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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91화 (91/93)

<91화>

얼마 동안 물속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배는 이 와중에도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옆으로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안나는 하필이면 구조물에서 손을 놓칠 뻔했다.

그녀는 자일스가 사라진 쪽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체감상 몇 분은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왜 그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

그때 자일스가 흠뻑 젖은 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안나의 입가에 순간적인 안도가 서렸다.

자일스는 한 손에 신호탄 발사기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갑판 위를 기어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물에 젖었기 때문인지 그는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해가 없는 바다 한가운데는 몹시 추웠다. 특히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온 이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스스로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갑판 위로 올라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상관은 없었다. 신호탄을 발사하기만 하면 누군가 그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니까.

“자일스! 괜찮아?”

안나가 소리쳐 물어 왔다.

“난 괜찮아!”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대답이 그다지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추위 때문에 목소리 끝이 떨렸다.

“내려오지 마, 안나! 조금만 더 붙들고 있어! 내가 신호탄을 발사할 테니까 누군가 올 때까지 그걸 붙잡고 있어야만 해!”

그는 권총과 비슷하게 생긴 발사기를 붙들고 하늘을 향해 조준했다. 제발 제대로 작동해야 할 텐데. 이것마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 모두는 끝이었다.

자일스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나만큼은 꼭 살려 보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니까. 안나는 살기 위해 모진 고문들을 받아 내고, 견뎌 냈다.

여기서 허무하게 끝을 내게 할 순 없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새빨간 조명탄이 밤하늘을 비추며 천천히 포물선을 그렸다. 자일스는 스스로가 발사한 조명탄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운에 기대는 수밖엔 없었다.

누군가 그가 쏘아 올린 신호를 발견했다면 그들은 살 수 있을 것이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만 할 것이다.

*

아르나톨의 군인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어두운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 헬리콥터에 설치된 조명이 바다 위를 끊임없이 탐색 중이었다.

그들이 야간 임무에 나선 건 영해를 침범한 선박이 있는지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가끔씩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외국 어선들이 허락 없이 영해 위를 누비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이들을 잡는 것이 정찰 임무를 나선 군인들의 역할이었다. 그들이 하늘 위를 날며 침입자들을 발견하면 해경 선박에게 전파 연락이 가는 구조였다.

한마디로 말해 그다지 심각한 임무는 아니었다. 상대는 보통 민간인들이었고, 조금만 겁을 주면 알아서 물러나고는 했으니까.

그런 이유에서 헬리콥터 뒷좌석에 탄 군인들은 저들끼리 시답잖은 이야기나 주고받으며 낄낄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녀석에게 마리나라 소스를 건네줬지.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자기가 찾는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거야. 마리나라보다는 조금 더 달면서도 적당히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좋으면서도…….”

“미친놈, 가지가지 하네.”

“그래서 난 냅다 그놈 접시 위에 케찹을 뿌렸어. 그랬더니 녀석 반응이 압권이었다니까. 마치 신성 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씨, 조용히 좀 해, 줄리아! 너 때문에 교신하는 데에 방해가 되잖아!”

“교신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화풀이하지 마. 그냥 우리는 바다 구경이나 하면서 돌아가면 되는 거라고. 밑에 아무도 없잖아, 봐.”

“그래도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닥쳐. 하루라도 조용히 돌아가는 날이 없어, 정말이지.”

“야, 저거 봐 봐.”

함께 낄낄대던 마리아가 그들의 주의를 끌려 했으나 나머지 군인들은 입씨름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불만 있으면 다른 팀으로 옮겨 달라고 하든가, 알아서 하세요. 왜 그리 맘에 안 드는 게 많아? 마치 벨담 놈들처럼 말이야.”

“뭐라고 했냐?”

“그러고 보니까 벨담에 주둔해 있었을 때가 기억나네. 내가 그놈들 땅을 밟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미친놈들아! 그만 좀 떠들고 저것 좀 보라고!”

그제야 나머지 동료들의 시선이 마리아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저건 분명히 신호탄이었다. 붉은 빛을 내는 탄환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무슨…….”

“배가 침몰하기 시작한 거야. 분명해. 저쪽으로 접근해 봐야겠어.”

알레사는 조종간을 잡고 조명탄을 쏘아 올린 방향으로 헬리콥터의 방향을 틀었다. 새하얀 조명이 바다 위를 이리저리 탐지하기 바빴다.

