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8)화 (18/139)
  • 18화

    황제의 수행원에게 알현 요청을 전한 베르나가 등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평소 갑작스러운 알현 요청을 거의 승낙하지 않는 황제였지만, 타론 대공이 혼인의 대가로 제공하기로 한 광산 채굴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요청을 쉽게 거절하긴 어려웠을 터였다.

    베르나의 입꼬리가 진하게 말려 올라갔다.

    “들어오십시오, 황녀님.”

    베르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수행원이 문 옆으로 물러섰다. 드레스 옆 단을 살짝 잡아 쥔 베르나가 필리프의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식기가 세팅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이쪽에 앉지.”

    “예, 폐하.”

    필리프가 테이블 맞은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불편한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동요하지 않은 베르나가 미소를 머금으며 의자에 앉았다. 쌀쌀맞은 얼굴에 뻔뻔한 웃음으로 응수하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광산 채굴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예. 뒤늦게 서신을 확인하여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폐하를 찾았습니다. 빠르게 말씀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야기해 봐.”

    필리프가 살짝 틀어져 있던 몸을 바르게 펴며 베르나와 눈을 맞추었다. 타론 대공은 공작령에 뻗어있는 광산 채굴권을 조건 없이 카마르 제국에 넘겨줄 것을 약속해왔다. 이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베르나였지만, 저 스스로 황제께 알리겠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발표를 미뤄두었었다.

    “타론 대공께서 광산 채굴권을 양보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

    “어차피 우리 제국령에서 시작된 광산이니, 묵혀 두고 썩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라 입김을 좀 넣었습니다.”

    베르나가 은근슬쩍 자신이 관여했음을 알렸다. 어느새 타론 대공을 제 구미에 맞게 길들인 모양이군. 무심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베르나의 말을 듣던 필리프가 손짓으로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을 불렀다.

    “준비된 것을 가져와.”

    “예, 폐하.”

    베르나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이 가진 패를 내보일 인물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필리프였다. 겉도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길게 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가볍게 술을 한잔하려던 참이었어. 함께 들지.”

    시종 두 명에 손에 들린 은쟁반에는 도자기 식기와 와인, 맥주가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식기가 테이블에 놓이고, 필리프가 베르나 쪽으로 와인 잔 하나를 밀어주었다.

    “조용히 즐길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광산 채굴권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시간의 방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겠지.”

    입에 발린 말 한마디를 뱉지 않는군. 일그러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단속한 베르나가 테이블에 놓인 요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평소 자주 접했던 음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요리를 보는 순간 카밀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황제 폐하께서 안나 스완의 요리에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느릿하게 포크를 들어 올리며 음식을 맛보는 필리프의 표정을 살폈다. 천천히 음식을 씹는 그의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스르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에 강하게 힘을 주는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본 베르나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거, 점점 재밌어지는데? 필리프를 따라 차례로 음식을 맛본 베르나가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가볍고 산뜻한 것이, 늦은 시간에 먹기에는 적격인 것 같습니다.”

    베르나의 말에 동의하듯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잔을 비운 그가 맥주가 채워진 잔으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대가는?”

    “예?”

    “내게 광산 채굴권을 순순히 넘겨주는 것에 대한 대가 말이야.”

    흥, 나름 오래 참았군. 속으로 코웃음 친 베르나가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대가라니요. 제가 드리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 그럼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푼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어?”

    테이블에서 살짝 몸을 물린 필리프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입꼬리 한쪽을 쓱 말아 올리며 웃은 베르나가 맥주잔을 들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제국을 떠나며 드리는 선물이라 생각해주십시오. 조국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랄까요?”

    잠시 베르나의 얼굴과 공중에 들린 잔을 번갈아 바라보던 필리프가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공중에서 두 개의 유리잔이 가볍게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맥주 한 모금을 머금은 베르나가 음식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보다 이르게 광산 채굴권 카드를 꺼내 놓은 것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레스 때문에 음식을 조절하던 중이었는데, 도저히 참기 힘든 맛입니다.”

    베르나가 토마토와 치즈, 새콤한 소스가 어우러진 접시로 포크를 가져가며 말했다. 희미하게 감격이 스민듯한 말투였다.

    “카라나의 솜씨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새로운 요리사를 들이셨습니까?”

    짧게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시종에게 빈 잔을 채우라 지시했다.

    “황궁 주방에 있는 요리사가 카라나 한 명이 아닌 줄은 알고 있을 텐데.”

