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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4)화 (24/139)
  • 24화

    한참이나 방안을 서성이던 베르나가 테이블에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나의 반응을 떠올렸다.

    ‘저, 완성되었습니다, 황녀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안나의 언니인 루이사가 베르나에게 아티초크 요리를 자주 해주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평소 가벼운 대장 장애를 앓았던 베르나에게 아티초크 요리는 꽤 효과가 있는 음식이었다.

    ‘이파리 안쪽 기둥 부분이 가장 맛있습니다. 잎은 꽃대에 붙은 부분만 드십시오.’

    ‘식감이 아주 부드러운데?’

    ‘어렸을 때 동생과 자주 요리해 먹곤 했습니다. 질긴 잎을 급하게 씹어 먹다가 크게 고생한 이후, 동생은 조금도 먹지 못하지만요.’

    그래. 루이사가 분명 그리 말했었는데.

    ‘너도 맛을 보겠느냐.’

    ‘…그래도 괜찮을까요?’

    베르나의 눈치를 살핀 안나가 베르나가 남긴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신난 표정으로 음식을 입안에 넣고 씹는 모습이 떠올랐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행복하게 음식을 씹는 모습은 결코 꾸며낸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오래 앓아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잖아? 뭔가 이유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황녀님. 재단사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지난밤 필리프와 안나가 입을 맞추는 것을 목격했다. 제 오라비가 황궁 시녀 따위와 뒹구는 것은 사실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비천하고 어여쁜 아이에게 욕정으로 끌리다 말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안나가 혹시라도 제 언니에게 무언가를 들었다면? 그것을 기억해 낸다면? 혹시 작은 증거를 남겼다면? 이를 낱낱이 필리프에게 고해 바친다면? 치맛자락에 휘둘린 필리프가 그녀의 말을 믿는다면?

    역시 불안해. 그러니까 확실히 처리해 버렸어야 했어.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화근을 남겨둔 것이 실수였다. 질긴 명줄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살아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황녀님을 뵙습니다.”

    “아, 그래. 이쪽에 앉아.”

    “예, 황녀님. 여기 최종 가봉이 끝난 드레스입니다.”

    재단사의 뒤에 서 있던 시종 두 명이 완성된 진줏빛 드레스를 꺼내놓았다. 크게 감흥 없는 눈동자로 드레스를 훑은 베르나가 서둘러 드레스의 치수를 확인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다음 주 치장할 보석들과 함께 다시 입어 보도록 하지.”

    “예?”

    평소 피곤할 정도로 예민하게 드레스를 살피곤 했던 베르나였기에, 이토록 쉽게 피팅이 마무리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재단사였다.

    “혹시 따로 원하시는 보석이 있으시면.”

    베르나가 귀찮다는 듯 손을 공중에 휘휘 휘저어 재단사의 말을 끊어냈다. 황녀에게 인사말을 전한 재단사가 방을 빠져나가고, 착복 시중을 들인 베르나가 급히 차비를 시작했다.

    “잠시 시장에 다녀와야 하겠어. 마차를 준비하도록 해.”

    “예, 황녀님.”

    역시 직접 나섰어야 할 문제였다.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는 절대 깨끗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베르나가 두툼한 망토를 손에 들었다.

    * * *

    안나가 급히 정원 문을 열었지만, 약초 정원은 비어 있었다. 베르나 황녀와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마샤가 자리를 떠난 모양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안나가 황궁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베르나는 내내 자신을 관찰하듯 집요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대체 그녀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함께 있을 때 언니의 이야기를 자주 꺼내놓는 것으로 보아, 언니와 연관이 있는 문제 같아. 대체 뭐지?

    안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음을 걷는데, 작게 접은 종이 한 장이 드레스 안쪽을 빠져나왔다.

    [나를 놀라게 할 만한 음식을 준비해 봐.]

    헉! 맞다. 요리를 준비해야 하는데! 아, 뭘 준비해야 하지?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은 것 같은데! 황제의 요리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안나가 다급한 마음에 급히 발걸음의 보폭을 넓혀 뛰듯이 걷기 시작했다.

    황궁 주방이 시야에 들어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누군가 안나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온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고개를 돌린 안나가 팔을 끌어당긴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케이든 아들레드. 첫 만남과 그리 다르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등장이었다.

    “왜 이러세요!”

    재빨리 잡힌 팔을 뿌리친 안나가 그에게서 그대로 등을 돌리려는데, 그대로 몸을 튼 그가 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거대한 나무에 길이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그가 안나에게 상체를 바짝 밀착시켜왔다.