머지않아 그들은 반 이상 가라앉은 선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여자가 선박에 매달린 채 헬리콥터 쪽으로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모터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내 쪽을 비추고 있었다. 저건 헬리콥터였다. 확실했다.

누군가 나를 구조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미친 듯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예요! 여기라고요!”

혹시 저것이 벨담에서 날려 보낸 헬리콥터는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이대로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자일스의 말대로, 두 번 도망치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헬리콥터가 우리 쪽으로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 안에는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이 입은 군복이 벨담군의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안심하고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군인이 외쳐 물었다.

“여객선이 침몰한 겁니까?”

“벨담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했어요!”

나는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추위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수송선을 보냈는데…… 사실은 침몰시키려고 다 계획하고 있던 거였어요! 저희는 구명보트가 없어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거고요!”

나는 말하면서도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것보다는 훨씬 더 잘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군인들은 나의 거지 같은 설명을 듣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벨담 사람입니까?”

“아니에요, 저는…… 저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벨담의 혈통을 이은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벨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벨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은 안나 키팅이에요.”

그게 내 정체성이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이름밖엔 없었다. 벨담의 백작 영애도, 자일스 헤센의 사랑을 받은 불운한 여성도 아닌…… 피아니스트, 안나 키팅.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군인들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반문했다.

“안나 키팅?”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들은 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피아니스트 말입니까?”

아. 그랬지.

그제야 나는 내가 글뤼비흐네 잡지사를 지원해 외국에 내 이야기를 알렸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냈다. 저들이 어디에서 왔을지는 모르나, 아마 내 이야기를 읽어 본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

“맞아요. 그 사람이 나예요. 내가 그 피아니스트예요.”

“올라올 수 있겠어요?”

헬리콥터가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왔다. 군인은 내게 손을 뻗어 왔으나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구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저 밑에 있었다.

내가 자일스 쪽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저기 저 사람도 데려가야 해요. 함께 태워 줄 수 있나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헬리콥터로 접근하기에는 너무 낮은 곳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올라오셔야만 태워 드릴 수 있습니다.”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자일스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일스는 스스로가 구조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자일스, 올라와! 같이 헬리콥터에 타야 해!”

“먼저 가, 안나.”

“뭐?”

자일스는 내게 손짓을 해 보였다.

“나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너는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이잖아. 구조가 급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나는 걱정하지 말고 스스로를 먼저 챙겨.”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거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자일스에게 화가 났다. 내가 그를 두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화가 났고, 자일스가 스스로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에 화가 났다.

“아무리 너라도 여기서 오래 버틸 수는 없어! 배가 가라앉고 있단 말이야! 몇 분 안에 바닷속으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안나, 나는 괜찮아.”

“…….”

이제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가 너무도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어서 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을 거야, 안나. 그러니까 가. 너무 늦기 전에.”

“하지만 내가 먼저 가 버리면…….”

“끝까지 버티고 있겠다고 약속할게.”

“키팅 양, 어서 타셔야 합니다. 저쪽 남자분에게는 다른 구조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평생 동안 이기적인 선택을 해 왔고, 한 번도 내 선택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었건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기적으로 굴기가 힘들었다. 자일스를 두고 가야만 하는 내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미웠다.

“……자일스. 미안해.”

“괜찮으니까 어서 가.”

“꼭 버티고 있어야 해!”

군인들이 내 손을 잡고 나를 헬리콥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나는 공중에 떠있었다. 나를 구하러 온 군인들과 함께 승선한 채로 밑을 바라보니 자일스가 흠뻑 젖은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다. 당신의 가는 길이 평안하길. 나는 차마 마주 손을 흔들어 주지 못했다.

결국 나는 울고야 말았다. 그는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지만 내가 그에게 돌려준 거라고는 그를 차가운 바닷속에 두고 홀로 떠나는 것이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자 군인들은 최대한 빨리 구조선을 보내겠다며 나를 위로했다. 나는 멀어지는 자일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멀어졌다. 작아지고 작아진 끝에, 이윽고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조명이 사라지자 온통 암흑만이 남았다.

나는 별이 총총히 박힌 밤하늘을 날아 이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우리를 위한 낙원은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살아남아, 그 지옥 속을 빠져나왔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나였다.

그런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제 내게는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겨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바닷속에 내 낙원을 두고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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