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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23)화 (23/139)
  • 23화

    어떻게 시간이 흐르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지 안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아침이 밝고, 준비를 마치고 주방으로 이동해 평소처럼 식자재를 다듬었다. 아침 준비가 끝나고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도 멍한 정신은 여전히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샤, 놀만, 카라나가 차례로 안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다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은 안나가 고개를 돌리는데, 주방 뒤쪽에 있는 커다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래. 지금 얼굴은 누가 봐도 예쁜 외모이긴 해. 만약 정말 실제의 내 모습이었다면, 그가 어제처럼 입을 맞춰 주었을까? 아니, 어쩌면 아예 관심을 주지 않았을지도 몰라.

    필리프와 입을 맞추던 순간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쾌락을 좇아 그의 입술을 핥던 자신이 모습, 입을 다물지 못하게 뺨을 쓸며 집어삼킬 것처럼 자신을 탐하던 그의 모습.

    그와 함께했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내일은 침실에서 한잔하는 것으로 하지.’

    오늘 밤이다. 그의 침실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만약 또….

    “안나, 주방장님이 부르시잖아.”

    “…….”

    어쩌면 입맞춤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분명 거부하는 여인을 품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럼 거부해야 하나? 아니, 그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아. 그럼 어쩌지? 시간을 좀 달라고 해야 하나? 아, 정말 어떻게 하지?

    “안나? 너 내 말 안 들려?”

    “어? 아, 아니야. 왜?”

    “주방장님이 아까부터 부르시잖아.”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주방 안쪽에 서 있는 카라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 차려, 서안나. 일은 해야 할 것 아니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안나가 머리를 흔들며 기억 속에서 간밤 필리프와의 입맞춤을 털어냈다.

    “예, 주방장님.”

    “그래, 어제 폐하께서 안주를 준비하라 이르셨다고?”

    “예. 저번처럼 준비해서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카라나가 안나에게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드시고 싶다고 말씀하신 요리이니 준비해 보도록 해라.”

    “예, 주방장님.”

    안나가 종이를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카라나가 안나의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갔다.

    응? 왜 저러시지? 이제까지 한 번도 인사를 안 받아 주신 적이 없었는데. 뭐 바쁜 일이 있으신가? 아님, 내가 뭘 잘못한 건가?

    평소보다 조금 쌀쌀한 카라나의 태도에 찜찜한 기분이 들어 카라나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모르겠다. 나중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해 보지 뭐.

    주방 구석으로 이동한 안나가 카라나가 전해준 종이를 펼쳐 보았다. 미색의 종이에 적힌 글자는 짧았다.

    [나를 놀라게 할 만한 음식을 준비해 봐.]

    단정한 글씨체가 그와 참 닮아있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은 정말 내 요리에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는 분명 자신의 요리가 마음에 들어 베르나에게 보내기 싫다고 말했었다. 정말 단지 그 이유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제의 키스는 정말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식 눈가림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몸속에 뜨겁게 흐르던 피가 순식간에 파사삭 식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읽은 종이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안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샤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마샤와 무언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카밀라의 모습이 보였다.

    안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카밀라가 마샤의 귓가에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안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변함없는 적대감이 드러났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어? 어… 아무것도 아냐. 저, 나 이것 좀 창고에 넣어 두고 올게.”

    마샤가 의식적으로 안나의 눈동자를 피하며, 채소가 수북이 쌓인 소쿠리를 집어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안나가 마샤의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마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내가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주변을 살피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던 마샤가 안나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약초 정원으로 와.”

    주방 안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가 고개를 돌려 주방 시종들의 눈치를 살폈다. 안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황급히 눈을 돌렸지만, 흘끔거리는 시선이 등 뒤에 따갑게 와 꽂혔다.

    그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고기 손질을 마친 안나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주방을 벗어났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안나가 내딛는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복도를 지나쳐 약초 정원을 열 걸음 정도 눈앞에 두었을 때, 누군가 불쑥 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색색의 깃털로 장식된 커다란 비단부채에 가려, 제 앞을 가로막은 이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까?”

    비단부채에 가려져 있던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베르나 황녀였다.

    어차피 자신의 의중을 물어오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황녀님.”

    베르나 황녀의 눈짓에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시종 세 명이 안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한 명은 안나의 앞에, 한 명은 안나의 우측에, 나머지 한 명은 안나의 등 뒤에 자리했다. 마치 탈출구를 차단하듯 긴밀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이 의아했다. 어차피 달아날 생각은 없었는데.

