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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1)화 (11/181)

11화 

사방이 어두웠다. 어디선가 노이즈 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점수로 웃음이 나오니? 너 그렇게 살 쪄서 결혼은 어떻게 할래? 나처럼 살고 싶어?’

관객 없는 무대에 울리는 듯한 공허한 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나도 너만 아니었으면…….’

“헉!”

번쩍 눈을 떴다. 코앞에 몰려있던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아, 꿈이었구나.

우습게도 깨어나고 나니 내가 무슨 꿈을 꾼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꿈이 다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희미해지겠지. 내가 벌써 그녀의 얼굴을 잊었듯이.

“괜찮으세요?”

“여기가 오디예요?”

“의무실입니다. 잠깐 기절하셨어요.”

마르크가 대답했다.

나는 허리를 일으키고 앉아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히 채워놨던 단추들이 풀어져 있었고 부츠도 벗겨져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산소가 부족해진 것 같답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마르크 아저씨.

나는 헛기침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근처에 몰려있던 기사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들을 대표하듯 마르크가 질문을 꺼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냥 산책하러요. 방해해서 재쏭합니다.”

나는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살짝 허리를 숙여 기사의 예를 표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기만 할 뿐 의무실을 나가지 않았다.

내가 실수라도 했나? 기사의 예가 잘못됐나?

나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들은 저들끼리 웅성이며 나를 관찰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꼭 원시 부족과 소통하러 온 외교관이 된 기분이었다.

나, 나갈까.

나는 허리를 숙이고 낑낑대면서 부츠에 발을 끼워 넣었다.

망할 부츠가 너무 길어서 이것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그때 기사들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마르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잠깐만요. 크흠, 가시기 전에…….”

“네?”

“백작님 얘기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빠 얘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르크 뒤에서 눈을 반짝이는 기사들이 보였다.

…아하. 아빠 팬클럽이었구나.

나도 태어나서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아빠였지만 다행히 해줄 말이 아예 없진 않았다.

작년부터는 그와 통신구로 대화를 주고받거나 답장을 받거나 하는 일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가끔 갈레트에게서 들었던 아빠와의 추억 얘기나 생일날 선물로 받았던 물건들 얘기를 하면 기사들은 웃기도 하고 탄성을 내지르기도 하고 맞장구도 쳐주었다. 프로 방청객이 따로 없었다.

“그럼 올해 생일 선물은 뭘 받으셨습니까?”

“아직 도착 안 했때요. 그래도 기대는 안 해요. 들었으니까 알죠? 아빠 선물 고르는 센스, 완전 꽝인 거.”

나도 이 사실을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사실 아빠는 내가 한 살일 때부터 매년 선물을 보내주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왜 그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냐면, 쓸데없기만 한 선물은 엄마 선에서 모두 버려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엄마가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똥 씹은 표정이 됐다.

일단 아빠가 보낸 내 첫 생일 선물은 몬스터 박제였다. 기사단의 막내가 처음으로 잡은 몬스터라 기념품으로 만들었단다.

하지만 갓난애가 보기엔 징그러웠기에 버려졌다.

그리고 두 번째 생일 선물은 구멍 뚫린 돌멩이였다고 한다. 신기해서 나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다나?

하지만 쓸모없었기에 버려졌다.

거기에 세 번째 생일 선물은 복숭아 씨앗이었는데, 아빠가 복숭아를 먹고 너무 맛있어서 우리 가족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왜 씨앗만 보냈냐면, 복숭아를 직접 보내면 도착하기 전에 상할 테니까.

[먹고 남은 씨앗입니다. 맛있으니까 직접 심어보세요.]

참고로 그 편지와 함께 도착한 씨앗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고. 당연히 버려졌다.

거기까지만 듣고 나는 더 이상 얘기 안 해도 된다고 엄마를 말렸다.

성의가 담긴 쓰레기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엄마의 결단력에 박수를.

“역시 백작님도 사람이었구나.”

“그러게. 무용담에선 완전 괴물이잖아.”

그런 아빠였으니 나는 기사단원들의 저 열렬한 애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도 아빠 얘기 들을래요. 아빠 어떤데요?”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 포지션에서 벗어나 나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명씩 번갈아 입을 열었다.

“전쟁 없는 시대의 영웅!”

“드래곤의 숙적! 검술의 초인!”

“그 이름하야…….”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

…그렇군요.

할 말을 잃었다.

마르크가 내 눈치를 보고 민망한 듯 웃었다.

“사실 저희도 소문만 들었습니다. 백작님께서는 변방에서 잘 내려오지 않으시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우리 사이에선 대단하다는 뜻으로 통하죠. 어지간한 실력으로 변방에 나가면 1년도 못 버티고 죽어 나간다고 하거든요.”

“크흠.”

방금 전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 이름하야…….’를 외친 장년의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마르크가 그에게 찔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아직 어린 아가씨께 험한 말을 듣게 해서 죄송합니다. 단지 백작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단장이라는 사람이 아련히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2기사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직 서투른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피낭시에 기사단의 일원이랍니다. 편히 쉬다 가시길.”