    “흠. 특출난 주방 시종들의 요리는 제가 거의 맛을 보았지만, 이런 느낌을 내는 음식은 처음이라서요.”

    “…….”

    “제국을 떠나게 되면 그리워할 만한 맛이군요.”

    슬슬 본론을 꺼내 놓을 타이밍이었다. 미세한 목소리 톤의 변화를 감지한 필리프가 고개를 들어 베르나와 눈을 마주했다.

    “음식을 만든 이를 불러주시겠습니까. 제가 따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포크를 쥔 그의 손에 하얗게 힘이 실리는 것이 보였다. 베르나가 입술 안쪽 연한 살을 베어 물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을 참아냈다.

    어라? 이 정도의 표정 변화를 내비친다고? 천하의 필리프 마티어스께서?

    “조리법을 배워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과연 누가 이 음식을 만들었을지.”

    “이제 상을 치우도록 해.”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등 뒤 시종을 바라보며 차갑게 끊어 말했다.

    “안 그래도 음식 시종 한 명을 더 데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황궁에 너무 길들어진 입맛이라 그리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아서요.”

    고개를 든 필리프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던 서늘한 얼굴에서 지글거리는 분노가 드러났다. 감정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후회하듯, 그가 숨을 짧게 내쉬면서 고개를 돌렸다. 베르나가 말을 이었다.

    “설마 제게 미천한 음식 시종 하나 내어주시는 것에 인색하게 굴지는 않으시겠지요?”

    “…….”

    “저는 제국에 아주 커다란 선물을 내어 드렸는데 말이죠.”

    미묘한 호선을 그리듯 솟아올랐던 필리프의 입꼬리가 거칠게 비틀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의 승리를 만끽하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베르나가, 무표정한 필리프의 시선을 맞받았다.

    * * *

    태어났을 때부터 빛이 보이지 않는 삶이었다. 하루만 더 지나면, 그래 이틀만 더 버티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안나가 내내 품고 있던 희망의 끝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삶은 지독한 암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후였다.

    ‘안나야. 너 괜찮아?’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한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감흥 없는 목소리로 물으셨다.

    ‘네, 괜찮아요.’

    어떤 것이 좋은 답일까를 수없이 고민해 보았지만, 내뱉을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잠시 안쓰러운 표정으로 안나를 내려다보던 선생님은 충분히 예상했던 답을 뱉어냈다.

    ‘그래. 선생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고. 알았지?’

    아마 어린 시절부터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벗어나려 해 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너 정말 괜찮아?’

    한식당에서 일하며 선배의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렸던 시절, 함께 일하던 동료가 안나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었다.

    ‘응. 괜찮아.’

    이번에도 안나는 같은 답을 뱉었다. 어느 순간 삶에 순응해 버렸던 것 같다. 그저 꾸역꾸역 버텨보자 생각하니,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숨을 쉬는 것이 조금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미련 없이 회피했고, 그래도 해 볼 만하고 생각되는 일은 불만 없이 해내기를 반복했다.

    한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같은 삶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빛을 본 것으로 만족했을 뿐, 더 나아지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넌 참 천하 태평한 것 같아. 내가 너였다면 난 너처럼은 절대 못 살았을 거야.’

    ‘…응.’

    진실되게 마음을 나눌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누군가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안나의 삶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른 사람들과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볼품없는 삶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넌 꿈 같은 건 없어? 한식당에서 나름 그리 오래 버텼으면, 앞으로 계획이란 게 있을 거 아냐.’

    ‘꿈?’

    ‘그래. 뭐 조리사가 된다던가, 아니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 본다던가.’

    ‘글쎄…….’

    우유부단함으로 포장된 삶에 대한 회피는,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헤어지자.’

    ‘…그래.’

    낙천적이고 유쾌한 안나의 성격에 이끌려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단단하게 닫혀 절대 풀리지 않는 안나의 마음속 빗장을 발견하고 어느 순간 지쳐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평생 함께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없었기에 슬프지 않았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겨웠던 삶이었기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제대로 꿈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슴 속에 꼭꼭 파묻은 깊은 어둠과 그늘을 감추기 위해 애써 환한 표정을 짓고 과장된 웃음을 뱉었다.

    그런데 왜 그의 앞에서는 감추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고 싶은 것일까.

    안나가 필리프가 제게 건넨 손수건을 얼굴에 묻으며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