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9. 사랑의 계기는 사소하다. =========================
오늘도 도란, 아니 로제 씨는 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변함없이 메신저로 나를 괴롭혔다. 그것도 두 폰 모두.
확실히 ‘도란 씨’보다는 조금 덜 오글거리기는 하는데, 애칭을 지정한 이후부터 이놈 자식이 시도 때도 없이 메신저를 보내고 있다. 차라리 오글거려서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래도 말은 잘 듣는 녀석이라, 업무시간에는 자중해달라는 내 부탁에, 일할 때는 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연락하지 않기는 한다.
문제는 내 업무시간을 지나치게 잘 파악하고 있는 녀석이라, 귀중한 휴식시간을 아낌없이 자신과의 시간으로 낭비하게 만드는 것.
며칠 간 군말하지 않고 받아줬더니 연애용 폰과 평상시 폰 양쪽으로 신명나게 연락하던 녀석에게 결국은 “너 진짜 매일 연락하면 죽여 버린다.”라며, 직장인에게 있어 휴식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 장황하고, 유창한 반협박에 가까운 설교에도 나날이 깡이 증가하는 도란이는 “흑흑, 자기 사랑이 식었어. 생크림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되어버렸다고. 예전으로 돌아와!” 라며 썩은 아재 개그를 날렸다.
“이번 주 주말에 데이트 안 해준다.”
마지막 경고에 격일로 연락하겠다며 빠른 인사와 함께 메신저를 보내지 않는 도란이다. 덕분에 나는 녀석과 웃기지도 않는 가상연애를 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직장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아, 집중 안 돼.”
연락이 오지 않는 건 좋은데, 나도 모르게 자꾸 양쪽 폰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망할. 암만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고작 며칠 됐다고 이러는지. 이래서야 기껏 얻은 휴식의 보람이 없는 거잖아.
정신 차리자며 볼을 가볍게 때린 나는 연애용 폰은 가방 안에 곱게 집어넣은 뒤, 컴퓨터 화면에 집중했다. 며칠 전부터 실랑이하던 작가님의 원고를 보며, 좀 더 매끄럽게 갈 수는 없나 고민하는데 폰이 진동했다.
“뭐지, 도란인가?”
다른 작가님들도 많고, 인쇄소도 있고, 연락 올 곳은 많은데, 왜 이 녀석밖에 안 떠오르는 건지. 내가 얼마나 녀석에게 시달렸으면 이럴까 싶어 착잡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액정을 확인해보니 도란이가 아니라 귀여워 마지않는 후배, 다혜다.
준또라이, 아니 성준이와 결혼준비에 한창인 다혜가, 청첩장 샘플 중에 어떤 디자인이 좋은지 상의하고 싶어서 나한테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귀찮은 일에 말려드는 건 극구 사양이지만, 천사 같은 후배 다혜라면 예외였다.
일이 끝나면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해놓고는 조금이라도 일찍 끝내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카페에 갔더니 테이블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고민하고 있는 다혜가 보인다. 다혜의 이름을 부르니 환하게 웃으며 “언니!” 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윽, 귀여워. 심장에 해로워. 아무리 생각해도 성준이한테 주기에는 다혜가 너무 아깝다. 내가 남자였으면 진작 채갔을 텐데!
자리에 앉았더니 청첩장 디자인 샘플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디자인부터 시작해, 누구의 발상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은 또라이스러운 디자인까지. 한 번에 봐도 누구 작품인지 알 것 같다.
도란이 녀석, 남의 결혼식까지 고춧가루를 뿌리는 재주가 있을 줄은. 나는 청첩장 샘플을 힐끔 쳐다보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성준이 녀석 결혼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 같아.”
몇 주 전에 이렇게 중얼거리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런 미친 디자인의 청첩장 샘플을 제공한 건, 도움이 아니라 똥을 선물한 거라고 친절히 말해줘야지.
