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75)화 (75/164)

75화. 아이의 의미

2020.11.19.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그 전에 좀 더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뇨. 지금 해야 해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 용기 낼 자신이 없는 걸요."

알리시아는 그 말을 하면서도 초조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카벨레누스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혐오했던 건 마물 때문이었다. 마물과 연관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옳은 것인지 차마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대항하는 건 확실히 불리했다. 침묵으로 일관하기엔 미카엘을 노리는 적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미카엘은 8년 전 그 아이가 맞아요. 그래서 당신을 무척 많이 닮았고, 또……."

"천천히 말해. 기다릴 수 있어."

"……당신이 혐오하는 마물의 피를 이어받았어요."

알리시아는 그 말을 끝으로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었다. 카벨레누스가 눈치채고 있을 거라는 거 알았지만, 단순히 의심하는 것과 확언하는 건 달랐다.

"물론, 지금의 미카엘은 평범한 아이예요. 그것만큼은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다만……."

"다만?"

중저음의 목소리에 알리시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카벨레누스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감이 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평범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알리시아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힘주어 꽉 잡았다. 고작 말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입술을 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내려앉는 것만 같아 괜히 숨이 찼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혐오로 얼룩졌던 사내의 시선이 떠올랐다.

"……황제는 미카엘이 마물을 조종하는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더군."

"……."

"그렇게 떨지 않아도 돼. 그 정도는 예상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거니까."

어깨에 온기가 닿았다. 알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벨레누스의 얼굴에는 혐오 대신, 걱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8년 전, 그날. 저는 설원에서 마물들을 만났어요."

"마물들을 만났다고……?"

"네. 만났어요. 그리고, 그들이 절 살려줬죠."

"마물들이 누군가를 살렸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하지만 사실이에요. 그때, 저와 미카엘을 살렸던 건 그들이었어요.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마을까지 가지 못하고 그대로 설원에서 얼어 죽었을 거예요."

알리시아는 카벨레누스의 자켓 끝을 만지작거렸다. 들었던 이야기와 달리, 마물들은 난폭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골적일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호의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미카엘 때문인가?"

"……예상하셨겠지만, 미카엘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에요."

"확실히 생각하는 게 비범해보이긴 하더군."

카벨레누스가 헛웃음을 뱉었고 알리시아는 그제야 겨우 손에 힘을 풀었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8년 전, 슈바르한에서 마물들이 사라진 건 우연이 아니에요. 이젠 떠돌 이유가 없어졌을 뿐이죠."

"……."

"마물들이 슈바르한을 떠돌던 건, 자신들의 왕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왕이라고? 설마……."

"네. 그들은 미카엘을 그렇게 불렀어요."

알리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벨레누스는 황망하게 서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왕이라, 확실히 의심스러운 단어로군. 그런데, 그대는 그걸 어떻게 안 거지?"

"마물들이 제게 말을 걸었어요."

"마물들이 말을 한다고? 정말로 그들이 말을 했나?"

"어설프긴 했지만, 그들은 분명 사람의 말을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나는 마물들이 말을 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

카벨레누스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지금껏 무수히 많은 마물들을 상대해왔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마물은 이성이 없었다, 적어도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랬다.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다면,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고 싶어서 그래."

"저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에요. 그저 확실한 건, 마물들은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심판해줄 왕을 기다려왔다는 거죠."

"잠깐, 심판이라고?"

"왜 그러세요?"

알리시아가 살짝 콧잔등을 찡그렸다.

"좀 걸리는 게 있어서."

"걸리는 거요?"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카벨레누스는 손끝으로 구겨진 미간을 살살 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이진 않지만, 유일하게 자주 쓰이는 곳이 있었다.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 말씀해주세요."

"……프라임 교단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이긴 해."

"프라임 교단이요?"

"아, 그대는 모르려나."

카벨레누스는 살짝 턱을 괸 채 미간을 찡그렸다. 프라임 교단은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교리는 황족의 기본 소양이었다. 글을 깨우쳤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경전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어야 지긋지긋한 신앙 교육을 끝낼 수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야. 권력자들이 으레 하듯 그럴싸한 전설을 만들어둔 것일 뿐이지."

"그래도 듣고 싶어요."

강제로 외워야 했던 경전은 지긋지긋했지만,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여자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카벨레누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점차 신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끝끝내 신의 자리를 노리기에 이르렀다."

"……."

"신을 죽인 자들은 추악한 마물이 되었고 남은 인간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신이 사라진 세계는 나날이 황폐해져갔고, 그제야 인간들은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신을 찾았다."

"……."

"그러던 어느 날, 인간들의 간절함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날뛰는 마물들을 설원의 땅으로 추방하고 인간들에게 평화를 안겨주었니, 그가 바로 신의 헌신인 프라임이다."

말을 끝낸 카벨레누스의 입매가 삐딱해졌다. 손 한 뼘 정도의 두꺼운 경전을 전부 읊을 수 없어 짧게 요약하긴 했지만, 말하는 것만으로도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인가요?"

알리시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다는 아니야. 방금 건, 신 프라임의 탄생 설화니까. 중요한 건 다음이지."

"다음이요?"

"프라임 교단은 인간들이 신을 죽인 죗값을 전부 치르지 못했기에 노화, 굶주림 등의 고통이 찾아왔다고 말하지."

"……."

