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8화 (8/97)

00008 8. 애칭을 정하자! =========================

귀중한 휴일을 도란이 녀석 때문에 이틀이나 날렸더니 도저히 일할 맛이 나질 않는다.

자고로 적당한 휴식은 일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원동력이거늘. 몸이 축 늘어져서는 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건지 키보드가 내 손을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나다.

물론 이틀간, 먹는 것 하나는 잘 먹었어도 도란이 녀석이랑 어울리다 보면 먹은 에너지가 어디로 빠졌나 싶을 만큼 정신이 없다 보니 그마저도 도로 아미타불. 살은 살대로 찌고, 몸은 몸대로 피곤하고, 정신은 정신대로 피폐하고.

아니, 에너지는 전부 소모했으니 살은 빠지려나?

도무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생각 삼매경인데, 그런 나를 질타하듯 스마트폰이 매섭게 울렸다. 대충 곁눈질로 확인해보니 “담당자님.” 이라고 메신저가 와 있기에 다급하게 메신저를 켰다.

드디어 작가님이 피드백을 주시는 건가!

하고 기대하기도 잠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슉 소리를 내며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기대였다. 물론, …얘도 작가는 맞긴 맞는데 왜 제 입에서는 한숨이 자꾸 나오는 거죠.

“왜, 작가 새끼야.”

“T.T 일하려는 내 맘도 모르고 너무햇, 너무햇.”

그러면서 어디서 빌려왔는지, 아이돌 굿즈를 착용하고서 광분하는 셀카를 올리는 도란이 녀석.

남은 일 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아이돌 덕질하는 걸 나한테 왜 보여줘. 솔직히 아까까지는 일에 집중을 안 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방금 집중하려고 했었는데!

나는 눈앞에 도란이가 있다고 상상하며, 분노의 타이핑을 했다. 내 정성스러운 육두문자에 질질 짜는 이모티콘으로 도배하던 녀석은 내가 차단한다고 엄포를 놓자, 그제야 다급하게 본론을 말한다.

“아니,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요새 우리 연애용 폰으로는 통 연락을 안 하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다. 대충 넘어간 소개팅 이후로 연애용 폰은 하루에 한번 근황 토크용으로 쓸 뿐이었다. ‘밥은 먹었어요?’나 ‘뭐해요?’같은.

그런 것만 3일 내내 반복하다 보니 이게 연애목적으로 만든 건지 생존확인목적으로 만든 건지 슬슬 헷갈리는 중이었다.

“응. 그거 그냥 생존확인용 봇 아니냐?”

“메이데이! 메이데이! 페이데이! 데이 바이 데이! 에브리 데이! 좋은데이! 이쏘 대령 응답하라!”

“미친놈아, 개소리 계속할 거면 그냥 무시한다.”

그랬더니 시끄러운 소리로 우는 이모티콘으로 도배하는 녀석. 일전에 이 이모티콘에 당한 적이 있어서 녀석과 메신저를 할 때면 무음으로 해놓는 나였다.

편집장님은 자초지종을 들으시곤 “하하, 작가님이 장난꾸러기이시긴 하셨죠.”라며 웃어넘겼지만, 그때 겪었던 주위의 따가운 시선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님 차단.”

“아아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누님! 엄마! 아가씨! 진짜 중요한 거란 말이야.”

“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시답지 않은 걸로 날 피곤하게 할지 벌써 귀찮아진다. 이 녀석의 머리에서 나온 건 경험상, 열에 아홉은 쓸모없고, 성가시고, 피곤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녀석은 요상하고 쓸데없는 발언으로 내 피곤을 끌어올렸다.

“우리 애칭 정하자.”

“네, 다음 차단 각.”

이런 귀찮은 일은 시도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조용히 차단을 누른 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즈니스로 엮인 사이니 일이 끝나면 풀겠지만. 젠장.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작가님의 원고를 수정하며, 이 문장이 문맥에 맞는 건가 고민하고 있는데 폰이 책상이 울릴 정도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잠시 당황하긴 했어도, 내 주변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딱 하나밖에 없다. 재빨리 폰을 열어 확인하니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가 이모티콘으로 도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자식이 하다 하다 다른 계정까지 이용하시겠다. 마찬가지로 곱게 차단을 누른 나는 폰을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다행히 휴게실 안에 사람이 없어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평소대로 소리를 질러댔다.

