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74)화 (74/164)

74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20.11.16.

"……이게 다인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성에는 사탕을 먹을 사람이 없다보니…… 그래도 급하게 주문을 넣어뒀으니 곧 도착할 겁니다."

가제프는 웃으려다가 싸늘한 상관의 시선에 입을 꾹 다물었다. 웃음으로 대충 넘기기엔 테이블에 놓인 유리병은 지나치게 초라했다. 사탕은 귀한 편인데다가 무엇보다 성 내에는 단것을 즐기는 사람이 없었다. 성을 쥐 잡듯이 뒤졌지만 나오는 건 작은 유리병에 담긴 사탕이 전부였다.

"그렇게 큰소리를 내더니 이걸로 끝이에요?"

미카엘은 보란듯 유리병을 흔들어 소리를 냈다. 기대했던 사탕을 잔뜩 받진 못했지만, 잘그락거리는 사탕 소리에 굳어가는 카벨레누스의 표정은 퍽 재밌었다.

"이따가 가지고 올 거라고 했잖아."

"그럼 그때 가서 큰소리쳐요!"

"……사탕 말고, 갖고 싶은 다른 건?"

카벨레누스가 이를 꽉 다문 채, 낮게 중얼거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사탕 때문에 모독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건 왜요?"

"일단 말해봐."

"글쎄요. 막상 말하라고 하니까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요."

"저번에 집을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어? 나, 집 사주게요?"

미카엘의 두 눈에 은근한 기대감이 서렸다.

"몇 채나 필요하지?"

카벨레누스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저택 몇 채 정도야, 주문한 사탕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도 충분히 사줄 수 있었다.

"몇 채까지는 필요 없고, 그냥 엄청 큰 집 하나만 사주세요! 아무도 우리집 보고 뭐라고 못 하게요!"

"사주는 건 어렵지 않지. 가제프."

"네, 전하."

진심으로 저택을 사줄 생각이신 건가. 가제프는 부름에 대답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지우진 못했다. 장난이라고 넘기기엔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산타펜 저택 명의를 오늘 중으로 저 녀석 앞으로 바꿔줘."

"명의가 뭐예요?"

"저택이 네 것이 되었다는 증거. 사탕보다 훨씬 값지고 제대로 된 거지. 네 삼촌이 평생 그림을 그려도 그런 저택은 절대 못 사줄 걸."

"진짜면, 저 오늘부터 거기서 살래요! 엄마랑 같이!"

"……엄마랑 같이?"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당연히 같이 가야죠. 엄마는 평생 나랑 살 거라고 했거든요."

"……취소."

"네?"

"가제프. 저택 명의는 그대로 둬.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어."

"그런 게 어딨어요! 방금 전까진 나 준다고 했잖아요!"

"집 말고 다른 걸 말해."

"이번에도 말로만 준다 하게요? 사탕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아저씨가 약속을 제대로 지킨 게 있기나 해요?"

미카엘의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이번엔 지킬 거야."

"거짓말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안 속아요. 아저씨는 나한테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요."

미카엘은 불만을 감추지 않으며 유리병 속 사탕을 한 알 꺼내먹었다. 치미는 불만과 달리, 단 게 입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되게 맛있네요. 아저씨들도 하나씩 줄까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됐어."

선뜻 받아주는 가제프와 달리, 카벨레누스는 삐딱하게 턱을 괸 상태였다. 미카엘은 속으로 카벨레누스에 대한 점수를 사정없이 깎으며 사탕 하나를 더 입에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커다란 개도 키우는 거 맞죠?"

"보고 싶어?"

"보여줄 거예요?"

"내 사냥개를 보고 겁먹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야 얼마든지."

"내가 겁 먹을 리 없잖아요."

"그러기엔 너무 자주 울던데."

"아니거든요!"

아무리 팔짝팔짝 뛰어도 카벨레누스에겐 닿지 못한다. 결국 미카엘은 애꿎은 사탕만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으며 분노를 토했다.

"……역시, 아저씨가 우리 아빠가 되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요."

"왜?"

"그걸 몰라서 물어요?"

미카엘이 새침하게 눈을 홉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어딜봐서 잘해주는 거예요!"

"멋대로 쳐들어온 꼬마를 상대로 놀아주고 있잖아."

"꼬마 아니거든요!"

"꼬마 소리 듣기 싫으면 좀 더 나이를 먹고 와야지. 안 그래?"

카벨레누스는 가제프를 슬쩍 흘겨봤다.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었지만, 정작 가제프는 멋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엄마한테 아저씨가 나 괴롭혔다고 다 말할 거예요."

"내가 언제 괴롭했다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까지 해가면서 어울려주고 있는데 괴롭히긴.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때리는 것만 괴롭히는 게 아니거든요!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면 그것도 괴롭히는 거랬거든요! 우리 엄마가!"

"나는 딱히 그런 걸 한 기억이 없는데?"

"원래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하는 거죠."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카벨레누스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도 미카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꼬마는 조금 성가신 구석이 있긴 했지만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바뀌는 표정은 의외로 구경할 맛이 났다.

"미카엘."

"……."

"미카엘."

"……아저씨, 방금 나 부른 거예요?"

미카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벨레누스를 돌아봤다. 지독하다 싶을 만큼 제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던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잖아."

"언제부터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줬다고요. 엄마한테 이른다고 해서 지금 이러는 거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아니긴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실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툭툭 못된 말들을 내뱉는 카벨레누스가 얄밉다가도 저런 식으로 바라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뒷모습을 좇게 되니까.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낼 텐데 슬슬 익숙해지긴 해야 하잖아. 너도, 나도."

"……."

"솔직히 잘 지낼 자신은 없다만 노력은 해봐야지."