    빠르게 발을 움직이던 베르나가 향한 곳은 황궁 중앙 정원이었다. 정원 입구를 보는 순간 필리프와의 입맞춤이 자동으로 연상되어, 안나가 바로 얼굴을 붉혔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이런 상황에서도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다니.

    안나가 아랫입술을 세게 베어 물며 웃음을 삼키는데, 앞서 걷던 베르나가 순간 발을 멈추며 안나를 향해 뒤돌아섰다.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

    “예?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베르나의 시선에서 사나운 붉은 빛이 읽혔다. 안나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등 뒤를 바짝 따라붙은 시종의 가슴에 등이 부딪혔다. 어깨를 잔뜩 굽힌 안나가 코앞에 선 베르나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있잖아.”

    “아… 저, 그냥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아닌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안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베르나의 눈동자가 정원 우측으로 옮겨졌다. 어젯밤 필리프와 나란히 마주 앉아 있던 테이블이 있던 곳이었다.

    “정말 숨기는 거 없어?”

    베르나가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다정하고 부드럽게 물어왔다.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 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없습니다.”

    “…그래? 정말이야?”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황녀님.”

    불안정한 호흡을 삼키는 안나를 잠시 내려다보던 베르나가 다시 등을 돌려 정원 좌측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에 어제 필리프와 앉아 있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끔찍한 사람은.”

    “…….”

    “바로 바보같이 거짓말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이야.”

    안나의 얼굴과 테이블을 번갈아 바라보는 베르나의 눈빛을 읽은 안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 본 것이 틀림없어. 어젯밤 필리프와의 입맞춤을 목격하고, 지금 나를 떠보려 하는 것이야. 그럼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사실을 고해야 하나? 그렇다고 이곳에서 나는 황제와 키스했다, 나는 황제의 여자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모르겠다. 일단은 그냥 버티자.

    “내가 황궁을 떠나기 전에 꼭 먹고 싶은 것이 있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하는 안나의 얼굴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던 베르나가 불시에 화제를 돌렸다.

    “네 음식 솜씨가 좋다고 들었는데, 직접 요리해 줄 수 있겠어?”

    “예? 아, 예, 황녀님. 무, 물론입니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전개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장 잡아 죽일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지 않았었나?

    “자, 그럼 함께 별궁으로 가지.”

    “아, 예.”

    중앙 정원을 가로지른 베르나의 등을 바라보며 걷던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 여자도 감정 변화 폭이 여간 큰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황제와의 입맞춤을 캐묻지 않은 것은 다행이긴 하잖아. 좋게 생각하자, 좋게.

    이 세계에서 생활한 이후 처음 발을 들이게 된 별궁은, 중앙 황궁보다 훨씬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복도 벽면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의 초상화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그림을 감싼 틀은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그야말로 호화로움의 결정체였다. 커다란 왕관 모양의 샹들리에 전체가 크리스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수십 개의 촛불의 빛이 반사되어 올려다보는 눈이 시릴 정도였다.

    “가져와.”

    “예, 황녀님.”

    정신을 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안나가 커다란 홀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려한 가구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공간이었는데,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옆에 자그마한 목조 작업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녀님, 준비되었습니다.”

    “가지고 들어와.”

    커다란 은쟁반을 든 시종 두 명이 홀 안에 들어와 목조 작업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네 언니가 자주 해 주던 음식이었어. 너도 기억하지?”

    “아, 저, 그게…….”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었지?”

    “예, 황녀님.”

    베르나의 눈짓을 읽은 시종이 쟁반 뚜껑을 열었다. 커다란 쟁반에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생소한 채소가 담겨 있었다.

    저게 뭐였더라.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게 쟁반 앞으로 걸어간 안나가 유심히 채소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아티초크!

    한국에서는 재배가 거의 불가능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채소이지만, 유럽에서는 꽤 대중화된 채소 중 하나였다.

    “먹기 좋게 요리해 보도록 해.”

    “아, 예. 황녀님.”

    백화점 마트 코너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아티초크를 조리해 본 적은 없었다. 생소한 재료였지만, 그 식감이 아삭아삭해 감자와 씹는 맛이 흡사하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채소니까 감자처럼 조리하는 건 무리겠지? 삶아야 하나? 대가 좀 질겨 보이긴 하는데.

    고민하며 쉽게 재료에 손을 대지 못하는 안나의 옆으로 주방용 칼을 비롯한 조리도구가 놓이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은 부딪혀 보자. 뭐라도 만들어서 내놓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칼 손잡이를 잡은 안나가 단단한 뿌리 부분을 잘라내고 냄비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베르나의 시선이 거침없이 움직이는 안나의 손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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