“야! 나 일하는 중이라고! 너는 놀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직장인의 삶은 그렇지 못하거든?”

“나도 웬만하면 방해 하지 말자 싶었는데 글이 한 자도 안 써지는 걸 어떻게 해!”

상식적으로 심각한 수준의 연애 고자가 어영부영 넘어간 소개팅 한 번 했다고 글이 써질 리가 없잖아…. 대체 이 녀석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인 거야.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땅이 꺼지라 토해낸 나는 일단 일 끝나고 얘기하자며 전화를 마무리 지었다.

물론, 곱게 마무리 지은 건 아니고 그놈의 애칭 정하자고 빽빽대는 걸 “알았다고!”라고 휴게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끊었다. 진짜 찰거머리보다 끈질긴 자식.

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내 스위트 홈의 문을 여는데 거실에 켜진 불이 나를 반겼다. 내가 불을 안 끄고 나갔나? 라는 생각보다 이 새끼 또 쳐들어왔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내 현실이 울적하다.

“란! 어디 있… 너 이게 다 뭐냐.”

눈 앞에 펼쳐진 건 도서관에서 빌려온 듯한 작명 책 한 무더기. 단언하는데 세상 천지에 애칭 정하려고 작명 책을 정독하는 건 얘밖에 없을 거다.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있던 도란이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태연히 “왔어?” 라고 말한다. 그래, 왔다. 왔는데… 대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녀석의 쓸데없음에 감탄을 넘어, 경악하는 나였다.

“있지, 작명하는데 사주를 보고 하는 케이스가 많다나 봐.”

“그걸 이제야 알았냐? 설마하니 나보고 몇 시에 태어났느냐, 그런 거 묻지 마라.”

“아니, 그거야 알고 있으니까 별 상관없고. 그것보다 사주에 맞는 이름으로 대충 리스트를 뽑아봤는데.”

“야 이 미친…. 애칭 정하자고 하더니 남의 이름을 강제로 개명할 준비를 하냐?”

내 정신건강을 위해 작명 책들을 현관으로 던져버린 나는, 정작 만악의 근원인 도란이 녀석을 던질 수 없는 착잡한 현실에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순식간에 작명 책이 현관으로 날아가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던 도란이는 이내 소파에서 뒹굴며 떼를 쓰기 시작한다.

“아! 애칭, 애칭, 애칭! 애칭 정할 거야! 란비 할 거야! 란비 거야!”

“나잇값 좀 해라 미친놈아! 시끄러우니까 그만해! 대체 그놈의 애칭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잔뜩 신경질을 내자 정좌로 고쳐 앉은 도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못 하겠어.”

“뭘 못해?”

“이소 씨라고 하는 거! 슬슬 한계라고! 못 하겠다고! 안 하던 격식 차리는 호칭 붙이려니 오글거린단 말이야!”

도란이도 오글거리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어? 얼굴에 철판이 아니라, 비브라늄판을 깔아놓은 녀석이라 그런 건 하나도 모를 줄 알았는데. 저 녀석도 오글거린다는 게 뭔지 안다는 게 새삼 충격인 나였다.

뭐, 확실히 나도 도란 씨라고 격식 차리며 말하려니 엄청 손발이 쪼그라드는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연애용 메신저도 단답형으로 보내거나, 애써 회피하거나, 최대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저기요.” 같은 지시대명사를 사용해 메신저를 보냈었다.

녀석도 마찬가지로 메신저가 뜸하기에 금세 싫증 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글거려서라니.

“그러니까 애칭으로 부르면 좀 덜할까 싶어서 정하자고 한 거라고.”

“있잖아, 란아.”

“응?”

“…너 웬일로 요새 생산적인 생각만 하냐?”

