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조옥언은 서 대인의 책망에 어리둥절했다.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 아들이 대인의 따님과 정혼이라도 하였습니까? 만약 그리했다면 그동안 제가 며느리를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을 까닭이 없지요.”
종3품 서 대인의 여식은 조옥언 또한 탐내던 며느릿감이었다. 그러나 장신성이 먼저 장서양의 짝으로 맺은 탓에 포기했었다.
조옥언의 말에 서 대인이 길길이 날뛰었다.
“조 부인, 해도 너무하십니다! 과거 좌상께서 친히 소인과 정혼을 맺었습니다. 부인께서 이를 몰랐다고 하진 마십시오!”
서 대인과 한참동안 옥신각신하며 결론을 내지 못하던 조옥언은 결국 사람을 시켜 사건의 시초인 장신성을 불러오라 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장신성의 입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서 대인은 분노에 치를 떨며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 버렸다.
장신성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때만 해도 조옥언과 이혼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의 부하였던 서 대인은 현재 요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장신성은 최근 그에 기대어 겨우 관직을 이어 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혼사는커녕 그에게 원한을 산 것이다.
서 대인이 노기등등하여 자리를 떠난 뒤, 장신성은 이 기회를 틈타 어렵사리 만난 조옥언에게 허둥지둥 충성을 맹세했다. 분노한 조옥언은 두말할 것 없이 하인을 시켜 당장 그를 끌어냈다.
조옥언은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장신성은 자신이 서전이의 혼처를 찾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의 한 마디 없이 자신이 눈여겨보았던 서 씨 가문의 딸을 빼앗아간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한 것이다.
그녀는 역시 장신성을 내친 건 최고의 결정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그간 그에게 너무 관대하게 군 것을 후회했다. 장신성은 반드시 서전이의 기회를 빼앗아간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옥언은 장신성을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간 조옥언에게 손해를 입힌 만큼 은자를 배상해야 할 것이다.
조옥언은 이미 협판 대학사 가문의 적녀에게 혼담을 건넨 상태였다. 비록 다소 영민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듣는 아가씨였으나 이제와 서 씨 가문과 다시 혼담을 주고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도저도 할 수 없게 된 조옥언은 즉시 사람을 시켜 관아에 장신성을 고발했다. 그녀는 그동안 그에게 지불했던 혼인 생활 이외의 비용을 한 달 이내로 돌려줄 것을 청구했다.
순식간에 엄동설한의 계절이 찾아왔다. 조옥언과 장신성의 갈등은 나날이 깊어져 연경 일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이는 부인들의 메마른 생활에 적잖은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 * *
존귀한 이들이 모여 있는 연경의 부촌 중에서도 권 씨 가문의 저택은 언제나 평온하고 위엄이 넘쳤다.
권 노부인 역시 최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풍문을 전해 들은 터였다. 그녀는 할 일이 없을 때면 며느리들과 함께 마작을 두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 부인과 장신성의 일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장신성이 또 첩실을 야단치며 욕을 하지는 않았는지, 요즘에는 또 어떤 우스운 소문이 퍼졌는지에 관해 물었다.
연아(研儿, 권서함의 서출 형제의 아내)가 마지못해 웃으며 대꾸했다.
“그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조 부인의 아이들만 불쌍하게 되었지요. 서열 아가씨가 미리 정혼을 해서 다행입니다.”
막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올리려던 권서함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하녀는 여전히 휘장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방 안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 아가씨에 관한 소문도 만만치 않지. 누군가 억지로 막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조 씨 집안은 더욱 시끄러웠을 게야.”
말을 이어받은 권 노부인의 손아랫동서 역시 신분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것 또한 존귀한 신분 덕분이었다.
그녀의 말에 권 노부인의 눈빛이 엄숙하게 빛났다.
“함부로 말하지 말게.”
말을 마친 권 노부인이 연아 쪽을 향해 힐끗 눈짓을 했다. 나이 어린 며느리를 생각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눈치 빠른 그녀가 즉시 답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조옥언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걸 누가 모르겠어요. 만일 충왕부에서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쯤 온 연경에서 그 아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려고 난리였을 텐데 말이에요.”
연아는 서자의 부인으로, 어른들이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내용은 당연히 못 들은 척해야 했다. 그녀가 맞장구를 치며 답했다.
“맞습니다. 서열 아가씨는 정말 아름다워서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가지요. 일전에 서함 도련님께 어떤 배필이 어울릴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서열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전 만약 세자가 없었더라면 서열 아가씨가 서함 도련님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연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순간 그녀는 당황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하지만… 그냥 잡담을 한 것뿐인데…….’
불쾌해 하던 권 노부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연아야, 앞으로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말거라. 우리 권 씨 가문이 어떤 가문이더냐. 우리 집안 여인이라면 무릇 출신이나 용모는 좀 부족하더라도 절대 명성과 평판이 좋지 못해서는 아니 된다. 조옥언의 딸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아이지. 과거 여 씨 집안의 딸을 때린 건 차치하더라도 문회에서 그런 춤을 췄다는 건 정말이지…….”
