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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9)화 (59/139)
  • 59화

    “안나.”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안나는 잠이 들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가운이 매끄러운 살결을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다가선 필리프가 앙상한 안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힘없이 단단한 팔 안으로 휩쓸려 들어왔다.

    무언가를 쓰고 있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자신이 선물한 펜대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펜을 빼내 주려는데, 엄지와 검지, 중지를 모두 펜대 위에 올려놓아 펜을 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언제 오셨어요?”

    필리프의 웃음소리에 잠에서 깬 안나가 눈을 전부 뜨지 못하고 잠긴 목소리를 냈다.

    “내가 깨운 건가?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야지.”

    “아, 아니에요. 깜빡 졸았나 봐요. 너무 많이 자면 오히려 더 피곤해서요. 업무는 잘 보셨어요?”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운을 올려주는데, 그녀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종이를 황급히 모아 잡았다.

    “뭐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심심해서 그냥.”

    난처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종이를 등 뒤로 감추었다. 조금 당황한 듯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별것 아니에요. 그냥 혼자 심심해서 글을 좀 써본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글일지 궁금한데? 나에게 보여 주면 안 되는 건가?”

    “아, 좀 창피해서… 다 쓰면, 다 쓰면 보여드릴게요.”

    안나가 얼굴 가까이 내민 필리프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든 안나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오늘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 그게… 오늘도 오렌지를 많이 먹었어요. 배가 좀 부르기도 하고 입맛이 별로 없어서.”

    안나가 필리프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어쩐 일인지 요즘 그녀가 자신의 눈을 자주 피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늘 다정하게 시선을 맞받아주었던 그녀였기에, 필리프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의원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어.”

    “아, 아니에요. 매일 쉼 없이 일하다가 갑자기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몸이 아픈 건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몸이 괜찮은지, 아닌지는 검진을 받아보면 알 수 있겠지.”

    “저는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필리프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빛을 읽은 안나가 짐짓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보통은 안나의 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필리프였지만, 이번에는 쉽게 물러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내일 오전에 의원을 방으로 부를 테니 그렇게 알아.”

    의원? 의원에게 검진을 받는다면 임신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필리프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이 사실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도 그를 떠날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렵게 다잡은 마음이 흔들려 혹시라도 배 속 아이를 위험하게 한다면.

    “왜 대답이 없어.”

    필리프가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답을 재촉했다. 당장은 알았다는 답을 뱉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책을 세우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아니, 지금 불만이 있다는 것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럼 왜 요즘에 잘 쓰지 않는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나직한 중얼거림을 뱉은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안나의 허리를 가볍게 잡은 손에 힘을 실어 강하게 그녀의 몸을 당겼다. 살짝 휘청이던 안나의 몸이 사뿐히 제 몸에 낙하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긴 숨을 내뱉었다. 등을 느리게 쓰다듬자 앙상해진 몸의 뼈마디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그동안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베르나에게서 안나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한다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해, 정작 사랑하는 여인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일었다.

    필리프가 앙상하게 돌출된 안나의 어깻죽지를 더듬었다. 안나가 필리프의 품을 빠져나가려 바르작거렸지만, 강하게 허리를 둘러 감은 필리프의 팔의 악력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며칠 사이 살이 너무 빠진 것 같아. 지금 바로 의원을 부를 테니까…….”

    “잠시, 잠시만요.”

    안나가 수행원을 호출하려 종 줄을 잡은 필리프의 손등 위에 다급하게 손을 얹었다. 한 손은 필리프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는 필리프의 재킷 자락을 움켜쥔 안나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 남자 의원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좀 불편해서요.”

    “뭐?”

    “혹시 황궁에 남자 의원밖에 없다면, 이레네 유모님께 진료를 부탁드리면 안 될까요?”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안나의 눈동자를 마주한 필리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알겠지만, 이레네는 의원이 아니야.”

    “하지만 제가 다리를 다쳤을 때 봐 주시기도 하셨고, 맥도 짚어 주셨잖아요. 제 몸 상태가 이상하다면 바로 눈치채실 것 같지 않으세요?”

    “…음.”

