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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9화 (89/93)
  • <89화>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남자가 말했다.

    “아가씨의 사연은 안타깝게 됐소만, 이 배에 탄 이상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소. 승선을 피했다면 모를까.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일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소. 당신과 그 아가씨도 포함이지.”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시오! 전부 다 손에 쇠사슬을 차고 있는 죄수들이잖소. 하물며 우릴 감옥에서 꺼낼 방법은 어떻게 마련할 셈이오?”

    “감옥에서 빠져나간다 해도 다 헛수고가 될 거예요!”

    누군가 외쳤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불쌍한 사람 같으니. 정말로 이 배가 어딘가에 정착할 거라고 믿는 건가요?”

    “동토의 감옥으로 가는 수송선이 아닙니까?”

    “당신만 빼고 모두가 알고 있을 거예요. 이 배가 정말 어디로 향할지…….”

    자일스는 그녀에게 뭔가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벌써 알아챈 것일지도 몰랐다.

    자일스는 안나를 기둥 뒤의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눈을 뜬 안나는 위험을 감지했는지 몸을 웅크리고 사각지대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몸집이 큰 자일스를 숨겨 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일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켜서 안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안나마저 들키게 할 순 없었다.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전등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렬한 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자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손님이지? 배를 잘못 찾아오셨나?”

    선장은 자일스의 옷차림을 보더니 물었다.

    “죄수인가?”

    자일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그의 온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탐색했다.

    “저 철창 안을 빠져나왔을 리는 없고.”

    “자일스 헤센이에요.”

    누군가 소리 높여 그의 정체를 밝혔다.

    “자기 이름이 자일스 헤센이라고 말했어요.”

    “헤센? 그 배신자?”

    선장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전등을 고쳐 쥐고는 자일스의 얼굴을 더 밝게 비추었다.

    이내 선장의 얼굴 위에 충격과 놀라움이 차례로 스쳐 갔다.

    “자일스 헤센이 왜 이 배에 탄 거지?”

    “…….”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틀림없군. 따라오게. 쓸데없이 저항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가 총을 꺼내 자일스의 머리를 겨누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자일스는 두 손을 들고 선장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천천히 저 바깥의 빛을 향해 올라갔다. 마침내 갑판 위로 올라오자마자 선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게 분명했다.

    선원들은 자일스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커다랗게 뜬 눈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님, 이자는…….”

    “나도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우선 구속하고 선실로 옮겨. 이 배에 남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순식간에 그를 무릎 꿇린 선원들이 자일스의 두 손을 단단한 밧줄로 구속했다. 그는 자그마하게나마 마련된 선실로 끌려갔다. 그의 명성 때문에 불안했는지, 선원들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는 의자와 그의 몸을 한 번 더 둘러 묶었다.

    밝은 곳에 나오니 선장의 얼굴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선장의 직함을 가지기에는 젊은 남자였다. 해군이었을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그는 제대로 된 제복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선장은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분명히 자네에 대한 지시 사항은 없었는데. 이 배에는 왜 탄 거지? 누가 자네를 임의로 태운 건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 뭐 상관은 없지. 내가 자네 같은 사람이랑 길게 얘기해 봤자 좋을 것도 없고. 통신 장치가 없는 배라서 답답하군.”

    자일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초리에서 일말의 경멸이 느껴졌다.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벨담 사람이 그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선장은 문 옆에 서 있던 선원에게 지시했다.

    “이따가 신호하면 단단히 구속해서 데리고 빠져나가. 구명 보트에 함께 태운다. 사고 못 치게 관리 잘 해. 이대로 가라앉힐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나 그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자일스는 그를 무시하려는 선장에게 재차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거 말 안 해 주면 죽일 기센데?”

    그가 비웃었다. 이제 혼란스러운 쪽은 자일스였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방금 저자가 가라앉힌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자일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흥분하지 마. 이건 경고다.”

    “이 배, 어디에 정착하는 겁니까?”

    잠시 그를 응시하던 선장은 어깨만 으쓱여 보이고는 선원과 함께 선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자일스는 낭패감을 느끼며 몸을 뒤틀었으나 구속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낡고 녹슨 선체. 이상할 정도로 머릿수가 부족한 선원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일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탑승한 배는 이제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 막 도망쳐 온 참이었던 부두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곧 노을이 지려고 했다. 하늘의 일부가 점점 따뜻한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차츰 변해 가는 하늘이 자일스의 불안감을 더욱 부추겼다.

    구속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선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낡아 빠진 가구들만이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자일스는 힘 빠진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

    불청객이 자일스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멎은 쪽을 훔쳐보았다. 낯선 남자들의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자일스가 나를 기둥 뒤로 밀어 넣을 때 몰래 쥐여 준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까만 권총이었다.

