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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8)화 (58/139)
  • 58화

    하루, 이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헤아리던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가 황궁을 떠나기까지 앞으로 이틀. 남은 날을 무사히 넘기게 되면 이제 필리프와 함께할 수 있는 날이 고작 3일밖에 남지 않게 된다.

    마샤와의 만남도 이틀 후로 미뤄 두었다. 필리프는 그사이 황녀가 마샤와 접촉할 것에 철저히 대비하며 안나의 불안감을 잠재워 주었다.

    시간을 아끼고 아껴 최대한 필리프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에게 의심받을 행동을 하게 될까 봐 오히려 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는 요즘이었다.

    “하아… 괜히 지레 겁먹어서는. 어차피 그럴수록 더 후회하게 될 텐데…….”

    오랜만에 필리프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까? 황궁 주방을 사용할 수는 없을 테니 방 안에서 간단한 조리도구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안나가 약초 정원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수많은 약초와 나물을 떠올리며 의자에 걸어 놓은 망토를 집어 들었다. 급하게 방문을 여는데 방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 두 명이 안나의 앞을 단단하게 가로막았다.

    “아, 저 잠시만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내일까지는 산책해서는 안 된다는 폐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예?”

    호위병 두 명이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을 기세로 안나를 둘러쌌다. 자신을 걱정하는 필리프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 중 유일하게 침실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실망감이 먼저 느껴졌다.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딱 삼십 분만.”

    “안 됩니다.”

    아무리 사정하고 애원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황제의 명령을 어길 이들이 아니었다. 안나를 다시 침실 안으로 들어서게 한 호위병이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아니, 그래서 오늘은 인사도 하지 않고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던 건가?

    자신의 뺨에 키스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던 필리프였는데, 오늘은 아무 인사 없이 침대를 빠져나가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던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안나였다.

    최근 안나의 말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필리프였기에, 얼굴을 보고 항의한다면 아마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나름 머리를 굴린 그가 급히 침실을 빠져나갔을 모습을 상상한 안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

    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바구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구니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잘 익은 오렌지였다.

    “아, 정말 못 말려.”

    자신이 먹은 오렌지 껍질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안나가 바로 바구니 가장 위에 놓인 오렌지를 들어 껍질을 벗겼다. 입안에서 터지는 오렌지 과즙이 꿀처럼 달았다.

    “응? 이건 또 뭐야.”

    바구니 앞에 새하얀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는데, 앞장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손에 쥔 오렌지를 내려놓은 안나가 손의 물기를 닦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접착이 되지 않은 봉투가 쉽게 열렸는데, 봉투 안에는 손바닥 크기 정도의 민무늬 종이가 들어있었다.

    활자를 읽기도 전에 가슴이 뻑뻑하게 부풀어 올랐다. 크게 심호흡한 안나가 빳빳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틀 동안은 아무 곳에도 가지 말고 방에만 머물러 주었으면 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상상만으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

    그를 닮아 정갈하고 잘생긴 글씨체였다. 다 읽은 글자를 또 읽고 다시 읽은 안나가 종이를 곱게 편지 봉투에 넣었다.

    “아니,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항의할 마음을 그대로 사라지게 하는 다정한 글이었다. 침대 시트 안에 숨겨 놓은 꾸러미 깊숙이 편지 봉투를 넣은 안나가 그가 누웠던 시트 자리를 조심스레 쓸었다.

    곧 안나의 손이 그의 체향이 깊게 남아 있는 베개로 옮겨졌다. 푹신한 베개를 꼭 끌어안고 그 위에 몸을 눕혔다. 어느새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그의 향이 콧속 가득 들어차자, 마치 그와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조금만 더. 잠시만.

    눈을 감은 안나가 눈꺼풀을 끌어 내리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포근한 향이 몸을 감싸는 기분에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았지만, 허벅지를 아프게 꼬집으며 잠을 몰아냈다.

    언제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필리프를 맑은 정신으로 마주하고 싶었다.

    * * *

    보석 세공사가 금빛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로 손을 뻗은 필리프가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세공물을 집어 들었다. 필리프가 직접 디자인해 세공사에게 조각을 맡긴 보석함이었다.

    “음.”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필리프가 신중하게 보석함을 살폈다. 그런 그의 눈치를 살피던 세공사가 불안감에 먼저 입을 떼어 냈다.

    “아게이트 원석을 조각하여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로 장식했습니다. 중간에 박힌 루비를 누르시면.”

