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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90화 (90/93)
  • <90화>

    붉은 경고등이 번쩍거리며 간헐적으로 그들의 머리 위를 비추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배가 가라앉는다고? 정말 진심인가?

    하지만 지금은 농담이 어울리는 때가 아니었다. 농담을 즐겨 할 사람들이 모인 곳은 더더욱 아니었고.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냅다 소리를 쳤다.

    “다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인가요? 내가 꺼내 줄게요. 바다를 헤엄쳐 가든지, 아니면 구명보트를 빼앗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해요. 물론 실패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건 무엇에도 비할 바 없이 멍청한 짓이에요. 내가 장담할 수 있어요. 내가 그 증거예요.”

    “무슨 증거?”

    “만약 내가 겁쟁이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벌써 몇 년 전에 죽어 땅 속에 파묻혔겠죠. 내가 죽도록 맞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맞았어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그는 정말 내가 죽기를 원했어요.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가두고 방치했죠.

    하지만 난 살아남았어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어요. 다음 날이 되면 또 맞게 된다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어요. 결국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나뿐이었죠. 난 그때 알았어요. 절대 내 목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걸요.”

    나는 자일스가 건네준 권총으로 철창의 자물쇠를 겨누었다.

    “포기할 거예요, 아니면 마지막 시도라도 해 볼 거예요?”

    “그 문을 부순다고 해도, 우린 두 손이 자유롭지도 않은데 어떻게 선원들을 상대한단 말이오?”

    “숫자로 밀어붙이면 되죠.”

    “무모한 사람이군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거든요.”

    탕! 총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박살났다. 반동에 의해 내 몸이 뒤쪽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다시 일어나 반대쪽의 자물쇠를 부수었다.

    이제 그들은 자유였다. 사람들은 확신이 부족한 걸음걸이로 철창 안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한 번 더 소리쳤다.

    “배가 곧 있으면 기울지도 몰라요! 구명보트를 빼앗기면 우리 다 죽는 거예요. 명심해요, 먼저 빼앗는 사람만 살 수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의지를 얻은 것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찬 사람들은 그나마 자유로운 발로 복도를 달려 나갔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서 한 손에는 권총을 든 채로 바깥으로 나갔다.

    선원들이 구명보트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진영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뒤늦게 권총을 꺼내 든 이조차 몸으로 밀어붙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할 길은 없었다.

    나는 자일스부터 찾아야 했다. 혼란한 갑판 위에서 그를 찾으려 고개를 빼 봤지만 그를 닮은 실루엣조차 찾기가 힘들었다.

    “자일스!”

    내가 외치는 순간이었다.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내가 밟고 있던 지면이 급하게 기울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바닥 위를 굴렀다.

    손끝에 힘을 주고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던 나는 문득 내가 총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봤지만 내가 놓친 권총은 어딘가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들, 죄수들에게 밀려서 바다 위로 추락하는 선원들 등 아수라장이 된 배 위에서 나는 어떻게든 그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일어나려고 시도하다가 몇 번 정도를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종이로 만든 다리를 가진 기분이었다. 겨우 일어난 나는 무작정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헤맸다.

    “자일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내 귓가에 들려왔다.

    “안나!”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사람들 사이로 그의 얼굴을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자일스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손을 뻗으며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러던 찰나 내 몸이 허공으로 뜨는 것이 느껴졌다. 배가 주체할 수 없이 기우뚱대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내 앞에 서 있던 사람 몇 명이 내 쪽으로 추락하며 나를 바닥으로 떠밀었다.

    비명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나는 갑판 위를 정신없이 구르다가 차가운 쇳덩이에 그대로 머리를 부딪혔다.

    눈앞이 암전으로 뒤덮였다.

    안나.

    제발 눈 좀 떠 봐, 안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안개가 점점 걷혀 갔다. 나를 향해 애원하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냈을 즈음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노을빛으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주변이 벌써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자일스가 나를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툭 튀어나온 구조물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배의 절반이 새카만 바닷물에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가 손을 놓치는 순간 우리 모두 갑판 위를 미끄러져 바다에 빠지고 말 것이다.

    번쩍 눈을 뜬 내가 물었다.

    “자일스, 괜찮아?”

    “난 무사해. 너는? 날 붙잡을 수 있겠어?”

    “나는…….”

    그 순간 나는 내가 처음 보는 조끼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건 구명조끼였다.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자일스가 내게 입혀 준 것일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토록 어지러웠던 갑판 위에는 이제 오직 나와 자일스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지 않은 사람들은 전부 빠져나갔어. 이제 남은 구명보트는 없어. 이 배를 빠져나가는 법은 이제 헤엄치는 방법뿐이야.”

    “나 때문에 보트를 타지 못한 거야?”

    그게 정말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자일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람에 비해 보트 숫자가 부족했어. 다들 서로 타려고 난리였지. 꼭 너 때문에 타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미안해, 자일스. 너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니야, 안나. 너는 잘했어. 스스로 탓할 필요 없어.”

    이제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였다.

    주변은 깊은 바다였고, 우리는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치 이 배가 우리의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일스는 안나를 한 팔로 껴안고 생각했다. 구명보트 없이 어떻게 이 배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안나가 헤엄을 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다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으니까.

    설령 헤엄을 칠 줄 안다고 쳐도, 안나의 몸은 너무나도 약해진 상태였다.

    다른 방법이 절실했다.

    그나마 희소식이 있다면 안나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는 거였다. 자일스는 그녀가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바랐다.

    “신호를 보내야 해.”

    그가 말했다.

    “누군가 이 배를 발견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벨담 군인들이 찾아올 수도 있어.”

    “우선은 배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나머지는 그 후의 일이야. 한 번 도망쳤는데 두 번은 못 도망치겠어? 안나.”

    달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에게는 손해였다. 기온이 점점 떨어질 것이고, 안나가 걸친 건 얇은 천으로 만든 옷과 구명조끼가 전부였다.

    “안나, 이걸 붙잡고 있을 수 있겠어?”

    “설마 어딜 가려는 건 아니지?”

    “뭐라도 찾아야 해. 선실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럼 넌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선택권이 없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

    그는 안나의 손을 이끌어 스스로가 잡고 있던 구조물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안나는 두려워 보였다. 혹여나 그가 저 검은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안나, 잘 잡고 있어.”

    “자일스…….”

    “난 괜찮을 거야. 금방 돌아올게, 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자일스는 안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웃음을 띠어 보인 후 천천히 그녀를 놓았다. 순식간에 그의 몸이 갑판 위를 미끄러져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아무리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늦은 시간의 바다는 아직도 얼음장 같았다. 자일스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바닷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내려앉은 어둠 탓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그는 벽을 더듬어 겨우 선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각종 가구와 물건들이 물에 잠긴 선실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자일스는 미약하게 비쳐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그가 찾는 물건을 필사적으로 구별해 내려 애썼다.

    어딘가엔 있을 텐데.

    곧 버릴 배였다지만 그것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일스는 곧 숨이 차오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제발…….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기도했다.

    이대로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아무 소득조차 없이 올라갈 수도 없었다.

    내가 그걸 찾을 수만 있다면.

    익숙한 형체가 눈에 띄었다. 자일스는 곧장 팔을 뻗어 그가 찾던 물건을 잡으려 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물속에서도 더욱 눈을 부릅뜨며 새빨간 색을 입힌 비상용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그의 손에 신호탄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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