"……그럴 땐 그냥 잘 지내보자고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가?"

카벨레누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피식 웃었다. 확실히 아이와 어울리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흔히 쓰이는 표현들조차 여전히 타인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시덥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것부터가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슬쩍슬쩍 내비치는 아이의 웃음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의 조막만 한 얼굴에서 익숙한 흔적을 찾는 것도, 반대로 전혀 다른 흔적을 찾아내는 것도 의외의 재미가 있었다.

"미카엘."

동그랗게 두 눈을 뜨고 절 바라보는 미카엘의 모습은 예전 알리시아의 반응과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그리고,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제 부모를 닮은 그 모습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기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존재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16638394780146.jpg

* * *

"……미카엘?"

알리시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떴다를 반복하다가 텅 빈 자리를 발견하고 그대로 멈췄다. 알리시아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급하게 옆자리를 매만졌다. 시트에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잠깐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알리시아는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미카엘! 미카엘! 어딨어! 미카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아가씨? 무슨 문제라도-."

"미카엘, 제 아이…… 아니. 이 정도 키에 적갈색 머리를 한 사내아이를 보지 못했나요?"

"도련님이라면, 전하의 집무실에-."

"집무실이 어디죠!"

"여기서 한 층만 내려가면 바로 보이는 가장 큰 문-."

하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알리시아는 몸을 돌렸다. 다리가 꼬여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알리시아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기어코 집무실 문을 찾아 거칠게 열었다.

"알리시아?"

"엄마?"

문이 열리자마자, 놀란 얼굴들이 보였다. 알리시아는 그 사이에서 원하는 얼굴을 찾자마자, 곧장 미카엘을 향해 달려가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다소 빠른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고서야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잊고 있었던 울음이 새어나왔다.

"엄마, 왜 그래?"

미카엘이 알리시아의 어깨를 툭툭 쳤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닌 흐느끼는 울음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상황이 심각하다 여긴 카벨레누스가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 얇은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여자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의사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겠군. 일단 의사부터-."

"왜 멋대로 아이를 데려간 거예요!"

알리시아가 거칠게 카벨레누스의 손을 밀어내며 그를 노려봤다. 카벨레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잔뜩 핏발 선 알리시아의 눈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안해. 그대가 걱정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아직도 자신이 두려운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뱉을 수 있는 건 알리시아를 안심시키 위한 사과의 말뿐이었다.

"……."

"전부 내 탓이야. 정말로 미안해."

"……."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은 카벨레누스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무작정 화부터 내서 제가 더 죄송해요."

"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계속 걱정해왔잖아."

"……화 안 나세요?"

"내가 왜 화를 내겠어."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서야, 방 안 풍경이 제대로 보였다. 알리시아는 테이블에 잔뜩 놓인 사탕들을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카벨레누스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 사탕이 있는 이유는 뻔했다. 무엇보다 미카엘에게선 감출 수 없는 단향이 났으니까.

"엄마……."

연신 눈치를 살피던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알리시아의 옷자락을 잡았다. 미카엘은 잔뜩 겁 먹은 표정이었지만, 정작 사탕을 물고 있어 불룩 튀어나온 아이의 볼은 지금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 갈 거라면 엄마한테 말했어야지."

"나는 그냥 엄마가 자고 있으니까 심심해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미카엘이 두 팔 벌려 알리시아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리시아는 안겨오는 온기에 화내는 것도 포기하고 미카엘을 보다 단단히 끌어안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아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 * *

"살짝 발을 접질렸을 뿐, 뼈에는 이상 없습니다. 이틀 정도 푹 쉬시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카벨레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알리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왼쪽 발목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엄마, 괜찮아? 많이 아파?"

"응.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알리시아는 웃었지만, 정작 그녀를 향한 눈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진짜로 괜찮아지려면 아직 멀었지."

카벨레누스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알리시아의 어깨에 걸쳐줬다. 그녀가 입고 있던 얇은 침의가 계속 걸린 참이었다.

"……고마워요."

한 번 이상은 거절 당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알리시아는 순순히 자켓을 입었다. 희게 질린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혈색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했나?"

"……."

"그런 줄 알았으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뇨.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화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너무 초조해서 그만……."

알리시아는 치미는 감정에 말을 끝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나?"

"……."

웬만하면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알리시아의 유별난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원래부터 미카엘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방금 전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했다. 심지어 이 순간조차 그녀는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슈바르한으로 온 후부터 계속 신경이 예민해져 있잖아."

"……알고 계셨어요?"

"그대 일이니까."

따뜻한 눈길에 목이 메었다. 알리시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숨을 길게 토했다.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저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사내는 항상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수백, 아니 수천 번 이상 이미 끝난 관계라고 생각하려 했음에도 자꾸만 마음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악착같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가끔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항상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어요?"

"그대가 말하고 싶지 않아하잖아."

"……."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마. 말하든, 하지 않든 간에 내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거니까."

알리시아의 속눈썹이 흔들렸다. 믿어도 된다는 확신보다 믿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항상 사내에게 약했으니까. 카벨레누스는 유일하게 알리시아를 무너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카벨레누스가 한 말들이 잊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 번만 더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클라우드 경, 미안하지만 잠시 미카엘과 함께 있어줄래?"

"아, 물론입니다."

"나는 싫어! 엄마 옆에 있을 거야!"

"잠깐이면 돼."

"그래도 싫은데……."

옷자락을 잡은 고사리 같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알리시아는 두 손으로 미카엘의 손을 감싸쥐고 다정하게 웃었다.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알았어."

미카엘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내밀어진 가제프의 손을 잡았다. 알리시아는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고서야 카벨레누스를 올려다봤다.

"전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1663839478015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