그러고서 그는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올리고 허리를 살짝 숙였다.

나도 똑같이 예를 표하자, 그가 빙긋 웃고 의무실을 나갔다.

곧 복도에서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원, 훈련 복귀!”

“옙!”

의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무게를 잡긴 좀 늦은 것 같지만, 단장님이라고 하시니 모르는 척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서늘한 쇳소리가 메아리치는 연무장에 나 혼자 남겨놓을 수는 없었는지, 내 곁에는 익숙한 마르크가 안내 역으로 남아 있었다.

“기사들 기숙사는 외성에 있고, 저쪽이 아가씨의 저택이 있는 방향입니다. 이 건물에는 의무실이랑 같이 무기 보관함이 있지요. 저긴 창고고요.”

홈그라운드를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마르크가 원체 말하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서 뺑뺑이를 도는 사람들이 제 선배님들이죠. 파이팅~”

“…….”

선배님들한테 저렇게 촐싹거려도 괜찮은 거야?

나는 마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연무장을 돌고 있는 기사들이 제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응원하는 척 염장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덕분에 훈련을 쉴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게 우리 기사단의 평소 모습이라면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군.

“여기가 제2기사단이라고 했쬬? 1기사단은 어디예요?”

“백작님이랑 같이 변방에 나가 있죠. 제2기사단에서도 실력이 좋은 인원은 변방으로 차출된답니다.”

그렇구나.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참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마르크에게 슬쩍 말을 꺼내보았다.

“저 검술 배우면 어떨 것 같아요?”

“예? 갑자기 무슨?”

“웃기쟈나요. 산책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기절이나 하구.”

굳이 그 말을 내 입으로 꺼내야 하는 이 상황부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볼을 불퉁하게 부풀리고 애꿎은 바닥에 발길질을 했다.

“그건 아가씨가 평소에 워낙 단걸 좋아하고 안 움직이셔서…….”

찌릿.

내가 마르크를 쏘아보았다.

굳이 그렇게 직구를 날릴 것까지 있나. 나도 이 상황에 불만이 있으니까 개선하려고 마음먹은 건데.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냥 평소에 자주 산책하세요. 옷도 좀 편하게 입고요.”

“네에.”

나는 빠르게 수긍하며 다시 기사들이 달리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왕이면 제대로 배워보라며 당장 달리기부터 시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저렇게 말해 주니 차라리 안심이었다.

갑자기 운동했다가 탈이라도 나면 어떡해. 그냥 당당하게 산책만 해야지.

뻔뻔하게 생각하자. 그렇게 다짐하고 나는 다시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마르크도 내 말에 진지한 뜻은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요, 뭐. 아가씨는 큰 도련님과 함께 마법을 배운다고 하셨잖습니까. 이왕이면 작은 도련님이 빨리 검을 잡아주면 좋겠네요.”

“카눌레 오빠요? 왜요?”

“그러게요. 왜요?”

카눌레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는 그가 여기까지 나온 것을 보고 소매로 내 눈을 비볐다.

그러나 두 눈을 씻고 봐도 분명 카눌레였다.

“오빠가 왜 여기서 나와?”

“말 전하러 왔어. 근데 내가 검 잡으면 뭐요?”

제멋대로인 어린애답게 카눌레가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마르크가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도련님의 골격을 보니 검술에 재능이 있을 것 같아서요. 쉬제트가의 검법과도 잘 맞을 겁니다.”

“…형보다요?”

“어어엄, 그럴걸요?”

마르크가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썩 믿음직스러운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걸로 충분한 듯 카눌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마법 쪽으로 갈 게 아니면 일찌감치 검술에 매진하는 게 나을지도.

“근데 무슨 말 하러 온 거야?”

“아, 갈레트 형이 그러더라. 크레페에에! 사춘기가 오기엔 아직 너무 이르잖아아아!”

“…….”

그거 설마 갈레트를 흉내 낸 건가?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비슷하지도, 웃기지도 않았다.

그러자 카눌레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아빠가 보낸 선물 도착했대.”

“으응…….”

“뭐예요, 이게? 달걀?”

내가 포장을 열자마자 카눌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게도 그것은 조금 큰 달걀, 아니 거대한 타조 알로 보였다.

내 몸통만큼 크고 둥그렇고, 짙은 갈색에 매끈한 알.

나는 말없이 뚜껑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에 두 손을 넣고 조심스럽게 알을 꺼냈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끙,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놓칠 수는 없었다.

폭신한 쿠션 위에 알을 올려놓고 나는 표면을 살살 쓸어보았다.

무겁고 단단한 게 알이라기보다 관상용 수석 같은 느낌이었다.

“크레페, 아빠 선물 기대한 건 아니지?”

내가 한참 말이 없으니 걱정된 듯 엄마가 속삭였다.

이 시점에서도 아내의 신뢰를 얻지 못한 아빠에게 동정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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