다혜와 청첩장 샘플을 보며 한참을 상의한 끝에 후보가 3개로 좁혀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도란이가 만든 청첩장도 최종 후보에 들어가 있는 상태다. 존중합니다, 취향 해드릴게요. 나는 도란이의 청첩장을 보면서 배시시 웃는 다혜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가만 보면 다혜도 취향이 엄청 마니악하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성준이랑 결혼까지 가는 거지.
나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다혜와 성준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물론, 먼저 좋아한 건 당연히 성준이 쪽이었다. 다혜를 보고 첫눈에 반한 성준이는 절대 조언을 받으면 안 되는 도 모 씨의 가르침을 받아 매일 대시하는 게 일상이었다.
주변인들이 보면 안쓰러움에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다혜에게 집적대지 못하게 하는 건 성공하긴 해서, 아무도 다혜에게 고백하지는 못했다. 성준이 말로는 자기가 다혜를 지킨 거라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거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지금은 닭털 풀풀 날리는 커플이지만, 고교 시절 때는 성준이가 매번 대시를 해도 거절하던 다혜였다. 연애를 시작한 건 성준이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몇 개월이 지난 이후였다.
다른 학교인데도 별안간 우리 과실에 손잡고 나타나서는 “우리 사귀어.” 라고 고백했던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문득 그렇게 거절하더니 몇 년이 지나서야 받아준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긴 하지만, 보통 그 정도로 대시를 받으면 상대에게 질리는 경우가 많다. 다혜와 성준이는 사귀기 전에도 다행히 오빠 동생 하며 사이가 좋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갈 확률은 제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혜야, 성준이랑은 대체 왜 사귀게 된 거야?”
“응? 좋아하니까 사귀지.”
“아니, 내 말은 사귀게 된 계기가 뭐냐고.”
잠시 생각하던 다혜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애정이 듬뿍 담긴 웃음이었다. 생각하는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웃음. 카페모카를 홀짝이던 다혜는 사귀기로 마음먹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입대하기 전부터 나한테 좋아한다느니, 했던 말을 한 번도 안 했잖아.”
“응, 그랬지. 아예 언급을 안 하거나 물어도 됐다고 대답하고는 설렁설렁 넘어갔었지.”
그렇게 좋다면서 들이댈 때는 언제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오자 다혜에게 들이대는 것도 쏙 들어간 성준이는, 그때부터 아이돌 덕질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수업이 일찍 마치는 날이면, 다혜네 학원으로 놀러 가는 게 일상이었던 녀석이 어느 순간부터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뭘 하는지 다혜에게 매일 묻던 녀석이, 연락하는 것도 눈에 띌 정도로 줄었었다. 다혜가 학원에서 공부로 인해 늦게 귀가할 때마다, 집까지 바래다주던 것도 거의 하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으면 도란이에게 부탁해 다혜를 바래다주라고 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성준이의 태도에 다혜는 자기가 성준이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냐며 내게 울면서 토로했었다. 그다음 날, 공강이었던 내가 성준이네 재수학원으로 쳐들어가 죽으라고 팼음에도 왜 그랬는지 입도 벙긋 안 하던 성준이였다.
“군대 가서 내가 연락하는 것도 싫어하고, 도란 오빠나 언니가 면회 가는 건 좋아해 놓고, 나보고는 오지 말라고 하고…. 지금도 오빠한테 그걸로 놀리기는 하지만, 그땐 진짜 서운했거든.”
“응, 다혜 너 술 취해서는 성준이 다시는 안 볼 거라면서 우리 둘한테 진상 부렸잖아.”
내가 놀리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왜 그러냐고 나를 가볍게 때리는 다혜다. 으읔, 진짜 귀여워. 다혜가 내 동생이었으면 내가 업어 키웠다 진짜.
“그래서 오빠가 전역했을 때도 왠지 좀… 오빠한테 서운해서 연락을 안 했어.”
“서운 할 만했지. 네 안부는 묻지도 않고, 휴가 오면 지가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보러 돌아다니고.”
