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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7화 (7/97)
  • 00007 7. 처음 뵙겠습니다.  =========================

    어제는 온종일 악몽의 연속이더니, 그 여파 탓인지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그러게 왜 자기 전에 그 인간을 떠올려서. 어제 있었던 상황이랑 묘하게 짬뽕이 돼 꿈에서 오빠가 돌연히 나타나 가상연애를 하자고 조르는 꿈을 꿨다.

    으, 미쳤지. 미쳤어.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해가 중천이다. 악몽에 뒤척인 주제에 잠은 왜 이렇게 퍼질러 잔 것인지. 꿈에서라도 오빠가 보고 싶어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절대.

    어쨌거나 오늘은 꿀 같은 주말, 그것도 일주일의 마지막 휴일인 화창한 일요일.

    종일 소파와 한 몸이 될 준비를 하는데 소파 위에 덩그러니 있는 스마트폰 액정이 자꾸만 깜빡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폰의 존재에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도란이 녀석이 줬던 폰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며 확인했다.

    보니까 울고 있는 이모티콘이 메신저 알람으로 계속해서 뜨고 있다. 뭐지, 대체?

    부랴부랴 메신저를 확인해보니 다양한 종류의 우는 이모티콘이 화면을 빼곡하게 도배하고 있다. 이 미친놈이 진짜.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화면이었지만, 1이 사라진 걸 확인했는지 도배가 멈췄다.

    덕분에 내 역할이 첫 만남 전인 소개팅녀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도배 작작하라는 쌍욕을 날릴 뻔했다가 간신히 지울 수 있었다.

    얘가 대체 뭐하는 건가 싶어서 차근차근 살펴보니 “안 오세요?” 라는 문자가 눈에 띈다. 안 오다니? 잠시 생각하던 나는 자기 전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해뒀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다급하게 스크롤을 올렸다.

    “그럼 17일, 낮 12시에 ○○카페에서 만나요.”

    17일? 17일이 언제…. 슬슬 불길함이 싹텄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은 달아나버리고, 저절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맙소사. 오늘이 17일이었다. 게다가 현재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었다….

    나는 대체 왜 약속 시각을 같이 정해놓고 기억도 못 하고 있던 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던 거지….

    만일 이게 작가님과의 만남이었다면, 계약 따는 건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다.

    아무리 다른 거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지만, ‘약속은 칼같이 지킨다.’가 나름대로 철칙인데, 안 지킨 것도 모자라서 까먹고 있었다니. 아무리 바보 같은 가상연애와 관련된 약속이라지만, 자괴감이 몰려온다.

    날 버리고 간 오빠가 뭐라고, 어렸을 적부터 지켜왔던 철칙을 깨부술 정도로 혼란스러워하는 건지 한심하기도 하고.

    ***

    상황극에 맞춰 꾸미는 것보다 약속 시각보다 더 늦지 않는 게 먼저였다. 대충 씻고 립글로스만 바르고 뛰쳐나온 나는 카페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 약속장소가 우리가 평소에도 자주 가는 집 근처 카페라서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숨을 가다듬고는 습관처럼 구석 쪽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우리의 단골 자리에 있는 도란이 녀석. 심심한지 혼자 모히또를 시켜놓고 빨대로 숨을 내쉬어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보자마자 잔소리를 했겠지만, 어쩌다 보니 죄인의 입장. 입을 다물고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욥. 왔어? 정확히 세 시간 지각이네.”

    “…미안. 자다 깼더니 2시였어.”

    그럴 것 같았다며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는 도란이 녀석.

    나도 소개팅과 거리가 먼 내추럴한 차림이란 거 잘 아니까 그만 좀 훑어봐라! 그 와중에 비교되게끔 얘는 왜 이렇게 멀끔하게 입고 나온 거야. 아니, 평소에도 스타일에 신경 쓰는 놈이긴 하지만.

    따가운 시선에 애써 시선을 피하는데 도란이가 푸핫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있잖아. 내가 소개팅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은 없는데, 사부께서 몸소 안 좋은 예시를 시범으로 보여줬다는 건 알 거 같아.”

    “…아으.”

    평소 같으면 도란이의 놀림에 바로 반박을 했겠지만, 오늘은 내 잘못이 10할이라 석고대죄를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란이는 간만에 꼬리를 마는 내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놀리기 바쁘다.

    “괜찮아. 나름대로 개성 있는 스타일링이라고 생각해. 제자리를 잃어버리고 자유롭게 뻗은 앞머리가 꼭 학창시절 점심시간을 연상케 한달까. 설마하니 오늘 컨셉은 회춘?”

    “…1절만 해라.”

