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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5)화 (25/139)
  • 25화

    마샤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도 있었고, 카라나 주방장님께 물어야 할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메뉴를 생각해 놓지 못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음식 이외의 것에 여력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으악, 어떡해! 소금을 넣어야 했는데!”

    급하게 음식을 마련하려다 보니, 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던 실수를 연발했다. 소금으로 간을 더해야 하는 소스에 설탕을 뿌려 넣고, 채를 썰 듯 썰어야 할 채소를 전부 다져 버리기도 했다.

    “서안나. 이러면 안 돼. 집중하자!”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잣말로 의지를 다진 안나가 다시 차근차근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 안나.”

    간신히 집중해 만든 소스의 간을 보려는데 등 뒤로 다가온 마샤가 작은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어, 마샤. 이게 뭐야?”

    “어. 너 저녁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잖아. 이거라도 먹으라고.”

    접시에는 사과잼이 들어 있는 케이크가 담겨 있었는데, 모양이 예쁘지 않아 황제의 식탁에 오르지 못한 디저트인 것 같았다.

    “고마워, 마샤. 아, 저기 아까 정원에 가지 못해서 미안. 많이 기다렸어?”

    “아냐. 황녀님이 너 데려가는 거 보고 나도 바로 주방에 돌아왔어.”

    “아까 하려던 말, 혹시 지금 말해줄 수 있어?”

    살짝 얼굴을 찌푸린 마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래도 내가 오해한 것 같아. 별것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응?”

    “아니, 혹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 줘.”

    입술을 달싹이던 마샤가 결심한 듯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저 멀리 서 있던 카라나가 마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나중에 봐, 안나.”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작업대 한쪽으로 밀어 놓은 안나가 소스를 맛보고 부족한 맛을 추가했다. 잘 삶은 고기를 얇게 썰어 커다란 접시에 보기 좋게 담고, 곁들일 소스를 담은 종지를 접시 중앙에 놓았다.

    플레이팅이 끝난 접시를 내려다본 안나가 급하게 케이크 접시를 비워내는데,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황제의 수행원이 주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 되었으면 접시를 들고 따라오도록.”

    “예.”

    수행원을 따라 어느새 익숙하게 느껴지는 황궁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발을 멈추지 않은 수행원이 집무실 우측 복도를 가로질러 응접실과 서재를 차례로 지나쳤다. 이제 남아 있는 방은 딱 하나, 황제의 침실이었다.

    “폐하.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침실 문 앞에 다다른 수행원이 바로 방문을 두드리며 도착 사실을 알렸고, 곧 방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길게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한 안나가 수행원이 열어준 방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고개를 들라는 분부가 떨어졌다. 안나가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허리춤 정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내려놔.”

    “예.”

    안나가 필리프가 가리킨 테이블 가까이 다가가는데, 접시를 쥔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긴장되지? 어떡해. 이러다간 접시를 놓쳐 버리겠어.

    “몸이 좋지 않은 건가?”

    간신히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는데, 불쑥 다가온 필리프의 손이 이마 아래로 내려온 안나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으악!”

    뻣뻣하게 굳은 몸을 물리려다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나가 참고 있던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가지가지 한다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내 손이 더러워?”

    에?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에 번쩍 고개를 쳐든 안나가 바로 입을 열고 변명의 말을 뱉었다.

    “아, 아닙니다! 서, 설마요! 더, 더럽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 그럼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

    이번에는? 이번에는 이라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무릎을 굽혀 안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뭐야. 설마 또 키스하려는 건가? 정말 가만히 있어야 할까? 어쩌지?

    얼굴 가까이 뻗어온 필리프의 손가락이 턱을 가볍게 쳐들었다. 안나가 그대로 두 눈을 꽉 감고 숨을 멈추는데, 예상하지 않았던 곳에, 예상했던 것과 다른 감촉이 닿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혹시 더운 거야?”

    미지근한 온도의 손가락이 닿은 곳은 안나의 이마였다. 땀이 새어 나온 이마를 가볍게 쓸어내린 손이 빨갛게 달아오른 안나의 뺨을 스쳤다.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뜬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자, 그만 일어나지?”

    먼저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 즈음으로 손을 뻗었다. 뭐야.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가? 멀뚱멀뚱 그가 뻗은 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내려놓았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었다. 잡은 손에 힘을 실은 그가 한 번에 안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음식 설명을 듣고 먹는 편이 낫겠지?”

    의자에 앉은 필리프가 차가운 물로 입을 헹구며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아, 예. 사, 삶은 돼지고기입니다. 준비한 소스를 곁들여 드시면 됩니다.”

    돼지고기 수육. 주로 구운 고기를 즐겨 먹었던 시대였으니, 새로운 맛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 싶어 선택한 음식이었다. 된장이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다행히 다양한 종류의 약초와 향신료를 사용해 잡내 잡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포크를 쥔 필리프의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물에 빠진 고기라니 생소할 만도 하지. 그런데 고기가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을 텐데. 안나가 급히 입을 열었다.

