하려 날밤을 새우고 있었다.
외국어 같은 활자만 보고 있었더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대체 갈레트는 이걸 어떻게 본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갈레트한테 요약 강의라도 들을 걸 그랬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나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갈레트의 빈자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스푼을 들었다.
음식이 맛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흑흑, 에이미가 없었다면 난 진작 쓰러졌을 거야.
엄마가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말했던 그 이틀 후.
여전히 나는 반시체 같은 몰골이었지만 일정을 미룰 수는 없었다. 오늘은 갈레트가 다니는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축제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마차에 타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승차감은 거지 같아도 시대상을 고려하면 충분히 참아줄 만했다.
그야, 나의 첫 외출이었으니까! 천둥번개가 쳐도 나한텐 상쾌한 날씨였을 거다.
“크레페, 똑바로 앉아.”
“맞아. 어린애도 아니고 부끄럽게.”
카눌레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따지자면 나는 물론이고 카눌레도 어린애였지만,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창밖으로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덧붙여 그건 카눌레도 마찬가지였다. 카눌레에게도 이게 첫 외출이었으니까.
사실 갈레트가 다니는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축제는 연례행사였다.
갈레트가 지금 2학년이었으니, 사실 작년 이맘때에도 축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축제를 구경하지 않았다.
축제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검술 대회에 갈레트가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1학년의 대회 참여는 자율이긴 했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도 갈레트는 대회에 불참하는 게 맞았다.
작년에 갈레트는 겨우 열 살이었고 동급생은 열세 살, 많으면 열여섯 살까지 있었다고 했다.
당연히 열 살과 열여섯 살의 검술 시합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었다.
그 당시 나와 카눌레는 우리의 첫 외출이 좌절됐다는 소식에 굉장히 침울해했다.
그리고 내가 우울해하는 것을 본 갈레트는 ‘내년에는 내가 꼭 멋진 모습을 보여줄게, 크레페!’라며 절치부심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게 오늘이었다.
그래봤자 동급생의 나이가 어려지는 것은 아닐 테니 이기는 걸 기대하면 안 되겠지만, 갈레트는 검술 클럽에 가입하고 최근 3일 동안은 합숙을 한답시고 집에도 안 들어왔다.
그 정도면 거짓말로라도 기대한다고 해줘야지.
“저기 저게 학교예요?”
카눌레가 창밖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렇단다.”
엄마가 대답했다.
외출에 설레던 것도 잠시, 거리가 멀어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우와아아.”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사실 학교라는 단어 자체는 내게 별 감흥이 없었다.
지난 생에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가 집과 학교였고, 그때 나는 공부만 하느라 친구도 뭣도 없었으니까.
내가 감탄한 이유는 학교 건물 때문이었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는 커스터드 자작령에 있는 학교였다.
이름처럼 거기에는 귀족만 입학할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건물은 학교라기보다 성에 가까울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상아색 기둥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1층으로 올라가는 웅장한 계단도 전부 같은 색이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는 중앙에는 몇백 대쯤 되는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한쪽에는 승마장도 보였다.
부속 건물이 여럿 있는 걸 보면 아마 전생의 대학교 캠퍼스 정도 넓이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벌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우리 가문의 기사가 날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발을 헛디뎌 넘어졌을 것이다.
“여기가…….”
카눌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내년에 입학하는 게 목표였으니 이곳을 보는 감상이 나보다 새로울 것이다.
나는 관광지를 구경하러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크레페에에에!”
나를 발견하자마자 갈레트가 내 이름을 외쳤다.
당장이라도 날 껴안으러 올 것 같은 기세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검술 시합을 위한 무대 위에 서 있었으니까.
“부… 부끄러…….”
나는 엄마의 품 안에 얼굴을 폭 숨겼다. 엄마가 알 만하다는 듯 내 등을 쓰다듬었다.
“크흠, 갈레트 학생. 진정하고 검을 준비해 주세요.”
선생인지 심판인지 모를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