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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청혼 (72)화 (72/164)

72화. 뻔히 보이는 거짓말

2020.11.09.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네, 그럴게요."

"불편한 게 있어도 바로 말하고."

"알겠어요."

"그리고, 또……."

카벨레누스는 더는 생각나지 않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왜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건지 이젠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럴 수 있을 리가."

카벨레누스가 짧막한 숨을 뱉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채워도 텅 빈 것 같던 방이 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꽉 차게 느껴지고 있었다.

"빈말이 아니야.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요구해. 바로 옆방이 내 방이니까……."

"옆방이요?"

"맞아. 내 옆방."

"전 예전처럼 별궁에서 지내도 상관없어요."

알리시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벨레누스의 옆방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 방은 슈바르한 대공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아무리 대공비 자리가 공석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약속을 운운하기엔 둘의 관계는 애매해져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야. 이 방에선 문을 거치지 않고도 곧장 내 방으로 갈 수 있거든."

"전하의 방으로요?"

카벨레누스의 설명에 알리시아의 표정이 더욱 미묘해졌다. 그의 옆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썩 내키지 않겠지만, 안전을 위해서야."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줬으면 해. 두 번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둘 순 없어."

"아무리 그래도……."

예전의 기억을 생각하면 확실히 불안했고, 무엇보다 의심하기엔 사내는 지나치게 담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는 건 첩자만이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그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설원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피곤할 테니, 통로 이용법은 내일 한 번에 알려줄게. 여기 뿐만 아니라, 다른 곳 통로도 함께 외워두면 도움이 될 거야."

"성의 통로를 다 알려주시겠다는 거예요?"

"말없이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

"애당초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만들어진 통로잖아. 이 참에 쓰임에 맞게 사용되는 게 맞지."

카벨레누스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말로는 덤덤한 척했지만 알리시아가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벌써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다.

"잠깐 쉬고 있어. 간단한 식사를 올려보내줄 테니까,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고마워요."

알리시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벨레누스는 그녀를 따라 웃으려다가 그녀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미카엘을 발견하고 살짝 인상을 썼다.

"뭘 봐요?"

퉁명스러운 말투에 카벨레누스는 짧게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팔짝팔짝 뛰어다닐 때는 언제고, 어느샌가 미카엘은 불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먼저 본 건 네 쪽일 텐데?"

"그거야 아저씨가 우리 엄마 보면서 이상한 얼굴 하니까 그렇죠."

"……이상한 얼굴?"

그딴 소리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카벨레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카엘은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팍 줬다.

"미카엘, 말 조심해야지. 어른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그치만…… 알았어. 미안해요. 아저씨."

미카엘은 사과를 하면서도 여전히 카벨레누스를 노려봤다. 누가 봐도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카벨레누스는 그걸 지적하려다가 알리시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니 얼른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 뿐이었다.

"괜찮으니, 얼른 쉬도록 해. 불편한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그리고……."

다음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카벨레누스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니까, 푹 쉬어."

"네. 고마워요."

카벨레누스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알리시아는 곧장 창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 번이고 창밖을 보며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 * *

'여긴…….'

알리시아는 멍하니 주변을 살피다가 그대로 굳었다. 바라보고 있었다. 모습을 분간하기 어려운, 거대하고도 기이한 형체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제야 부서진 마차와 바닥에 얼어붙은 핏물, 그리고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검이 제대로 보였다.

'……그 꿈이구나.'

알리시아가 헛숨을 뱉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에도 금색 눈동자들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찾았다]

마물이 낮게 그르렁거렸다. 목으로 낸다기보단 진동에 가까운 음성은 발음이 잔뜩 뭉개져 어설프게만 들렸다. 마치 짐승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애당초 저 기이한 형체를 짐승이라 칭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검을 쥔 알리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찾았다.]

시커먼 팔들이 알리시아를 향해 뻗어졌다. 그것들은 전부 하나 같이 털이 북실북실하게 나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짐승의 것이었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알리시아는 홀린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으로는 확신 어린 시선으로, 또 마지막으로는 경외 어린 눈을 한 마물들에게는 적의라곤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기꺼워 보였다.

[우리들의 위대한 왕.]

마물들이 웃었다. 적어도 알리시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차마 검을 놓을 수 없었다.

[항상, 찾았다. 우리의 왕.]

[약속했다, 심판.]

[돌아가야 한다, 이제 그만.]

[이 땅, 외롭다.]

마물들이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저들도 자신의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다가오지마.“

[어째서?]

[왜?]

[찾았는데, 드디어?]

[기다렸다, 우리, 평생.]

"나는 너희들의 왕이고, 그런 거 몰라."

그저 내 아이를 지키고자 할 뿐. 알리시아는 이를 악문 채 겨우 검을 들었다. 마물들을 향해 똑바로 검을 겨누고 눈에 힘을 줬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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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아……, 하아……."

알리시아는 눈을 뜨자마자, 곧장 잠든 아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정말로 괜찮아."