    “식기 전에 드셔보십시오. 소스가 짭짤한 편이니, 소스는 살짝만 찍어서 드시면.”

    “식사 전인가?”

    “예?”

    조금 전 싹싹 비운 케이크 접시가 떠올랐지만, 시치미를 떼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럼 함께 먹지.”

    포크를 쥔 손이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함께 먹으려고 포크를 두 개 가져온 것 같은데?”

    “예? 아, 아 저, 그건 그냥 혹시나 하고…….”

    안나는 지난번 그의 침실에서 하나의 포크를 사용했던 것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포크 하나를 더 챙겨 넣었었다. 직접 고기를 집어 안나의 손에 포크를 쥐여 준 필리프가 소스를 얹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반응을 살피느라 필리프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안나가,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완전히 씹어 넘기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들고 있던 포크를 입가로 가져갔다.

    으음! 역시 내 수육 삶는 솜씨는 기가 막혀! 야들야들하면서도 쫄깃한 이 육질! 아, 소주 한 잔만 딱 마시면 소원이 없겠어.

    주로 다루던 돼지고기보다 질긴 육질을 연하게 하려고 각종 과일을 갈아 연육제를 만들었고, 고기를 삶는 시간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요리이지만, 시간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식이었다.

    막 담근 배추겉절이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급히 수육 한 점을 더 입에 넣는데,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본인이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맛있어하는 반응이라니.”

    “예?”

    급히 입안에 든 음식을 삼키느라 사레가 들려 얼굴이 붉어졌다. 필리프가 연신 콜록거리는 안나의 앞으로 물컵을 밀어주었다. 물 한 잔을 전부 비워 목구멍에 걸린 음식을 넘겨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또 또 음식 앞에 눈이 돌아,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었는걸. 정말 오랜만에 한식다운 한식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느냔 말이야.

    안나가 포크를 그대로 떨구며 풀죽은 사죄 말을 건네는데, 필리프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 공중에 들어 올렸다.

    “죄송할 것 없어.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식욕이 돋는데?”

    아니, 그럴 거면 그냥 잘 먹을 때 내버려 두시지 그러셨나요.

    태연하게 말한 필리프가 정갈한 솜씨로 포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가 음식을 씹는 것을 지켜보던 안나도 조심스럽게 포크를 뻗어 고기를 집었다.

    음식이 사라지는 속도가 빨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접시가 말끔히 비어 있었고, 필리프가 냅킨으로 입을 닦는 것이 보였다.

    “오늘 별궁에 불려갔다는 말을 들었어.”

    “예? 아, 예.”

    필리프가 빈 그릇을 정리하는 안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별일은 없었고?”

    그에게 전부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을 털어놓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게 별일은… 없었는데, 황녀님께서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신 것 같았습니다.”

    “궁금한 것?”

    “예. 사실 제가 앓고 난 이후 그 전 삶에 대한 기억이 조금 희미해졌습니다.”

    안나의 이야기를 듣는 필리프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필리프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안나가 말을 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물으셔서 제대로 답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 그리고 제게 음식을 해달라고 하셔서 간단히 요리를 해 드렸어요. 사실 예전에 다뤄봤는지 확신할 수 없는 재료여서 조금 당황했지만, 생각보다는 괜찮게 요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종알거리던 안나가 주절거리던 입을 스스로 다물었다.

    “황녀가 궁금해하는 건, 또 없었고?”

    “예?”

    “황녀가 궁금해하는 것 중에 네 기억에 남은 것은 없었냐는 소리야.”

    별궁으로 향하기 전 황궁 중앙 정원에 들러 안나를 떠보던 베르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그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녀님께서 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보신 것 같다는 생각이?”

    “어젯밤에…….”

    “어젯밤에?”

    놀리는 것이 확실했다. 입꼬리를 잔뜩 말아 올린 필리프가 의도적으로 안나가 뱉은 말을 반복하며 그녀에게로 점점 상체를 기울였다. 안나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제대로 말을 해야 알아듣지.”

    그의 의도는 확실해 보였다. 안나 스스로 단어를 뱉어 놓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내려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얄미운 입꼬리를 바라보며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키스 말입니다. 키스요!”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칠 생각은 없었는데. 뒤늦게 찾아든 민망함에 얼굴뿐 아니라 온몸 가득 열이 올랐다. 고개를 푹 숙인 안나가 필리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왜 아무 말이 없지? 아무래도 좀 심했나? 그래. 감히 황제의 앞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미쳤어, 미쳤어. 조금 잘해준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이번엔 제대로 빌자. 바닥에 납작 엎드리면 될까?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용서해 주겠지?

    안나가 슬금슬금 엎드릴 바닥을 향해 상체를 낮추는데, 호탕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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