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뜻밖의 청혼 (73)화 (73/164)
  • 73화. 아빠가 될 자격

    2020.11.12.

    16638394742515.jpg

    "황제와 대신관 측이 접촉했습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시군."

    "황실도, 신전도 혼자서 전하를 상대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카벨레누스와 싸우면, 승패를 떠나 엄청난 손실을 떠안게 되어 자연스럽게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생 서로의 약점을 찾아 세력 다툼을 해온 두 세력 입장에선 쉽게 움직일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것 같으니 뭔가 수를 써보려는 거지."

    두 세력이 눈치만 보다가 아무것도 못 했으면 싶지만, 그러기에는 양쪽 다 너무 욕심이 많았다. 고작 반쪽 세력으로 만족할 자들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선 얼마든지 손을 잡을 것이었다.

    "두 세력이 손을 잡지 못하게 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신뢰는 없을 테니 단순한 틈으로는 부족해. 좀 더 확실하게 관계를 금가게 만들어야 하지."

    서로에 대한 기대가 없고 목적이 뚜렷한 만큼 제르페누스와 헤르만의 동맹은 쉽게 와해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동맹이 완벽한 건 아니었다. 서로 간에 신뢰가 없다는 건 어설픈 동맹이란 뜻이기도 했다.

    "좋은 방도라도 있으십니까?"

    "한 번에 처리하는 건 무리고, 차츰 무너트려야겠지. 둘 다 기반이 흔들리면 쉽게 움직이진 못할 테니 말이야."

    카벨레누스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많이 억누르긴 했어도 족쇄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두 세력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벌집을 건드리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없게 미리 혼란을 줘야지. 신경을 거슬리게 할 만한 것을 찾아서 뿌려두면 더 좋고."

    "그런 게 있습니까?"

    "있지.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카벨레누스가 느긋하게 대륙 지도를 펼쳤다. 그의 시선 끝에는 사슴을 연상케하는 문장이 있었다.

    "로아킨을 끌어들이도록 하지."

    "하지만, 로아킨은……."

    가제프가 말끝을 흐렸다. 쉬쉬한다 해도 제르페누스의 친모가 로아킨 왕국 출신 무희라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신록을 연상케하는 녹색 눈동자는 로아킨인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으니까. 제르페누스가 이방인 황제라 조롱받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르페누스는 병적으로 녹색 눈을 싫어하는 만큼 로아킨을 혐오하지. 그리고, 그건 로아킨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반은 로아킨 아닙니까."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오죽했으면 자기 몸에 흐르는 피 절반을 빼내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야."

    지금이야 감추는 법을 배웠지만 예전의 제르페누스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툭하면 제 핏줄을 탓하며 울기 일쑤였다.

    "그 정도입니까?"

    "그래. 거기에다가 로아킨은 과거에 여론도 좋지 않으니 더욱 도움이 될 거다."

    "그때의 여론이라면, 로아킨이 나라를 집어삼키고자 한다였나요?"

    "선황께서 황제의 생모에게 많은 걸 하사해서 생긴 여론이었지. 실질적으로 따지면 총애 받던 이들이 받아온 하사품 양과 그리 차이는 없었지만, 대신관이 개입했었거든."

    "대신관이 왜 그런 짓을……."

    가제프의 표정이 묘해졌다. 카벨레누스의 얼굴에는 짙은 혐오감이 떠있었다.

    "황가의 비밀을 위해서였지."

    "황가의 비밀이요?"

    "그리 대단할 건 없는 이야기지. 흑발이며, 금색 눈동자가 어떻게 지금껏 이어져왔을까 하는 것 말이야."

    "아무래도 황족은 특별한…… 설마……."

    가제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황실의 특별함은 제국인에겐 당연한 이야기라서 의심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카벨레누스가 굳이 이야기를 꺼낸 건,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별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실험쥐로 쓰였던 나뿐이야."

    "그 말씀은……."

    "황실은 대대로 조건에 부합하지 않은 아이를 처리해왔어."

    "그럼, 황제는 어떻게 살아남은 겁니까?"

    "선황의 대단한 부정 덕분이지."

    점차 시간이 흘러 목적이 변질되긴 했지만, 실험이 시작된 것도 제르페누스 때문이었다. 선황제는 제르페누스에게 금색 눈동자를 물려주고 말겠다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헤르만은 선황제의 실험도, 황가의 비밀을 지켜주며 얻던 권력을 잃게 된 것도 전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 그래서 처리하고자 한 거야."

