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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7)화 (17/139)
  • 17화

    회의실을 나서는 필리프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가벼웠다.

    “폐하. 내일 재정 회의와 관련한 서류는 미리 집무실 책상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교각 설계도면은 황궁에 도착하는 대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필리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집무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회의 시간 내내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려있었다.

    “차를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대고 앉은 필리프가 안나가 뒤돌아서던 순간을 떠올렸다. 식사하는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감각이 간질간질 배를 긁어댔다.

    “폐하. 허브차를 준비하였습니다.”

    “들어와.”

    빠르게 시종을 물린 필리프가 김이 올라오는 찻물에 설탕을 한 수저 넣었다.

    흘러내린 땀이 흥건히 이마를 적시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안나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워 아끼는 손수건을 건네면서 손끝이 스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게 뭐라고.”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필리프가 설탕이 완전히 녹은 찻잔을 들어 찻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쌉쌀한 찻잎과 달콤한 설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안절부절못하던 안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조그만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음식을 씹는 모습, 자신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집중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모습, 자신이 건넨 손수건을 소중히 가슴에 품었던 모습까지.

    그녀가 음식 씹는 소리만으로 고요했던 정원을 가득 채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음식 씹는 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였던가. 그 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상체를 바짝 그녀의 앞으로 기울였었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필리프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등에 스치듯 닿았던 손끝에 열이 오르더니, 해소하지 못한 갈증이 번지듯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뺨과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었다. 그녀를 마주할 때면 느끼곤 했던 ‘재미있다’라는 감정이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을 확신하게 된 것은,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찾아오는 아랫배의 묵직한 간지러움 때문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턱밑을 느리게 문지른 필리프가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단번에 비워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답답한 기분에 창문 커튼을 열어젖혔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 날이 저물기까지 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을 준비했을까.

    그녀가 만든 음식을 함께 먹는 상상을 하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단번에 상승했다.

    “술은 잘 마시지 못했었지.”

    술 한 잔에 기절했던 안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삼킨 필리프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장식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술병을 둘러보았다. 장식장 끝에 자신이 직접 주문한 와인이 보여 그대로 병을 집어 들었다. 당도가 높고, 도수가 세지 않은 와인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어.”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아끼는 크리스털 잔을 쥐려 손을 뻗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수행원의 손에는 필리프가 미리 가져오라 지시했던 교각의 설계도면이 들려 있었다.

    “그래. 이것이 완성본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검토해볼 테니 그만 나가봐.”

    “저, 폐하. 베르나 황녀님께서 저녁 식사 이후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베르나?”

    설계도면을 살피던 필리프가 짜증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제의 미간을 바라본 수행원이 바로 입을 열었다.

    “중요하게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광산 채굴권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 광산 채굴권이라.

    잇새로 비웃음을 뱉은 필리프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그의 팔에 포악한 힘줄이 도드라졌다. 황제가 격분한 모습에 움찔한 수행원이 움찔거리며 뒤로 몸을 물렸다.

    “알겠다고 전해.”

    “예, 폐하.”

    미간을 강하게 구긴 필리프가 설계도면을 뒤적거렸다. 거친 손놀림에서 그의 심경이 드러났다.

    “짐 마차 수십 대의 하중을 한 번에 견뎌 낼 정도의 교각을 만들라 지시했던 것 같은데.”

    빠르게 도면을 읽은 필리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시절부터 건물과 교량 건설에 관심이 있던 그의 눈에 설계의 문제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설계자가 직접 황궁을 찾아 설명해 드리겠다고…….”

    “다시 제대로 해 오라고 해. 어쭙잖은 실력으로 황궁의 돈은 받아먹을 생각은 접는 것이 좋을 거야.”

    필리프가 설계도면을 내던졌다. 바닥에 나뒹굴기 직전 도면을 받아든 수행원이 황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상쾌했던 기분이 한순간에 저조하게 가라앉았다. 현 제국의 재정 상태를 생각할 때 광산 채굴권을 가져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혼인의 대가로 나를 흔들어 보겠다?

    베르나의 속내를 읽은 필리프가 창가에 다가가 섰다. 꿍꿍이를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함이니, 황녀와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는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내내 기다렸던 안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와인 병을 잡아 잔에 따른 필리프가 단숨에 술잔을 비워내며 분노를 삼켰다.

