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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0)화 (60/139)
  • 60화

    맥박이 빨라지면서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분에 침실 문을 응시한 안나가 몸을 작게 웅크렸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시를 점검하던 필리프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안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무릎 안에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왜 그래? 괜찮은 거야?”

    그를 안심시킬 만한 말을 뱉고 싶었지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안간힘을 쓰고 숨 한 모금을 겨우 들이마셨을 때, 방 밖으로 누군가와 실랑이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빠르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필리프가 안나의 등을 부드럽게 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칠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니 문 앞에 모여 있던 호위병들이 빠르게 필리프의 시야를 열어 주었다.

    “그대가 어쩐 일이지.”

    날 선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은 베르나가 치맛단을 살짝 잡아 무릎을 굽혔다.

    “폐하를 뵙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베르나의 시선이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안나로 향하기 직전, 필리프가 몸으로 문틈을 가리며 방문을 닫았다.

    “폐하를 뵙고자 알현 요청을 하던 중이었는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베르나의 시선이 자신을 둘러싼 호위병들에게로 이동했다.

    “떠날 사람이라 생각했던 걸까요? 이자들의 태도가 이리 되바라진 것을 보면.”

    찬 바람이 쌩쌩 이는 베르나의 날카로운 말투와 시선이 호위병 한 명 한 명의 얼굴에 길게 머물렀다.

    “설마 모르지는 않을 테고.”

    “…예?”

    필리프가 베르나의 앞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이자들은 제국의 황제인 내 말에 따르려던 것뿐이었어.”

    베어 문 베르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분노와 굴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지금 그대의 알현 요청을 받아줄 수 없는 상황이야. 훨씬 먼저 정식으로 알현을 청한 자가 있어서.”

    “제게 십 분도 내어주실 수 없다는 말입니까?”

    “어차피 내일 그대가 가는 길을 배웅할 테니,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겠지.”

    화를 억누른 필리프가 자신의 호위병 뒤에 서 있는 베르나의 시종에게 눈짓했다.

    “이만 황녀를 모시고 떠나도록.”

    숨죽이고 황제와 황녀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 무리가 움찔 놀라며 슬금슬금 발을 움직였다.

    “그럼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공께서 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 청했습니다. 설마 여동생을 떠나보내며 저녁 식사 한 번도 같이 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베르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필리프가 빠르게 답했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군.”

    “…예?”

    “그대의 청에 따르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며 준비했던 피로연을 취소했어. 그 시간에 다른 일정을 넣었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기 곤란해. 나는 그간 최대한 그대의 뜻에 맞춰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성질을 억누른 베르나가 반박하려 입을 벌렸지만, 필리프가 조금 더 빨랐다.

    “안 그런가?”

    되묻는 말투에서 싸늘함이 묻어났다. 베르나가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 필리프의 재킷 자락을 움켜쥐었다.

    “대공은 폐하께 광산 채굴권을 양보하였습니다. 홀대가 너무 심하신 것…….”

    “홀대?”

    짧게 실소한 필리프가 베르나의 말을 끊었다.

    “대공이 우리 제국에 광산 채굴권을 넘긴 것이, 오로지 그대를 결혼 상대로 맞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

    “대공과 나는 거래를 한 것이야. 그가 채굴권을 넘겨주는 대신, 나는 대공이 파이만 제국 왕위의 오르는 순간 군사적 평화 협정을 맺는 것에 동의했어. 그러니까.”

    잠시 말을 멈춘 필리프가 한심하다는 듯 베르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계약을 맺은 거야.”

    “…….”

    베르나가 떠나기 전까지 함구하려 했던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신경이 안나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해야 했다. 어서 안나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에 마음이 바빴다.

    “답이 되었으면 이만 물러가지.”

    말문을 잃은 베르나가 아랫입술을 아프게 베어 물었다. 필리프의 시선을 피한 베르나가 인사 없이 발을 돌렸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침실로 돌아온 필리프가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새파랗게 질렸었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는 듯했다.

    “주치의를 부를 테니 잠시만 누워있어.”

    안나의 몸을 한꺼번에 들어 올린 필리프가 침대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폐하.”

    “불편하더라도 참아. 이레네가 입궁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

    반박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 끝이 단단했다. 필리프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쉰 안나가 등을 돌려 나가려는 필리프의 팔목을 잡아 붙들었다.

    “알겠습니다. 폐하의 말에 따를 테니까.”

    “…….”

    “잠시만, 잠시만 곁에 있어 주세요.”

    주치의의 진찰을 받으면 임신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사실을 숨겨야 했지만, 먼저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안나가 그의 손목에 놓여 있던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상체를 낮춰 안나의 등을 매트리스에 눕힌 그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긴장이 풀린 목덜미에 깃털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황녀님이 오신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나 봐요. 갑자기 너무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대단한 능력인데?”