    자일스가 이곳에서 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마저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던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일스 헤센이야 그렇다 쳐도,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누군가 물어 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저도 그 답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당신이 헤센의 애인이라던데.”

    “맞아요.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당신도 정말로 헤센을 사랑했던 거요?”

    누군가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흉악범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아는 자일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자일스를 사랑해요. 그 사람은 제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어요. 이 배에 오른 것도 저를 구하기 위해서 자진한 거예요.”

    “그럼 당신은 여기 왜 탔는데?”

    “저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이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나 있을까?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국가가 저를 살해하려 한 것 같아요. 아마도 그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겠죠. 아니면 증인을 없애려 한 것이거나.”

    “벨담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

    “저는 자일스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를 걷어 올려 검푸른 멍 자국들을 보여 주었다.

    “보여요? 이거 다 군인들한테 맞은 거예요. 벨담 군인들이요. 그들은 나를 자일스와 한 공간에 가둬 놓고 죽도록 팼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끌고 가서 곤봉으로 때렸죠. 그것도 자일스가 보는 앞에서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언제 맞았는데요?”

    “재판이 있기 며칠 전부터 계속이요.”

    “난 당신이 왜 이 배에 탔는지 알아요.”

    한 여자가 말했다.

    “만약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벨담은 당신이 죽길 바랐던 게 맞을 거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당신처럼 고문을 받았어요. 죽은 사람들은 전부 무덤으로 갔죠. 죽지 않고 버틴 사람들만 이 배에 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운명에 처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여자는 범죄자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범죄자의 얼굴을 타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도 그랬다. 죽음의 땅으로 끌려갈 정도로 흉악한 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게르트루드요.”

    “당신도…… 나처럼 맞았어요?”

    게르트루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리에 난 화상 자국을 보여 주었다. 절대 사고로 난 흉터가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 고의로 지진 거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왜 그런 일을 당한 거죠?”

    “전쟁을 틈타 벨담에 숨어든 적국 첩자랑 내통했거든요. 내가 들은 바로는 그래요. 내가 첩자와 작당을 했대요. 나도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난 말했죠. 모르겠다고요. 기억이 안 난다고. 이 흉터는 그래서 생긴 거예요. 내가 비열한 거짓말을 한 대가래요.”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가요?”

    “내가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나 같은 사례가 많다는 것만은 알아요. 아가씨도 알겠지만 벨담은 위태로운 시기에 처해 있어요. 물론, 정말 첩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죠. 저도 모르는 새에 그들 중 하나와 대화를 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난 느꼈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애당초 나는 죽을 사람으로 찍혔다는 사실을요.”

    “사회를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지.”

    이번에 말을 꺼낸 건 내 상태를 봐 줬던 소아과 의사였다.

    “벨담은 무리하게 전쟁을 시작했고, 보란 듯이 패배했소. 그 대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빼앗겼고. 이제 벨담은 제 국민들이 두려워진 거요.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아니까 말이오. 그래서 누군가 들고 일어나기 전에 먼저 공포로 찍어 누르려 하는 거지. 지금은 시작 단계일 뿐이지만 앞으로 점점 심해질 거요.”

    “사람들이 증발하곤 하는 곳에서 누가 불만을 품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붙잡혀 온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히려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자일스도 마찬가지예요! 벨담은 그에 대한 가짜 뉴스를 꾸며 냈어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은 대부분 벨담이 자극적으로 왜곡한 것들이에요. 그들은 자일스를 국가가 감당해야 할 돌팔매질을 대신 받아 줄 대상으로 이용한 거예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난 입스윈에서부터 자일스의 행적을 내내 봐 왔어요. 믿어 주세요.”

    나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사람들을 향해 애원했다.

    “제발, 우리를 도와줘요. 생각해 봐요,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잖아요. 어떻게든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해요.”

    “‘도착’이라니.”

    게르트루드는 안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이 배는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우리는 전부 이대로 수장될 거예요. 군인들이 말해 주지 않았나요? 아가씨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배가 우리의 무덤이 될 거라고요. 다른 곳이 아니라.”

    “하지만 분명히…….”

    “저 여자 말이 사실이오.”

    의사가 말했다.

    “동토로 가는 죄수들은 따로 있소.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아니지. 차라리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 거요. 노역을 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지금쯤 위에서는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때였다. 경보음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불길함을 자아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안나를 제외하고 동요하는 이는 없었다.

    의사는 무기력하게 덧붙였다.

    “조금 있으면 배가 가라앉을 예정인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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