알리시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미카엘을 보다 품으로 끌어안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아이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나마 안도감이 밀려왔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한참을 미카엘을 안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슈바르한에서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한잔 드십시오. 차 향이 무척 좋습니다."

제르페누스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헤르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보지도 않고 제르페누스를 향해 미소지었다.

"안 드실 겁니까?"

"송구스럽지만, 말시안은 교단에서 금하는 찻잎이라서 말입니다."

"이런. 아무래도 제 아랫사람이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얼른 다시 차를 내오라고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아닙니다. 애당초 차를 마시려고 온 것도 아닌 걸요."

여전히 개코로군. 제르페누스는 속내를 감추며 슬쩍 찻잔을 옆으로 밀어냈다. 블렌딩할 때 조금 넣은 말시안을 귀신 같이 맞추는 걸 보면 아직 독살을 운운할 때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뭘 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콘돌라 지방 쪽에서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시끄러운 일이라. 무슨 일 말입니까?"

"그건 폐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폐하. 신의 눈을 속이려들지 마세요. 신께선 어디든 존재하십니다."

헤르만은 느긋하게 늘어진 수염을 매만졌다.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노인의 만면에는 미소가 그득했지만, 정작 흰 눈썹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제르페누스를 염탐하기에 바빴다. 제르페누스가 군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소득을 얻어냈는지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불순한 무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불순한 무리요?"

"아시다시피 요즘 제 상황이 썩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폐하의 상황이 어때서요."

그걸 몰라서 묻나. 제르페누스는 헤르만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최근 급속도로 퍼진 제르페누스에 대한 악의적인 이야기는 전부 신전 소행이었다.

"제가 진짜 황제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폐하께서 진짜 황제가 아니라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정식으로 황위를 물려받은 제국의 주인인 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르페누스의 눈이 휘어졌다.

"물론이지요."

헤르만은 인자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그 아이가 카벨레누스의 비호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헤르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제르페누스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걸 알았음에도 그 사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전하께서는 그 아이의 존재를 모르셨을 텐데요."

"이제는 아닙니다."

"……어떻게 안 겁니까? 분명 잘 감추셨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특히나 배신자가 있다면 더더욱요."

그녀를 너무 믿으셨습니다. 제르페누스가 교활하게 웃었다.

"나탈리입니까?"

"정확히는 대신관의 실책이지요. 아랫사람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시고 귀한 정보를 흘리셨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형의 여자를 동생에게 붙이려고 하면서요. 제르페누스는 손목의 팔찌를 만졌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힘은 한정되어 있었다. 나탈리가 가진 치유의 힘 역시, 사용하면 할수록 점점 줄어들어 언제간 고갈되고 말 것이었다. 그 전에 대신관이 그녀를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속셈을 품은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나탈리는 미인인데다가 배덕감을 자극할 만한 배경도 있었다. 황제의 약혼자였던, 그리고 신의 종이었던 그녀를 정부로 들이고 싶어하는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차라리 제게 적당한 값을 받고 넘기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나탈리가 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의 종이 실험쥐가 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제가 그녀를 실험쥐로 만들겠습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요. 한 번 그녀를 버리셨던 분이, 그 일을 반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제르페누스의 입매가 삐딱해졌지만, 그는 이내 다시 표정을 되찾았다. 지금은 분노를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나탈리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보죠. 사실 저희에게 중요한 건 그 이야기 아닙니까."

"글쎄요."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카벨레누스는 예전보다 악착스러워졌을 겁니다.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찾으면 그만큼 더 애착이 가는 법이지 않습니까?"

제르페누스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보낸 군대를 쉽게 처리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카벨레누스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는 대신관을 옆에 두고 싸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카벨레누스는 꽤나 번거로운 상대입니다. 심지어 마법에 이어서, 대신관의 도움까지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속내가 빤히 보이면서도 모른 척 연기하는 헤르만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쉬운 건 이쪽이었다. 헤르만의 욕심을 자극해 카벨레누스와의 동맹을 흔들 필요가 있었다.

'물론, 둘이 붙어서 양쪽 다 무너져버리면 좋겠지만.'

과한 욕심을 부리기엔 헤르만은 멍청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교활한 늙은이와 자신은 꽤나 닮아 있었다.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 헤르만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제르페누스와 카벨레누스, 두 형제가 맞붙을 때 그 사이에서 이득을 볼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신께 한 번만 물어봐주십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신의 뜻을 지켜줄 수호자가 필요하지 않으시냐고요."

"신의 뜻을 지켜줄 수호자라……."

헤르만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8년 전, 얻지 못한 아이의 존재를 떠올리니 괜히 입안에 침이 고였다. 황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물에만 목을 메고 있었지만 아이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이가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맞다면 그토록 바라던 염원에도 닿을 수 있었다. 그걸 알기에 뻔히 보이는 속셈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께서만 괜찮으시다면, 미처 끝내지 못한 8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고 싶습니다."

"아이를 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신께서 원하신다면 말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누구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르페누스는 웃었고, 헤르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하나라도 손에 넣게 되면, 다음 하나도 손에 쥘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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