    그 목적은 딱, 절반만 성공했지만. 헤르만은 쉴새없이 여론을 몰아가며 선황을 압박했고 제르페누스를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생모를 죽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황제의 생모가 죽자, 선황제는 남은 자식에게 더욱 집착했지.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그리고……."

    카벨레누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두통이 밀려오곤 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어차피 중요한 건, 그 둘이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이니 말이야."

    "……."

    "그리고, 로아킨은 둘 사이에 더욱 틈을 만들어줄 거다."

    많은 자들이 제국의 것이 로아킨으로 흘러간다는 것에 분노했고, 그들을 비난하기에 바빴다. 이제와서 로아킨이 다시금 윤곽을 드러난다고 해서 분노가 가실 리 없었다.

    "로아킨이 황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알겠지만, 대신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말하지 않았나. 로아킨을 그렇게 만든 건 대신관이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비난을 즐기지, 진실을 즐기진 않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일수록 자극적이고, 쉽게 먹히는 법이었다. 로아킨에게 악감정만 남은 상황에서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들어주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 진실이 비난할 이유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우리 측에는 대신관이 재앙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차고 넘치지 않나."

    "말처럼 쉽진 않을 겁니다."

    "알아. 잘못하다간 재앙을 일으킨 주체가 나로 바뀔 수도 있겠지."

    대신관의 부정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쓸 수 없는 건, 쉽게 무너질 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제르페누스가 자신의 소문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도, 아직도 그의 소문이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헤르만의 부정은 그를 몰락케 하는 게 아니라, 그가 몰락하고 있을 때 써야만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쪽에만 세력이 기울면 안 돼. 황실과 신전, 양쪽 다 비등해야 서로를 견제하느라고 우리 쪽에 신경을 덜 쓰지."

    "황제와 신전을 동시에 잡으시겠다는 겁니까?"

    "상황에 따라 적절히 흠집을 내주면서, 권력의 추를 움직이자는 거지."

    어차피 한 번에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고, 무엇보다 그들이 예상과 다르게 합심해서 달려 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권력의 균형을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기울게 하며, 조금씩 그들의 기반을 무너트리는 편이 안전했다.

    "그게 가능할까요?"

    "만들어진 흠집 사이로 이득이 떨어지면 얼마간은 가능하겠지. 결국 따지고 보면 서로의 살점을 물고 있어서 이득도 아니겠지만."

    누구라 할 것 없이 욕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이득을 쥐여주며 공격 받았다는 의심을 하지 못하게끔 잠깐이라도 눈을 돌리게 할 수 있었다.

    "일단 지금은 신전 쪽이 우세하니까……."

    똑똑-. 말을 끊어버린 문소리에 카벨레누스의 눈매가 굳었다. 회의를 방해할 수 있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카벨레누스 대신, 가제프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8년 전의 사건 이후, 카벨레누스는 갑작스러운 전령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내가 분명 정말 급한 소식이 아니면……."

    가제프는 문을 열다가 그대로 멈췄다. 분명 노크소리가 들렸는데,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순히 착각? 그게 아니라면…….

    "아저씨!"

    그때였다. 밑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가제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는 말간 눈동자를 한 미카엘이 있었다.

    "미카엘이 어쩐 일이십니까?"

    "아저씨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게 말입니까?"

    "아저씨 말고, 저기 아저씨 뒤에 있는 아저씨요."

    "제 뒤에 있는 아저씨라면……."

    가제프는 미카엘의 말을 따라하다가 마주친 금안에 어설프게 웃었다. 미카엘은 아직도 카벨레누스를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저씨, 시간 좀 있어요?"

    "아니. 없어."

    "……엄마한테 일러도 돼요?"

    "갑자기 시간이 생길 것 같군."

    카벨레누스는 성가시단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놨다. 미카엘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쭉 폈다. * * *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아저씨를 찾는다니까, 다들 친절하게 알려주던 걸요."

    찾는 아저씨의 정체가 카벨레누스라는 걸 알자마자, 다들 얼굴이 희게 질려 어쩔 줄 몰라했지만. 미카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카벨레누스의 낯을 살폈다. 카벨레누스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수상하다는 건 확실했다. 좀 더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네 어머니는?"

