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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16)화 (16/139)
  • 16화 

    안나에게서 바로 등을 돌려 걷던 필리프가 불시에 걸음을 멈춰 섰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안나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폐하. 작위 수여식 일정이 나왔습니다. 내일 오전 라이만 남작이 방문하기로 되어있으니, 오전 회의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폐하?”

    수행원이 그 자리에 멈춰서 일체의 미동도 하지 않는 필리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향한 곳에 누추한 모습을 한 예쁘장한 시종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점심은 밖에서 먹고 싶은데.”

    “예? 아, 그럼 중앙 정원에 식사를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필리프가 가벼운 걸음으로 안나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그림자가 완전히 덮쳐 올 때까지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바쁘던 안나가 확실한 인기척을 느끼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헉.”

    많이 놀란 것인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그녀가 황급히 입가를 가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내 욕이라도 한 건가?”

    “예? 아, 아닙니다. 무, 무슨 제가 요, 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급히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 말을 뱉은 안나가 온몸을 파닥거렸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안나를 내려다보던 필리프의 입꼬리가 다시 미세하게 솟아올랐다.

    “…저, 정말 아닙니다, 폐하.”

    “뭐가 아니라는 거지?”

    “저, 절대 폐하의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안나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두 손을 움켜쥐었다. 힘이 가득 실린 그녀의 하얀 손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이 부피를 키웠다. 안나가 제대로 숨도 내쉬지 못하고 그만 물러가라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설마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들은 건 아니겠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욕은 아니었는데. 그저 작은 불만 사항 몇 가지 구시렁거렸다고 화가 난 건가?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점심을 먹을 시간인데.”

    침묵을 깨고 그가 뱉은 목소리는 태연했다. 안나가 살금살금 고개를 들어 필리프의 눈을 마주했다. 비스듬한 시선으로 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크게 깜빡거리는 기다란 속눈썹, 그 아래 살짝 물기를 머금은 커다란 눈동자, 코끝이 작고 동그란 코, 새빨간 입술을 느릿하게 훑은 필리프의 시선이 안나의 하얀 목덜미로 옮겨졌다.

    그저 시선만이 닿았을 뿐인데, 그의 눈동자가 닿는 곳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겁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안나가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에 몸을 움츠리며 필리프의 시선을 피하는데,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황궁 오른쪽을 가리켰다.

    “아, 약초 정원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했지?”

    “예? 아, 예.”

    “같이 가지. 나도 마침 그곳에 가려던 참이었거든.”

    에? 그곳에 가려던 참이었다고? 아니, 좀 전에 분명 별궁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는데.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보폭이 넓은 필리프의 일행이 시야에서 멀찌감치 앞서 나갔다.

    부랴부랴 발을 움직여 황제 일행의 꽁무니를 따라붙은 안나가 필리프의 널찍한 등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약초 정원엔 무슨 일이지? 산책하려면 중앙 정원이나 황궁 밖 정원이 훨씬 나을 텐데. 혹시 약초가 필요한가? 아니, 필요하다면 따 오라고 명령하면 그만이잖아. 굳이 직접 갈 필요가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약초 정원 입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필리프와 그의 시종들이 먼저 정원 안으로 들어섰고, 안나가 눈치를 살피며 주변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뭐 해? 할 일이 있는 것 아니었나?”

    자신에게서 관심이 멀어진 틈을 타 잽싸게 로즈메리를 꺾어 돌아가려고 했는데, 필리프가 불쑥 안나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예? 아, 예. 저, 저는 그럼 이, 일하겠습니다.”

    어찌 된 것이 이 남자 앞에서는 이렇게 백치 아다다 같은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일까? 바보 같은 모습만 보이는 것이 속상해 어깨를 푹 수그리며 정원 좌측 끝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약초를 뽑아 손에 쥔 안나가 정원을 나서려는데, 정원 밖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음식이 차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 밖에서 점심을 먹는다는 소리였구나. 그래. 매일 안에서 먹으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필리프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필리프를 향해 곱게 인사를 하고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데, 그는 나가보라는 말 대신, 자신이 앉은 의자 반대편을 가리켰다.

    “앉아.”

    “…예?”

    제가 왜, 라는 말이 목구멍 안쪽까지 치밀었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얌전하게 그가 지정해 준 자리에 앉은 안나가 테이블 위 음식을 살폈다.

    평소 황제의 테이블에 오르는 음식에 비해 간소한 식사상이었다. 두 종류의 고기와 곡물 스튜, 샐러드와 흰 빵 그리고 산딸기 잼.