난 진심으로 감탄해서 한 말인데, 녀석은 도대체 그동안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었냐면서 씩씩댄다. 뭐긴 뭐야, 약도 듣질 않는 심각한 또라이지. 내 단호한 대답에 세월의 풍파를 모질게 겪은 노인처럼 폭삭 삭은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는 도란이다.

“어쨌든 그런 호칭 정하는 건 나도 찬성. 솔직히 나도 오글거려서 한계였어.”

“그러면 대충 인터넷에서 뒤져서 그럴듯한 걸로 고를까?”

도란이의 말에 찬성한 나는 도란이 노트북으로 인터넷 창에 커플 애칭을 검색해봤다. 문제는 종류는 엄청 다양하긴 한데, 차라리 존대를 붙이는 게 나을 것으로 보이는 애칭들만 수두룩했다.

자기, 여보, 달링 같은 식상한 호칭부터 시작해서 우리애기 같은 오글거리는 호칭이라든가, 알콩이 달콩이 같은 우리와 거리가 백만 광년 떨어진 호칭들까지.

그 모든 호칭을 지켜본 우리의 입에선 동시에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우웩.”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해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호칭을 보며 서로의 오그라든 손발을 펴주던 우리는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며 결론을 내렸다.

익숙하게 우리 집 냉장고에 걸려있는 앞치마를 입은 도란이가 오면서 사온 것인지 옆에 놓여있던 마트 비닐봉지들을 식탁 위에 올렸다.

“오늘은 내가 스파게티 요리사. 어떤 거 먹고 싶어, 이쏘?”

“크림. 베이컨 넣어서.”

생각도 않고 바로 튀어나온 내 말에 그럴 것 같았다며 대충 넘어가는 녀석. 아니,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은 건데? 잠시 발끈하긴 했지만, 그래도 받아먹는 입장이니 잠자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주방에서 풍겨오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중학생 때부터 아저씨랑 단둘이 살아와서 그런지 요리 실력만큼은 출중한 녀석이었다.

순간, 셰프가 되겠다며 유학을 떠난 오빠가 생각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순식간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우울의 늪에 진득하게 빠져 있던 나는 이내 도란이 녀석의 또라이 짓을 받아주는 것보다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여겨 애써 털고서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도란이 녀석이 냉장고 안을 보면서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뭐야! 토마토소스 사둔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안 사 왔는데 별로 안 남았잖아.”

“아, 며칠 전에 오므라이스 해 먹었을 때, 케찹 없어서 그냥 그거 썼는데.”

내 말에 불평이 쏙 들어간 도란이는 “그럼 로제파스타로 해야지.” 라며 메뉴를 급선회했다. 느끼한 걸 좋아하는 나와 달리 도란이는 크림 새우는 좋아하지만, 다른 크림이 들어가는 음식은 잘 먹지 않았다. 생크림 케이크라든가, 까르보나라 떡볶이 같은.

그래서 파스타 같은 걸 만들 때마다 프라이팬을 두 개를 쓴다. 자기 건 토마토, 내거는 크림.

능숙하게 양쪽 팬을 사용하던 도란이가 별안간 “아!”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혹시 다친 건가 싶어 놀라 다가가는데 다행히 다친 건 아닌지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 미친놈이 진짜 쓸데없이 사람 걱정시키고 있어.

내가 째려보는 걸 눈치챈 건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도란이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이쏘는 크림, 나는 로제. 어때?”

“…뭐, 스파게티? 아까 정한 거잖아.”

“아니, 그거 말고. 애칭 말이야.”

…그거 애칭이라기보다는 레스토랑 메뉴 고르는 느낌 아니냐.

잠시 태클을 걸고 싶긴 했지만, 귀찮기도 했고, 적어도 오글거리지는 않을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걸로 결정.” 이라고 말한 도란이는 파스타가 타겠다며 황급히 가스레인지로 다가갔다.

네, 아무쪼록 제 파스타가 무사하도록 잘 부탁합니다. 로제 씨.

============================ 작품 후기 ============================

최근 연애 시뮬레이션은 자주 올리지 못해 마왕의 남자 연재날에 같이 올립니다. :D

어쩌다 보니 마왕의 남자보다 분량이 많네요 ㅎㅎ; 재밌게 봐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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