    "엄마는 자고 있어요. 어제 잠을 설쳤대요."

    미카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벨레누스는 가제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밤부터 당분간 알리시아의 방으로 불면증에 좋은 차를 올려줘."

    "알겠습니다."

    "……."

    "뭘 보는 거지?"

    "사실 나는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어요."

    미카엘의 시선이 천천히 카벨레누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잘 차려입은 사내의 모습은 퍽 괜찮아 보였다.

    "무슨 거짓말."

    "성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있으니까 있다고 한 것일 뿐이야."

    이렇게 큰 성이 있으면 자랑할 법도 한데, 정작 카벨레누스는 덤덤했다. 미카엘은 카벨레누스의 눈치를 보며 슬쩍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아저씨가 황제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도 진짜예요? 그때 그랬잖아요. 아저씨가 대……."

    "대공."

    "맞아요, 그거! 그것도 진짜예요?"

    "그래."

    "그럼 황제랑도 친하겠네요?"

    "……."

    미카엘의 두 눈에 기대가 서렸지만 카벨레누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이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친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황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었다.

    "황제랑은 안 친하구나. 하긴, 아저씨는 성격이 나빠서 친구가 없을 것 같긴 했어요."

    "누가 성격이 나쁘다는 거지?"

    "아저씨요."

    "……."

    "설마, 아저씨는 본인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진짜 양심 없는 짓인데. 일부러 깐죽거리는 말투가 얄밉지만 카벨레누스는 입을 꾹 닫았다. 아직 그는 미카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저 조그마한 몸에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황궁에 가보고 싶긴 했는데 아쉽게 되었네요."

    "황궁이라고 해서 볼 것도 없어."

    카벨레누스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궁에 있는 미카엘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볼 게 없긴요. 황궁이 제국에서 가장 큰 성이라면서요. 여기도 이렇게 큰데, 황궁은 얼마나 크겠어요."

    "크긴 하지만 큰 게 다지. 무엇보다 거기서 사는 작자가 썩 좋은 인간은 아니거든."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보다 성격이 나쁘겠어요."

    "……너는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아저씨라고 생각하는데요. 무지 강하지만, 성격도 그만큼 나쁜 아저씨요."

    미카엘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가슴을 쭉 폈다.

    "오늘 나와 싸우려고 온 건가?"

    "설마요.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무슨 확인?"

    "아저씨가 우리 아빠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요."

    "뭐?"

    카벨레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미카엘은 태연했다.

    "내가 전에 말했죠? 친아버지는 선택할 수 없어도 양아버지는 고를 수 있다고."

    1663839474252.jpg

    저 머릿속에는 정말로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카벨레누스는 말문이 턱 막힌 채, 헛웃음만 반복적으로 흘렸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아이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다.

    "아저씨가 엄마를 지켜주는 거 보고 생각했어요. 내가 어른 될 때까지 잠깐만 아저씨가 엄마를 지켜주면 좋을 것 같다고요."

    "그래서, 날 네 아버지로 받아주겠다고? 그것 참, 큰 선심이군."

    "아직 아버지로 받아주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내가 아저씨를 뭘 믿고 우리 엄마를 맡겨요."

    미카엘이 질색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마치 성가신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면?"

    "당분간 아저씨를 지켜볼 거예요. 아주 정확하고, 진짜 예리하게요!"

    "지켜봐?"

    "일종의 검사죠. 아저씨는 강하고 돈도 많은데, 성격이 나쁘잖아요. 제임스 삼촌처럼 착한 사람이면 모를까, 아저씨는 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네 삼촌도 썩 착한 사람은 아닐 텐데."

    카벨레누스가 불만조로 중얼거렸다. 곱상한 얼굴을 가면 삼아 유세 떠는 모습이 얼마나 같잖은데, 자신만 지적받으니 억울했다.

    "그럴 리가요. 삼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사탕도 사주고-."

    "그딴 건 나도 얼마든지 사줄 수 있어."

    "그런 건 사주고 말하는 거예요."

    나름 유지되던 카벨레누스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카벨레누스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가제프, 지금 당장 사탕 가져와."

    "사탕 말입니까?"

    "성에 있는 건 모조리 가져와."

    카벨레누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맹랑한 아이의 장난에 놀아나는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제임스에게 지고 싶진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