“응, 그래서 그러면 안 되지만, 그때 그 아이돌 왠지 엄청 미웠어. 나는 오빠랑 그렇게 연락이 끊기나보다 했었거든.”
다혜가 머그잔을 매만지며 아련한 눈빛으로 잠시 사색에 잠겼다. 슬픔과 기쁨이 섞인 오묘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웃음 지은 다혜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어느 날, 주말이었는데 갑자기 열도 나고 엄청 아픈 거야.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았는데,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너무 아팠어. 그래서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웃기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성준 오빠더라.”
“그래서 성준이한테 전화했었어?”
“…응. 그냥 그때는 성준 오빠 말고는 아무도 안 떠올랐어. 자취생이었으니 같은 빌라 사는 동기한테 전화했으면 금방이었을 텐데. 바보 같지.”
쑥스러운지 헤헤거리며 웃는 다혜가 마냥 귀여워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큭. 다혜는 청첩장에 적힌 성준이의 이름을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오빠, 엄청 놀란 눈치였어. 그런데도 자기가 금방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어떻게든 날 안심시키려고 하더라. 근데 웃긴 건 정작 먼저 온 건 자기가 아니라 도란 오빠였어.”
“…도란이?”
이 인간은 대체 왜 남의 연애사에서 빠지지를 않는 거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자꾸만 튀어나온다. 물론, 성준이랑 도란이가 지금도 주말마다 어울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임을 알기에 어쩌면 당연하다 싶기는 하지만.
“응, 성준 오빠가 부탁해서 왔다면서 나를 병원까지 데리고 가줬어. 성준 오빠는 …내가 진료받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등장했었지.”
“…걔는 금방 가겠다고 해놓고 뭘 한 거야.”
“나도 그 생각이 조금 들긴 했었는데, 병원 안으로 들어오는 오빠 모습 보니까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갔어.”
“어땠는데?”
내 물음에 그때를 회상하던 다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궁금증이 배로 증폭된 나였다. 내가 재촉하자 다혜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는 말했다.
“바닥이 뜯긴 아이돌 굿즈 쇼핑백을 어깨에 메고서 뛰어들어오는데, 어디서 넘어진 건지 청바지에는 구멍이 뚫려있고, 턱이랑 무릎에는 피가 맺혀있더라. 내가 그 모습 보고 놀라서 왜 그렇게 됐냐고 묻는데도, 성준 오빠는 나 괜찮은 거냐고 도란 오빠 붙잡고 묻느라 바쁘고.”
“걔가 그랬어?”
문득 성준이 턱에 있는 흉터가 떠올랐다. 그게 그때 생긴 상처구나, 나는 또 술 처먹고 싸돌아다니다 엎어진 줄 알았지. 멋대로 넘겨짚은 거에 미안함을 느꼈다.
“응, 도란 오빠가 나 괜찮다고 하니까 그때야 안심한 건지 나 붙잡고는 울더라. 한참을 울고 나서야 자기 턱에 상처가 났는지 알아챘어. …몇 바늘을 꿰맸었지.”
“…그래서 그때부터 사귀기로 마음먹은 거야?”
“아니, 훨씬 전부터.”
다혜의 말에 마시던 레모네이드를 도로 뱉을 정도로 놀란 나였다. 헉, 대체? 언제부터? 내가 어깨를 붙잡고 묻자 고교 시절 때부터라고 대답하는 다혜.
…와, 진짜 쇼크다. 입이 저절로 떡하니 벌어졌다.
“근데 좀 망설여졌어. 정말 좋은 오빠인데, 잘못 틀어져서 헤어져 버리면 소중한 인연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까 확신이 들더라.”
“무슨 확신?”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은 평생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는 다혜는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 작품 후기 ============================
아슬아슬하게 5분 전에 세이프!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예상한 것보다 분량이 많아져버려서 ㅠㅠㅠ!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