    “넵, 누님.”

    그러면서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녀석. 한참을 정리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진짜 엉망진창이긴 한가 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는지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도란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쏘, 너 빈속에 커피는 안마시잖아. 허니 브레드라도 시켜줄까?”

    “아니, 됐어. 나도 모히또 먹을래.”

    “오케이. 넌 라임이지?”

    도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하러 카운터로 향하는 도란이를 보는데 뭔가 찝찝하다. 이건 암만 생각해도 소개팅이 아니라 그냥 평소 때의 우리 같은데.

    …물론 내가 시작부터 말아먹긴 했지만.

    그래도 이왕 하기로 한 일이니 어영부영 넘길 수는 없지. 내 꼴이 이 모양이긴 하지만, 도란이가 오면 소개팅하는 것처럼 해보자고 말해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란이가 내 모히또를 들고 돌아왔다. 모히또를 한 모금 넘기니 아까 급하게 달려오면서 생겼던 갈증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크, 행복해.

    나는 자기 모히또의 얼음이 녹았다고 내 얼음을 약탈하는 도란이 녀석을 째려보며 상황극을 시도하자고 말했다. 분명 좋아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심드렁해 보인다.

    아니, 네가 연애해보고 싶다며?

    내가 쏘아붙이자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하는 도란이였다. 어째 모양새가 내가 바라서 이 웃기지도 않은 가상연애를 하는 것 같잖아. 시큰둥한 도란이의 태도에 잠시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몰입하려고 하는 모습에 불만을 삼켰다.

    도란이는 목소리를 큼큼하며 가다듬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처음 뵙겠습…푸큽.”

    진지함도 잠시, 이내 웃음이 터져버린 녀석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끅끅대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28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알고 지내는 사이에 처음 뵙겠다고 말하는 녀석을 보고 내 입꼬리도 씰룩 올라가긴 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내 윤택한 라이프를 위한 자금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녀석에게 연애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다.

    물론 내 평온한 삶을 위해서.

    내 가르침으로 인해 저 녀석이 연애 고자를 탈출해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잘 돼서 결혼까지 간다면! 나는 근 30년 만에 녀석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는 소리니까.

    웃느라 정신없는 도란이 녀석을 겨우 진정시키고서 상황극을 다시 시작했다.

    간신히 자기소개까지 성공했지만, 슬슬 한계였다. 도란이 녀석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아보겠다고 애쓰고 있고, 나 역시 오그라드는 손발을 어쩌지 못하고 몸부림치고 있다.

    나야, 이런 미친 짓은 잘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저건 미친 짓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아, 도저히 안 되겠다. 소개팅은 패스하자.”

    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도란이가 실컷 웃고는 포기선언을 했다. 포기선언이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했다.

    첫 단추부터 꼬이게 만들어버린 것 같은 죄책감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 성향에서 오는 사명감, 그리고 이 화창한 휴일에 바깥으로 뛰쳐나왔는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억울함이 겹쳐서인 듯하다.

    툴툴거리면서 불평하자, 잠시 생각하던 도란이가 말했다.

    “아니, 왜 게임도 튜토리얼은 스킵 하잖아? 이것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연애를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너는 튜토리얼부터 헤매는 심각한 게임치 수준이거든?”

    “괜찮아, 사부. 내가 의외로 몇 번 부딪히면 조작법을 금세 습득하는 타입…."

    어디서 나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녀석을 넌지시 째려봤다. 내 불신 가득한 시선에 잠시 고개를 돌려 회피하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가는 도란이다.

    “물론… 이쪽은 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이렇게 몰입 안 되는 걸 계속하는 것보다는 다른 걸 시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응, 그러네.”

    웬일로 제대로 된 논리로 말하는 도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 계속하다가는 소개팅이 아니라 ‘누가 웃음을 잘 참는가.’ 시합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내 긍정적인 대답에 만족스러운지 도란이는 씩 웃어 보였다.

    “그럼 오늘의 상황극은 여기서 종료. 음료도 시켰겠다, 수다나 떨다가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어, 글쎄. 조금 얼큰한 게 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넌?”

    “난 옆에서 케이크 먹는 것 보니까 빵 먹고 싶어지는데. 아, 빵 하니까 생각났다. 암만 생각해도 소개팅보단 우연한 만남 쪽이 재밌을 것 같은데, 역시 식빵을 살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냐? 미친놈아.”

    결국은 평소와 같은 대화를 나누며, 첫 상황극을 종료한 우리였다. 이래서 제대로 연애를 알려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싹텄지만, 태평한 녀석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점점 아무 대책이 없어진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작품 후기 ============================

    아슬아슬하게, 주 2회 연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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