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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한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88화 (88/93)
  • <88화>

    자일스는 안나를 안고 후미진 곳에 몸을 숨겼다.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기는 했지만, 이제 그들은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동토로 향하는 중이었다.

    정치범과 질 나쁜 범죄자들을 노역시키는 바다 건너편의 수용소. 모두가 그곳에 대한 소문만을 들었을 뿐, 죽음의 땅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시사철 녹는 법이 없는 얼어붙은 땅에서 한 달 이상 버틸 수 있는 죄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제대로 된 옷이나 음식을 제공받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수용소지 사형을 당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안나를 그런 곳에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데……. 안나는 이제 걷는 일조차 힘들어하는 데다 자일스는 모두에게 얼굴이 알려진 최악의 살인마였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로를 바꿀 일은 요원해 보였다.

    안 그래도 약해진 몸을 끌고 도주를 시도한 탓에 안나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안나가 자꾸 눈을 감으려 해서 자일스는 불안해졌다.

    “안나, 괜찮아?”

    “조금만 자고 싶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마워.”

    안나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 줘서.”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나도 알아. 알지만…… 지금 말하고 싶었어. 너무 늦게 말하는 것보단 낫잖아.”

    “그런 말은 하지 마.”

    자일스는 군복 재킷을 벗어서 안나의 몸에 둘러 주었다. 그녀가 그저 지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생각을 해야만 했다. 이 배를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이 아직 단 한 사람의 선원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배에 많은 인력이 배치된 건 아닌 듯싶었다.

    그렇다 해도 자일스 혼자서 모든 선원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라고 총을 갖고 있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구명보트를 훔쳐 타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만,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제 막 벨담을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다른 국가로 피신하는 것만이 답인데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망망대해를 헤맬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현듯 자일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스쳤다.

    그들에겐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선교와는 다른 곳에 선박 내 감옥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자일스는 안나를 안아 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선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반대편을 향해 한 바퀴 빙 돌아간 자일스는 마침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는 주위를 한 차례 경계한 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쳐 가자 이윽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분명 죄수들이 가까이 있었다. 자일스는 그가 흉악범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아직 안나가 그의 품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감옥이 나타났다. 자일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좁은 공간 안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짐짝처럼 수용되어 있었다. 한 사람당 주어진 공간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다리를 펴고 앉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죄수들은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마 그가 순찰을 돌러 온 군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남에게 관심을 줄 정도로 그들의 상황이 여유롭지 못한 탓일 수도 있으리라.

    어두침침한 복도에 홀로 선 자일스는 입을 열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제 이름은 자일스 헤센입니다.”

    그러자 수십 쌍의 시선이 그를 향해 왔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잠시 아무도 그의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일스 헤센이라는 이름에 흥분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이윽고 누군가가 두 손으로 철창을 붙들며 자일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고생의 흔적이 얼굴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한 여성이었다.

    “자일스 헤센? 정말 그가 맞소?”

    “그렇습니다.”

    “헤센이 여길 왜 와 있지? 엊그제 재판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비켜 봐, 어디 얼굴 좀 보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은 천천히 그 쪽으로 몸을 붙여 오거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일스는 마치 철창에 갇힌 건 자신이며, 스스로가 신기한 동물이 된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진짜 자일스 헤센이에요?”

    “맞습니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멀끔하게 생겼는데.”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시오. 태어날 적부터 범죄자로 생겨 먹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멀쩡한 낯짝을 하고서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 악마의 본성을 숨긴 자들이 많은 법이지.”

    한쪽에는 남성들이, 다른 한쪽에는 여성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공방이 오갔다.

    “우리는 그런 말 할 처지도 못 돼요.”

    “제가 자일스 헤센이라잖아.”

    “여기선 우리 모두가 자일스 헤센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죽으러 바다 위로 떠나온 거겠죠.”

    “쉿! 위에서 사람 내려오겠다!”

    “헤센 씨, 거기 안고 있는 여자는 누구요?”

    자일스는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의 품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 연인입니다. 안나 키팅이라고 합니다.”

    “그 백작 영애?”

    “더 이상은 아니죠.”

    안나의 이야기까지 나오자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성이 자일스에게로 손짓했다.

    “이리 오시오. 나는 벨담에서 30년을 의사로 일했소. 소아과 의사이긴 했지만.”

    자일스는 그에게 다가가 안나를 보였다. 비록 그들 사이를 철창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의사는 마르고 지저분한 손으로 안나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군.”

    “그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이곳에 갇힌 모두가 다르지 않은 신세니까. 폭행을 당한 사연은 아무 의미도 없지.”

    자일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안나가 진찰 아닌 진찰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나마 의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살 수 있겠습니까?”

    “위급한 상태는 아니오. 물론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신체 기관은 멀쩡한 것 같군.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어서 말하는 거요.”

    의사는 안나의 상태를 조금 더 살피더니 말했다.

    “탈진과 탈수가 같이 왔소. 조금 쉬게 놔둬야 하는데. 깨끗한 물도 필요하지만 그건 여기선 구할 수 없을 거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안나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려고?”

    “뱃머리를 돌릴 겁니다.”

    그러자 의사는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만.”

    “여러분이 도와주신다면 배를 점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 혼자서는 아무런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나선다 해도 가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도울 수 있단 거요? 이곳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오. 전부 평범한 사람들이지. 싸우는 법 같은 건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일 텐데.”

    “잠깐,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반대편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도 그 사람을 도우려 나서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저자는 자일스 헤센이라고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아무리 그래도 저런 사람을 돕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자신의 가족마저도 죽인 사람인데…….”

    “맞습니다.”

    자일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침묵을 자아냈다.

    “저는 제 누이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제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뿐이 아닙니다. 저는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전부 저와 누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게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소금기 섞인 악취가 나는 좁은 복도는 그를 위한 고해실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제 죄를 부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 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음은 사실이며 벌을 받게 된다 해도 저항하지 않을 겁니다. 다만 저에겐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제 어깨 위에는 수많은 업보가 쌓여 있지만 여기 있는 안나는 아닙니다. 그녀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군인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고, 결국 이 수송선에까지 끌려왔죠. 전부 제가 아끼는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안나마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자일스는 안나의 손을 꼭 붙들며 말을 이어 갔다.

    안나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저를 도와 달라는 게 아닙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제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로 온갖 고문에 시달린 여인을 도와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안나가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저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안나는…… 제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구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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