    그녀가 남자 의원을 불편해한다면 이레네에게 진료를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나의 정확한 몸 상태를 파악하려면 정식 의원에게 검진을 받아야 함이 필수였다. 고민이 되었지만, 안나의 애절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결정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하, 내가 이렇게도 무른 사람이었나?

    실없이 미소 지은 필리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게 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했던 필리프에게, 안나는 처음으로 자진해서 지는 것에 대한 기쁨을 알려준 이였다.

    “내일 바로 이레네를 입궁시켜 상태를 살피라 하겠어. 단, 이레네가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고 말하면 그 즉시 의원을 만나야 해. 몸을 위해서 그 정도 마음의 불편함은 감수해야지.”

    단호하지만, 따뜻하고 다정한 필리프의 눈빛을 마주하자 그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솟구쳤다. 느른하게 눈을 휘어 웃는 그와 계속 눈을 맞추고 있다가는 그대로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답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참아야 해. 마지막까지 괜찮은 척, 멀쩡한 척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안심시켜야 해. 이미 결정한 일이야. 망설임이 있어서는 안 돼.

    “그렇게 할게요, 다음에는?”

    “네?”

    필리프가 안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내 귀에 제대로 된 호칭이 안 들리는데?”

    아, 그러니까 아까 폐하라고 불렀던 것이 끝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군요. 안나가 그의 어깨에 가만히 입술을 누르며 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필리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기다란 손이 조금씩 느려졌다. 살그머니 미끄러져 내려온 단단한 손끝이 안나의 귓불을 매만졌다.

    “정말 식욕이 그렇게 없는 거야? 난 너와 먹으려고 점심도 걸렀는데.”

    “아, 정말요? 그럼 지금이라도 뭘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도 조금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필리프가 크게 튀어 오르는 안나의 등을 가볍게 잡아 다시 품에 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일단은 좀 이러고 있다가.”

    종일 기다려왔던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숨결과 체취가 제게 닿을 시간만을 기다리며 쉴 새 없이 업무를 소화했다.

    “제가 간단한 것이라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지금은 좀 어렵겠죠?”

    “음식이야 언제라도 만들어 주면 되지. 며칠만 참아. 앞으로 시간은 많잖아?”

    안고 있는 안나의 등이 크게 움칠거렸다.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를 잡아 그녀에게서 살짝 상체를 떼어 내고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어딘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왜.”

    “아, 저 그게 아니라…….”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안나의 시야에 어딘가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아, 저게 뭐예요?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필리프의 시선이 안나의 눈동자를 따라 테이블 위로 이동했다. 안나의 상태를 살피느라 대충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상자가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필리프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어낸 안나가 상자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필리프가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상자를 낚아챘다.

    “뭔데 그러세요?”

    안나에게 상자를 건네는 필리프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이게 뭐냐는 듯 호기심 어린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답지 않게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를 뱉었다.

    “별것 아니야.”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열어 봐도 돼요?”

    낮게 헛기침한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의 등 뒤로 이동했다. 잠자코 필리프의 얼굴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게…….”

    가만히 상자 속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를 대신해, 필리프가 대신 보석함을 들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너무 예뻐요.”

    “이 안에는 시계가 들어있어.”

    필리프가 붉은 루비를 눌러 중앙의 시계를 드러나게 했다. 안나가 초침과 시침이 모두 0에 고정된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자신과 필리프의 시간이 곧 멈추게 될 것을 예고하는 듯한 시계의 초침과 시침.

    “일부로 시간은 맞추지 않았어. 너와 있을 때만큼은 시간의 흐름을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까.”

    차라리 멈추어 버린 이 시곗바늘처럼 우리의 시간도 그대로 멈추어 주길. 이대로 소멸해 버린다 해도 상관없으니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왜, 마음에 들지 않아? 혹시 시계의 시간을 맞추길 원한다면 내가 내일 당장이라도 맞춰올 테니까.”

    안나가 자신이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 당황한 것인지 필리프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안나가 황급히 보석 상자를 집는 필리프의 손 위에 제 두 손을 얹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가락 틈을 파고든 안나의 손가락이 그의 굵은 손가락과 얽혀 단단한 매듭을 만들었다.

    “아뇨. 아니에요. 너무, 너무 좋아요. 너무.”

    행복으로 충만한, 한없이 벅찬 표정을 지은 안나가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빛이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찬란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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