잠시 말을 멈춘 권 노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패를 섞거라. 속 시끄러운 이야기는 그만 하자.”
그녀는 근본적으로 장서열이 단정하지 않은 아이라 생각했으나 굳이 권 씨 가문 사람도 아닌 어린 아가씨를 비뚤어진 심보로 헐뜯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사랑하는 아들과 관련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권서함은 권 노부인이 늘그막에 낳은 유일한 아들이자 가문의 적자였다.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여인도 좀처럼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연아가 장서열을 아들과 연결 지었으니 권 노부인이 정색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설령 황실 외척의 체통을 잃는 행동이라 해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처음 권서함의 혼사가 거론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권 노부인은 모든 혼담을 거절해 왔다. 권서함이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권 노부인 쪽에서 먼저 여인들의 단점을 걸고 넘어졌다.
연경에서 가장 중매 서기 어려운 남자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장서전, 나머지 한 명은 권서함이었다.
전자의 경우 아무리 신붓감을 찾아도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는 것에 반해, 후자는 여자의 사주팔자가 권서함과 아무리 잘 맞아도 시어머니를 만족시키는 여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머니의 말에 권서함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쓴웃음을 지은 그가 하녀에게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올 테니 내가 왔다갔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말을 마친 권서함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 오후, 서 씨 가문과의 파혼이 장 씨 가문에 전해졌다. 서 대인은 장신성이 보냈던 정혼 예물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서 씨 가문 하인들은 가져온 물건을 거의 박살내다시피 던져 놓고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장신성이 명예를 얻으려고 사람을 속였다!”
“역시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 하찮은 서자 따위가 감히 적녀를 빼앗으려 하다니. 개돼지만도 못하군!”
“우리 서 씨 가문을 기만해도 유분수지. 적자인 장서전이래도 마뜩찮을 판에 서자인 장서양이 다 뭐야?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 게 뭐야!”
마지막으로 그들은 서 대인이 사기죄로 장신성을 관아에 고발할 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들은 장 씨 가문의 체면은 아랑곳없이 집안의 뜰을 가로 막은 채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 때리겠다고 험한 욕을 퍼부었다.
서 씨 가문의 아가씨는 이번 일로 목을 매달기 직전까지 간 상태였다. 이에 이성을 잃은 서 대인은 그와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부리는 것으로 장신성의 지위가 과거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부하가 칼을 겨누며 하극상을 일으킬 정도로 장신성의 관직 생활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서 대인이 이토록 소동을 벌인 것은 딸이 입은 피해와 더불어 이미 장신성에게 희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 대인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적자를 준대도 탐탁지 않았던 혼사인데 심지어 그마저도 사기였다니!
서 대인은 대놓고 장신성을 망신 주기 시작했다. 장신성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소인배이며,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을 뿐더러 조 부인과 조국공부 덕에 출세한 주제에 감히 서출 자식만 싸고돌다 일을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서 대인은 이런 자는 분명 인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장신성을 헐뜯었다.
저택에 틀어박힌 장신성은 감히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원 씨라도 감히 서 대인의 심기를 건들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편보다 더욱 화가 난 서 부인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장 씨 가문을 찾아와 끝장을 보겠다고 했다고 한다. 멀쩡한 딸이 하루아침에 파혼을 당했고, 사람들은 서 씨 가문이 상사인 장신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딸을 팔았다고 수군거렸다. 서 부인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 억울함을 대체 누구에게 토로해야 한단 말인가. 서 부인은 장서전의 인품을 고려하여 딸과 정혼을 맺어 주려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애초에 서 씨 가문에서 장신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멀쩡한 딸을 모자란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한 거라며 또 수군거렸다.
모든 화살은 장신성에게로 향했다. 서 씨 가문 입장에서 사건의 원흉인 장신성은 철천지원수였다. 딸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진 마당에 원 없이 분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 모두가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두 주먹을 꽉 쥔 장서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부친을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혼사입니까?”
조금 전 조옥언에게 맞고 쫓겨나는 바람에 얼굴에 상처를 입은 장신성은 사랑하는 아들까지 분노에 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그게 무슨 태도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서 대인에게 원한을 샀겠느냐? 그런데 넌 이 아비에게 고마워하지도 않는구나! 당장 내 눈앞에서 썩 꺼지거라!”
그는 이제 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할 판이었다. 물론 장서양은 학문에 재능이 있었지만 그건 기껏해야 아는 게 많은 수준에 불과했다. 가문을 빛낼 수도, 아버지의 관직을 높여 주거나 부자로 만들어 줄 수도 없는 장서양은 결국 장서전보다도 쓸모없는 자식이었다.
“나가라니까! 난 네게 빚진 게 없으니 감히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라!”
장신성의 불호령에 장서양의 얼굴이 귀밑까지 새빨개졌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신랄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을 유일하게 아껴 주던 아버지였다. 그는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아버지에게 경악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