    “원래 점심은 건너뛸 생각이었는데.”

    우아한 동작으로 고기를 잘라낸 그가 커다란 고깃덩이 한점을 입에 넣었다. 포크를 움직이는 솜씨가 정갈하고 기품있었다.

    정신을 놓고 그가 음식을 씹어 넘기는 모습을 감상했다. 고기를 완전히 씹어 넘기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그가 들고 있던 포크로 안나의 테이블 앞을 가리켰다.

    “안 먹을 건가?”

    “예? 저도 함께요?”

    “어차피 나 혼자서는 전부 먹지 못할 양이니까.”

    곤란한 표정을 지은 안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은 적이 있지만, 그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황제의 은밀한 공간이었다. 약초 정원은 황궁 시종들의 출입도 허락된 곳이니만큼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배가 고프지 않은 거야?”

    “예?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태연자약한 그의 태도를 보니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하긴. 그를 보좌하는 시종이 몇인데, 알아서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했겠지.

    불안감을 지워낸 안나가 제 앞에 놓인 포크를 잡았다.

    “고기는 네가 구운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한번 크게 고기를 자른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잡았던 포크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은 안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 예. 오늘 저는 샐러드를 준비했습니다.”

    필리프가 고기를 집었던 포크를 놓고 샐러드용 포크를 잡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샐러드 접시로 손을 뻗었다. 포크를 입으로 가려가려던 그가 어서 먹으라는 듯 안나를 향해 눈짓해 보였다.

    빠르게 눈앞에 보이는 빵 한 조각을 집어 접시에 올려놓은 안나가 대충 빵을 잘라 커다란 빵 조각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부지런히 이를 움직여 씹었지만, 그가 앞에 있어서인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빵을 씹는지 돌을 씹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으로 열심히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데 고기 접시가 눈앞에 바짝 들이 밀어졌다.

    나 먹으라는 말인가? 안나가 슬쩍 필리프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찻물을 들이켤 뿐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든 안나가 고기 접시로 포크를 내밀었다.

    “먹을 만해?”

    “에?”

    갑자기 물어온 질문에 당황해 고개를 들었더니 바로 정면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마치 자신이 만든 음식 맛을 물어보는 것 같은 태도잖아.

    “아, 예. 맛있습니다.”

    “그럼 다 먹고 가. 나는 충분히 먹었으니.”

    필리프가 테이블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저…….”

    식사를 마친 그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설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유로운 태도로 다리를 꼰 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안나가 먹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움을 견디다 못한 안나가 난처한 기색을 표했지만, 그는 작은 미동 하나 하지 않았다.

    “어서 먹지. 음식이 많이 남았는데.”

    “아, 저… 그게 폐하. 저도 충분히 먹었습니다.”

    “맛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음식 접시를 깨끗이 비울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항의가 통하지 않을 상대에게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안나가 고개를 숙이고 전투적인 자세로 포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수리에 따가운 시선이 와 닿아 체할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빨리 음식을 먹어치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만. 그렇게 빨리 먹으면 안 되지.”

    커다란 그의 손바닥이 포크를 잡은 안나의 손을 덮어 잡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먹고 있던 접시로 시선을 떨어뜨린 안나의 시선에, 정갈한 그의 손등이 잡혔다. 아무래도 너무 급히 음식을 먹은 것인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

    그의 손이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본래의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는 지금 이 테이블의 음식보다 훨씬 먹을 만한 음식을 기대해 봐도 되겠지?”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누구든 홀릴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안나는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 너머에서 불어온 따뜻한 여름 바람이 필리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짝 흩뜨려 놓았다. 그가 자신의 손등에 내려앉았던 손으로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바보처럼, 안나는 저 손이 다시 한번 제 손에 닿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나가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입을 벌렸지만, 숨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깨어 문 안나가 숨을 멈추고 바삐 뛰는 심장 박동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 그럼 저는.”

    “그래.”

    안나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원하던 그의 손길이 다시 손목 위에 내려앉았다.

    “…….”

    너무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푸른 손수건 한 장을 쥐여 주었다.

    “땀을 너무 흘리는 것 같아서.”

    이대로 있다가는 그대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전해 준 손수건을 보물처럼 가슴에 품은 안나가 도망치듯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가 웃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가 제 손에 쥐여 준 손수건을 뺨에 가져다 댄 안나가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조금씩 정원에서 멀어지면서 잔뜩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지만, 가슴의 떨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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