    필리프가 붉은 루비를 누르자 보석함이 반으로 나뉘며 핑크 에나멜과 진주로 장식한 시계가 보였다.

    “시간을 따로 맞추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그래. 수고했어.”

    “예? 아, 아닙니다, 폐하. 시간은 말씀만 해주시면 제가 바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세공사가 한 달여에 걸쳐 완성한 보석함이었다. 다시 한번 꼼꼼히 보석함을 확인한 필리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세공사에게 금빛 꾸러미를 건넸다.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꾸러미를 받아든 세공사가 황제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만 나가 봐.”

    안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만한 것을 주고 싶어 고민하던 필리프는 문득 아버지가 아꼈던 보석 세공사를 떠올렸다.

    ‘완벽하네. 그녀가 좋아할 것이 분명해.’

    ‘이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받고 감격하지 않을 여인은 없을 것입니다, 폐하.’

    아버지와 보석 세공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필리프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보석 상자를 열어 보았다. 정교하고 화려한 반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필리프는 그대로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려는 것 같아요!’

    ‘선물?’

    ‘예. 아버지가 어머니께 아름다운 반지를 선물하실 거예요.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운 반지를요.’

    당연히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어쩐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잠자리에 들도록 해라. 시간이 많이 늦었구나.’

    ‘하지만 어머니, 제가 정말 봤다니까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반지를요!’

    ‘유모. 황태자를 침실로 데려다주게.’

    ‘예, 황후님.’

    늘 그랬듯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에는 온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어머니께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면 한 번쯤은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지 않을까, 한껏 솟아올랐던 기대감이 어김없이 무너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유모. 나랑 더 있어 주면 안 돼?’

    ‘저는 황녀님께 돌아가야지요. 곧 황태자님의 유모님이 오실 것입니다.’

    어린 필리프가 유일하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상대는 베르나의 유모였던 이레네 칼리프뿐이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답니다.’

    ‘하지만 나에게 너무 냉정하신걸. 유모도 아까 봤잖아.’

    ‘황태자님이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단단한 성군으로 자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유모가 베르나가 아닌, 내 유모였으면 좋겠어.’

    외롭고 쓸쓸했던 시절, 유일하게 필리프에게 온기를 나누어 주었던 이레네는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가 무섭게 황궁을 떠났다.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사람이 주는 온기의 따뜻함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반지는 아버지가 연모했던 황궁 시종의 손가락에 끼워졌고, 그녀는 제국을 위기에 빠뜨리는 기밀을 빼돌려 도주했다. 그제야 필리프는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랑의 감정 자체를 배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안나를 만나기 바로 전까지는.

    “폐하. 샤르만 백작의 전갈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래. 더글러스 남작의 움직임은 어떤가.”

    “내일 황궁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샤르만 백작과 더글러스 남작은 필리프가 황위에 오르기까지 그에게 아낌없는 힘이 되어 주었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필리프는 그들에게 약조했던 작위를 안겨 주었었다.

    “음…….”

    샤르만 백작의 전갈을 읽은 필리프가 나지막한 탄식을 뱉었다.

    “한몫을 단단히 챙겨 보겠다는 생각이군.”

    어차피 선의를 베풀어 자신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충격은 크지 않았다. 예상보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것에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안나를 황후로 삼기 위해 일단은 자신의 편을 빠르게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일 일정을 조정하도록 해. 두 사람을 먼저 만나봐야겠으니까.”

    “알겠습니다, 폐하.”

    군수 물량이 적힌 서류에 서명한 필리프가 수행원에게 서류를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식사는 침실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따로 지시할 때까지 대기해.”

    침실로 향하는 필리프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안나와 함께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점심도 거르며 업무를 수행했다. 희미하게 허기가 일었지만, 안나의 얼굴을 보는 것이 먼저였다.

    그녀의 마음에 찰 선물을 만들기 위해 황위에 오르며 즉시 황궁에서 내쳤던 보석 세공사를 불러들였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선물을 받고 기뻐할 그녀의 모습만을 상상했다. 보석상자를 쥔 손바닥에서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폐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이 필리프의 얼굴을 확인하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주변을 오가는 이는.”

    “없었습니다, 폐하.”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안나가 요 며칠 내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슬쩍 미간을 찌푸린 필리프가 침실 방문을 잡아 돌렸다. 방문을 열자 온종일 자신만을 기다렸을 안나의 작고 마른 어깨가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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