    “잠시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 저기요.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케이든에게서 시선을 돌린 안나가 빠져나갈 만한 공간을 살폈다. 억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그의 태도에 불쾌함이 느껴졌다.

    “혹시 제가 당신께 무슨 실수를 한 것입니까?”

    안나가 케이든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 그래. 늘 만나던 장소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었지? 오래 기다렸으려나? 어째 풀죽은 대형견 같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럼 왜. 왜 그날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날이 밝을 때까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아, 사람이 안 오면 대충 기다리다 가지, 뭘 또 그렇게까지 기다리고 그랬대. 사실 만남을 확실하게 약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안쓰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확실히 이야기해 둘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말 해두지 않으면 또 이런 식의 만남을 이어가려고 할 것이 뻔했다.

    “저기, 그게요.”

    안나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창문 너머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케이든이 급히 말을 뱉었다.

    “오늘은 꼭 나와 주십시오. 반드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니, 저기!”

    또 제 할 말만을 내뱉은 케이든이 빠르게 등을 돌려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안나가 그가 지나간 자리를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 * *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필리프가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수행원을 호출했다.

    “이번 주까지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다고 했지. 지금 가져와.”

    “예, 폐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수행원에게서 두꺼운 서류철을 받아든 필리프가 꼼꼼하게 문서를 훑어보았다.

    “저, 폐하. 집무실에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일을 마무리하고 따로 지시하지.”

    아침부터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아침 식사를 거른 황제는 네 시간이 넘는 회의가 끝나고 바로 집무실로 이동했고, 점심까지 마다한 채 내리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다행이기는 했지만, 오래 끼니를 거르는 것이 걱정되어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따뜻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수행원이 집무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은 필리프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았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어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따뜻한 차와 설탕을 든 수행원이 다시 집무실에 들어와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고 찻물을 머금은 황제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잔을 든 손을 내렸다. 집중한 황제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식사를 권유하려던 마음을 접은 수행원이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같은 자세로 서류를 훑어 내리던 필리프가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한 뒤 서류철을 덮었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던 찻잔의 열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찻잔을 테이블 바깥으로 밀어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수행원을 호출했다.

    “예, 폐하.”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

    “예?”

    베르나가 자신과 안나가 키스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베르나의 화살이 언제든 안나에게로 향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아야 했다. 안나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위장 시종을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황궁 주방인데…….”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주방이니만큼 근거리에서 안나를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무예가 뛰어난 여성을 투입 시키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갑작스러운 채용에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일단 체구가 작은 남자 중 무예에 능한 이 두어 명을 불러오도록. 최종 선택은 내가 할 테니.”

    “알겠습니다, 폐하.”

    그대로 집무실을 나서려던 수행원이 등을 돌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폐하.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 안나 스완에게 음식 준비를 맡겼으니.”

    “아, 그럼 준비되면 음식 시종과 함께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안나 스완만 들이도록 해.”

    수행원이 놀라 벌어졌던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필리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몇 차례의 음독 시도가 이어졌다. 이후 황제는 테이블에 오르는 요리에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늘 자신의 음식을 먼저 맛볼 시종을 옆에 붙여 놓았었다. 유독 안나에게만은 예외적인 행동을 보이는 황제의 모습에 걱정이 앞서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폐하.”

    “그만 나가 봐.”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수행원의 말을 끊은 필리프가 수행원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머뭇거리며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수행원에게 짜증이 역력한 시선이 돌아왔다.

    “뭐 하는 거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말투에, 수행원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주인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수행원이 집무실을 나서고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고 앉은 필리프가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직 시간을 벌기 위해 종일 업무에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잠시의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안나와의 입맞춤을 잠시라도 머릿속에서 지워내기 위함이었다.

    시계에서 시선을 뗀 필리프가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뺨 한가운데부터 시작된 홍조가 그녀의 얼굴 전체로 퍼지고, 결국은 목덜미와 귓바퀴까지 온전히 물들였을 때 그대로 눈을 감았던 것 같다. 절대 떼고 싶지 않던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던 건, 팽팽해진 아랫도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수줍어하면서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혀를 놀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입술이 떨어질 때 자신만큼이나 아쉬워하던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깟 입맞춤이 뭐라고 잔상까지 아른거리다니.

    피식, 실소를 뱉은 필리프의 시선이 다시 벽난로 위 시계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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