    “그게 아니라.”

    “자, 지금은 어떤 기운이 느껴지지?”

    빈틈없이 맞닿은 몸으로 그가 웃는 것이 전해졌다. 자연스럽게 몸에 힘이 풀려 단단한 그의 품 안에 늘어졌다.

    “이제 괜찮아요. 폐하도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바쁜 그의 시간을 더 빼앗을 수는 없었다. 안나가 그의 어깨에 묻은 얼굴을 떼어 냈지만, 다시 손쉽게 몸이 그의 가슴 가까이 당겨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어깨뼈부터 등 아래까지 천천히 쓸어내리던 그의 손이 드레스 아래로 파고들어 왔다. 아이를 어르는 듯 부드럽고 다정한 손놀림이었지만, 안나의 마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너를 절대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짐과도 같은 그의 말을 들으니 앞으로 생길 일은 전부 운명에 맡겨 두고, 그의 앞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내 미뤄 두었던 두려움과 절망감이 몰아닥쳤다.

    그가 없는 삶을, 그가 없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까?

    “폐하.”

    “말해.”

    “…….”

    안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상체를 살짝 떼어낸 필리프가 그녀의 등을 안았던 손을 내렸다. 그의 손끝이 배 위를 스치는 순간, 입술 끝까지 밀려 나왔던 말을 혓바닥 밑으로 삼켜냈다.

    정녕 아이까지 잃고 싶은 것입니까.

    이레네의 경고를 떠올리는 순간 아득한 공포가 찾아들었다. 빳빳하게 경직된 몸을 필리프에게서 완전히 떼어낸 안나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오늘 일정이 바쁘시다고 하셨잖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익숙한 향기가 멀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안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배웅하려 함께 상체를 세우려는 안나를 만류했다.

    “주치의를 불러줄 테니 검진을 받고 있어. 일을 마치는 대로 바로 돌아올 테니까.”

    “…예.”

    그가 등을 돌려 침실을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힘겹게 버티고 있던 안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금세 샘솟은 눈물로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약해지고 싶지 않았고, 울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 새어 나온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가슴이 고통스럽게 조여들었다.

    떨어진 눈물이 베개를 흥건히 적시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치의 마르크 헤밀입니다.”

    황급히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은 안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예, 들어오십시오.”

    무릎을 다쳤을 때 얼굴을 보았던 중년의 남자가 안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안나가 테이블 앞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아, 아닙니다. 바로 검진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나를 안락의자에 앉게 한 헤밀턴이 먼저 그녀의 맥을 짚었다. 입술을 깨문 안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말자. 아직 아이를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어.

    한참을 안나의 손목에서 손끝을 떼어내지 않던 주치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 손에 힘을 완전히 풀어보십시오.”

    “…예.”

    그 뒤로도 한참이나 안나의 맥을 짚던 주치의가 들고 온 왕진 가방을 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 평평한 곳에서 진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침대에 누우십시오.”

    불안감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뻑뻑한 눈을 빠르게 깜빡인 안나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왜… 어디가 좋지 않은 것입니까?”

    부산스럽게 왕진 가방 속을 살피던 주치의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 아닙니다. 사실 지난번 맥을 짚었을 때는 맥이 너무 약해서 걱정스러웠는데, 오늘은 맥이 아주 잘 잡힙니다. 폐하께서 당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셔서 간단한 검사를 해 보려는 것뿐입니다.”

    “아, 예.”

    다행이다. 아직 임신 사실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아. 그래. 아직 외관상으로는 거의 변화가 없으니까 침착하게 행동하자.

    주치의의 귀에 들리지 않게 안도의 숨을 내쉰 안나가 침대로 이동했다. 가방 안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낸 그가 안나의 몸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피고 무언가를 적기를 반복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는 없습니까.”

    “예. 모두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주치의가 들고 있던 수첩과 펜을 가방 안에 넣고 커다란 유리병 하나를 꺼내 안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유리병 안에는 말린 약초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번보다 몸의 체온도 많이 올라간 것 같고, 다행히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 예.”

    “식사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고 들었습니다. 음식에 이 약초를 조금 곁들여 보십시오. 입맛을 돋우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

    “예, 감사합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나가 주치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전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내일도 오시나요?”

    “매일 몸 상태를 살피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럼.”

    안나에게 살짝 묵례한 주치의가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몸에 긴장을 푼 안나가 이마 아래로 흐른 땀을 닦았다.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저 멀리 필리프가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이 보였다.

    “어?”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가 안나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시간이 멎은 것처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단하게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으로 사진을 찍어, 가슴속에 품고 간직하고 싶었다. 그가 너무너무 그리워지는 순간 언제라도 꺼내어 볼 수 있게. 안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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