    * * *

    도자기 접시에 묻은 소스 자국을 깨끗한 천으로 말끔히 닦아낸 안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직접 만든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카프레제 샐러드와 트러플 소스로 조리한 감자볶음, 그리고 한국식 조리법을 활용한 찹 스테이크. 이것으로 안주 준비는 완료! 와인과 맥주 안주라면 위스키 안주보다는 훨씬 자신 있으니,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거야.

    “수고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해.”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주방장님.”

    왜 직접 음식을 가져오라고 말하지 않은 거지? 설마 아까 그의 앞에서 실수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의 표정에는 분명 부드러운 미소가 스며 있었는데.

    그를 마주할 때면 고장 난 것처럼 날뛰는 심장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오늘은 그의 앞에서 더는 멍청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맥이 빠졌다.

    주방 한쪽 구석에 놓인 손거울을 몰래 가져와 음식을 준비하는 내내 슬쩍슬쩍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아마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와 단둘이 있게 되는 순간을.

    “아직 안 가고 뭐 해? 내일은 평소보다 일찍 아침상을 준비해야 하니, 어서 올라가서 쉬도록 해.”

    “예? 아,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카라나에게 등이 떠밀려 주방을 나선 안나가 깊은 한숨을 뱉으며 발을 움직였다. 복도 귀퉁이에 잠시 멈춰선 그녀가 커다란 액자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액자에 비친 얼굴에서 실망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안나가 손을 들어 입술에 묻힌 붉은 장미꽃 진액을 벅벅 닦아냈다. 장미 꽃잎을 빻아 만든 액을 입술에 바르며 설레하던 제 모습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게 다 뭔 소용이야. 그래. 그냥 눈요깃거리로만 생각하자.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괜히 마음을 줘 봤자지.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저 영화에서나 존재할 뿐인걸.

    텅 비어 있는 복도를 느릿하게 지나쳐 숙소로 향하는 귀퉁이를 지나려는데, 복도 끝에 새까만 그림자가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조금 좁혀지니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 단정한 입매. 평소 안나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몹시 남자답고 잘생긴 외모의 사내였다.

    뭐야, 이 시대 남자들은 죄다 이렇게 잘생겼나? 약간 오십 년대 할리우드 배우 같은 느낌이잖아?

    짧게 남자의 얼굴을 구경하듯 바라본 안나가 그대로 그를 지나치려는데, 순간적으로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읍!”

    커다란 손바닥이 비명을 내지르려는 안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봐도 단단한 품 안에 가두어진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건가? 역시 수상한 사람을 보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어. 얼굴에 정신이 팔려 스스로 명을 재촉한 거야.

    두 눈을 질끈 감은 안나가 몸의 움직임을 멈추니, 그녀의 입가를 덮은 남자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상대를 안심시키고 빈틈을 노리자. 빠르게 상체를 돌리고 힘차게 중심을 걷어차는 거야. 안나가 머릿속으로 언젠가 유튜브에서 시청한 적이 있었던 호신술을 떠올렸다.

    “몸은 괜찮아졌습니까.”

    귓가에 내려앉는 솜사탕같이 포근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케이든 아들레드.

    “…케이든 아들레드…….”

    안나가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중얼거리자 그가 부드럽게 안나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더 일찍 당신을 찾고 싶었지만, 기사단 해산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저기…….”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눈동자에서 절절한 그리움의 감정이 드러났다. 아니,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데 이토록 로맨틱한 말을 뱉어내는 거지? 설마 사귀던 사람이 있었던 건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내일 밤 우리가 늘 만나던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남자가 안나의 허리를 휘감은 손에 힘을 풀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이 당혹스러워 멍한 눈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이마에 따뜻하고 폭신한 것이 닿았다.

    “헉!”

    안나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내린 남자가 빠르게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하게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전개는? 진짜 저 남자와 연인 사이였던 건가? 기사단 해산 어쩌고 한 것을 보면 기사라는 소리인데, 당시 기사와 황궁 시종 간의 연애가 가능했었나? 가만, 저 남자가 내일 밤 우리가 늘 만나던 곳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아니, 나는 우리가 늘 만나던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요.

    답답해서 그대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보려 해 봐도 머릿속은 점점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차라리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환영이 떠오르기를 바랐지만, 뜨거워지기는커녕 머릿속은 점점 차게 식어갈 뿐이었다.

    그래. 지금 당장 의지할 것이라곤 하나뿐이야.

    남자의 입술이 머물렀던 이마를 느리게 만지작거린 안나가 급히 모퉁이를 돌아 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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