"죗값을 다 치르면 프라임이 소원을 들어주지만, 반대로 죄를 더 지으면 마물들이 설원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심판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카벨레누스의 잇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교단이 말하는 심판과 마물이 말한 심판이 연관 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그럼, 마물은 인간들을 해치는 게 목적일까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물의 목적이 인간을 몰살하기 위함이라면 더욱 미카엘을 내줄 수 없었다. 제 아이를 살육의 도구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다른 이유요?"

"역사는 승자의 것이니까. 얼마든지 조작하거나 왜곡할 수 있지."

교단의 이야기를 순순히 믿기엔 그들이 벌인 일들이 걸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믿음은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고, 무엇보다 교단은 믿음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마물들을 이용해왔다. 무조건 교단의 이야기를 믿을 순 없었다.

"혹시 마물들에게 더 들은 이야기는 없나?"

"……약속이라고 했어요."

"약속?"

"약속 때문에 자신들은 슈바르한을 떠날 수 없다고, 왕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요."

"……."

"사실 저 지금 많이 두려워요."

알리시아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슈바르한에서 돌아갈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도망치듯 떠나던 저를 향해 기다리겠노라고 울부짖던 마물들의 울음소리를 잊지 못했다.

"전하도, 마물도 모자라서 이제는 황제에 신전까지 상대해야 해요. 모두가 제 적인 것 같고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죠."

"그런데, 왜 내게 이야기를 해준 거지? "

"당신이 가장 나은 선택지라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카벨레누스의 시선에 알리시아는 살짝 고개를 떨궜다. 섣부른 말이 아닐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믿고 싶었다. 8년동안 달라진 자신만큼이나 그 역시도 달라졌다고 믿고 싶었다.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믿고 싶어서요."

"……."

"우스운 일이죠, 정말로. 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또 했는데, 결국 당신 앞에 서니까 결국 흔들려요. 자꾸만 기대하게 돼요."

"……."

"당신이 내 전부였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걸 무너트린 것도 당신이지만. 알리시아는 짧게 조소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사내의 동공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에게 희망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에요."

"……."

"그러니까, 조금씩 노력해봤으면 해요."

알리시아는 애써 양 입꼬리를 올렸다. 강한 확신이 없어도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야만 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요. 우리의 지난 날들이 어떻든 간에 앞으로는 미카엘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할 거예요."

"……진심인가?"

"그러니, 당신도 노력해줬으면 해요."

내 아이를, 아니 우리 아이를 위해서. 알리시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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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많이 생각하시나봅니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더군. 다만……."

카벨레누스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이상해서."

"이상이요?"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알리시아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과거의 시간들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고, 쉽게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는 제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아이를 위하고 있었으니까.

"잃을 뻔했던 기억 탓에 예민하다고 하기엔 너무 아이에게 맹목적이잖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벨레누스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가씨께서는 혈육도, 친구도. 뭐 하나 의지할 곳도 없었으니까요. 그만큼 도련님께 집중하게 되었을 겁니다."

"……."

"결국 사람은 혼자선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이니까요. 마음 붙일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죠."

"……네 이모 같은 말을 하는군."

"저도 이젠 나이가 먹어가는 건지, 예전에는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다시 생각하게 되더군요."

가제프는 소탈하게 웃으며 곧장 다시 입을 뗐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도련님을 많이 예뻐하지 않으십니까."

"딱히 예뻐하진 않았는데."

"그런가요?"

"생각했던 것보다 거슬리지 않을 뿐이야. 그리고, 알리시아가 애틋하게 여기고 있기도 하고."

카벨레누스의 시선이 유리창에 닿았다. 아직도 스스로가 부모라는 자각은 들지 않았다. 부모 흉내를 내기엔 사내는 어떻게 해야 부모가 되는지, 그리고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인지 알지 못했다.

"솔직히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은 없어. 알리시아가 이례적이었을 뿐, 애당초 나는 누군가에게 깊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마물의 피 때문인지, 실험을 겪은 후부터는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좋은 것을 봐도 좋은 줄 몰랐고, 나쁜 것을 봐도 나쁜 줄 몰랐다. 모든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감정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도 드물었다. 그저 옛 기억에 머문 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죽을 생각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에겐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알리시아는 내게 특별해. 그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 하지만 아이의 존재는 모르겠어."

"도련님의 반은 아가씨에게서 온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이의 얼굴을 보면 당연하게 그녀의 흔적을 찾게 되는 거지."

하지만, 아이는 그녀가 아니잖아. 카벨레누스는 탄식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알리시아의 아이라고 해서 그녀를 대체할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 뭐든 하려는 그녀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겠구나."

"……."

"그러면, 나는?"

"……."

"내가 그때도 아이에게서 그녀의 흔적을 찾으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녀가 사랑했다는 이유로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꽉 다물린 잇새로 흘러나는 목소리가 거칠었다. 카벨레누스의 턱 근육은 잔뜩 힘이 들어간 나머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이를 위해 부족함 없이 해주곤 싶어. 원한다면 내가 가진 걸 전부 물려줄 수도 있어.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아이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

"외람된 말씀이나, 예전에 이모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잘할 수 없는 거라고. 노력하고 자꾸 시도하다보니 잘하게 된 거라고요."

애당초 답이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라는 것에는 정답이 없었고, 누구나 처음 부모가 된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아가씨께서도 처음에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도련님을 사랑하고 아끼시죠."

"……."

"저는 전하께서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도련님을 예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충분히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

"어쩌면, 전하께서는 도련님이 어떤 의미인지를 찾지 못하신 게 아니실지도 모릅니다."

가제프는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미카엘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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