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장서양은 이제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서자라는 신분이 또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는 이제껏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본 서 씨 가문에서 기꺼이 사위에게 투자를 하려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사위는 서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는 바보같이 서 씨 가문의 힘에 기대어 계속 학업을 이어 나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토록 우스운 생각일 줄이야.
침실로 뛰어 들어간 장서양은 서 씨 아가씨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선물을 모두 바닥에 던져 깨뜨려 버렸다. 온통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는 독기로 번뜩였다.
‘다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반드시 복수해 줄 테다! 두고 보자. 날 무시한 사람은 기필코 사나운 말로를 맞이할 것이다!’
* * *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한겨울 눈은 사람 발목 높이까지 쌓여 올라왔다. 연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남부 전쟁터에서는 봉화가 끊이지 않았다. 몇 차례의 패배 끝에 드디어 근소한 차이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아직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출병한 충왕은 거듭되던 패전의 벽을 깨고 조금씩 승리를 거두었다.
동남 세력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중앙에서 계속해 그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고수하자 차츰 기세를 잃기 시작했다. 주변의 변경 세력은 덩달아 황제가 자신들도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한편 호시탐탐 땅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세력은 역심을 품은 대장군과 연합하여 동남 세력에 지원을 보내는 한편, 연경에 사절을 보내 황실의 동향을 염탐했다.
전쟁이 교착 상황에 빠진 상황에서 충왕과 세자는 연경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격렬한 전투가 치러지는 전장에서 힘이 되는 건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여인과 패업을 이루고자 하는 사내대장부의 야망뿐이었다.
서풍엽은 연경으로 서신을 부쳤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장서열에게 용서를 구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먼 곳에 있는 연인에게 편지를 쓸 때면 그는 피 묻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는 한 남자가 되었다.
이어지는 장서열의 서신은 매우 얇았지만 사랑스러운 여인의 투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는 서신을 통해 심술궂게 장난을 치기도, 연경 소녀들 사이에 도는 사소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가끔은 두 사람의 혼사를 내팽개친 서풍엽을 책망하기도, 자신을 아내로 맞이할 마음이 없다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진심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짙은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잠시 혼사가 미뤄지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전쟁의 승기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두 사람의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 * *
풍윤 39년, 봄이 돌아왔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별안간 변경에 대한 황실의 태도가 강경하게 변했다. 해가 바뀌며 달라진 황실의 태도는 곧 대대적으로 ‘변방 토벌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 변경의 8대 세력 중 6대 세력이 반란에 참전하며 거의 평정시켜 놓았던 동남의 정세를 깨뜨려 놓았다. 대주국은 장서열의 전생보다 더욱 이르게 ‘육세지란(六势之乱, 여섯 개의 세력이 일으키는 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장서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염락이 전생보다 무려 이 년이나 앞당겨 변경에서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장서열이 서풍엽이 보낸 서신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피가 흐르는 전쟁의 참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육세지란에 대해 아는 바는 많지 않았다. 당시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빠져 아들을 낳으려 노력하고 비빈들을 상대하느라 전쟁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구염락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해 대치 국면을 무너뜨리고 난국을 타개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시기 장서열은 다른 비빈과 마찬가지로 구염락에게 온 마음을 다하느라 전쟁도, 전술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번 전쟁이 어떻게 해결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그녀는 서신을 통해 그저 당신은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큰소리를 치며 서풍엽을 위로했다.
자신이 쓴 암담한 서신을 읽으며 장서열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서풍엽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격앙된 말투로 전쟁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는 어떻게든 행간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관심만을 골라 읽었다. 그리고는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서풍엽을 기다렸다.
딸의 모습에 서풍엽의 서신이 도착했다는 것을 안 조옥언이 문가에 선 채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충왕비도 그만큼 많은 서신은 받지 못했을 게다. 답신을 보낼 때 어미 대신 네 오라버니의 안부를 묻는 것도 잊지 말고. 참, 네가 주방에 부탁한 탕이 다 끓었다던데 설마 또 충왕비에게 갖다 주려는 게야?”
장서열이 순간 얼른 조옥언의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어머니 것도 함께 끓이라 했어요.”
조옥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딸의 반짝이는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아름다웠다.
“됐다. 충왕께서 전투 중에 부상을 입었다고 하니 네가 자주 찾아가서 충왕비를 위로하는 게 당연하지. 내 대신 안부를 전해 주고 시간 날 때 한번 들르라고 하거라.”
앞으로 다가간 장서열이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역시 어머니밖에 없어요.”
딸의 애교에 조옥언의 눈가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과연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딸아이의 혼사가 언제까지 연기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이들의 혼사에 변수가 생길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우수한 인재 서풍엽과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아름다운 규수 장서열의 혼사는 황제가 황위를 찬탈당하는 수준의 변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듯 보였다.
장서열을 며느리로 맞이하려는 황제의 집념은 전쟁이 장기화되며 어느덧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연경 사람들의 새로운 화젯거리는 온통 전쟁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무관의 정치 참여는 이제 문관(문장文将)과의 권력 다툼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변경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연경의 가문들은 집집마다 남자들을 전쟁터에 보내야 했다. 이들은 가문의 사내들이 한시 바삐 말단관직이라도 얻기를 희망했다.
조 씨 가문과 충왕부의 사내들은 이미 치열한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두 가문은 이 시기 오히려 연경에서 가장 조용한 가문이 되었다. 조옥언은 심란하다는 이유로 모든 방문객을 거절했고, 충왕비는 남편과 아들을 걱정하며 종일 불경을 외웠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조 부인과 충왕비를 통해 변경에서 말단관직이나마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순식간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었다. 시끌벅적한 연경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한여름이 되자 사람들은 다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기 시작했다. 변경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불길은 황궁까지 미치지 못했다. 마치 하루아침에 유유자적한 휴양지가 된 듯 모든 이들이 나태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 백성들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지만, 이들에게서 좀처럼 전장에서 죽은 영혼을 기리는 점잖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안일한 생활에 빠져 전쟁 지역을 조롱하고 자신의 부귀를 과시했다. 파렴치한 이들은 재물을 자랑하며 배고픈 백성들을 더욱 분노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안일한 정책은 부패한 사회의 단면을 드러냈다. 오래도록 전쟁을 비껴간 사람들은 전쟁이 내포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들은 오히려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인신매매와 성 착취 등 범죄를 일삼았다. 권력이 재물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부패와 향락을 일삼는 지배층은 백성들 사이에 커다랗게 자리한 어둠을 방치했다. 세상일에 관심 없는 조옥언조차 지금의 세태에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마찬가지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장서열 역시 어제 벌어진 일로 인해 치를 떨었다. 전날 그녀는 새로 제작한 어머니의 여름옷을 찾으러 외출했다가 벌건 대낮에 두 남자가 어린 소녀를 납치하려는 장면을 목격했다.
오만방자한 두 남자는 소녀를 사이에 두고 내기를 벌이며 쓸데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물건을 흥정하듯 이긴 사람에게 소녀를 넘기겠다고 소리쳤다.
거리의 행인들은 못 본 척 빠르게 길을 지나갔다. 혹여라도 불똥이 튈까 두려운 듯했다.
장서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곳이 정말 자신이 알던 그 연경이 맞단 말인가. 그녀가 아는 연경은 인심이 후하고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황실의 성지였다. 비록 권세를 등에 업은 거만한 사람들이 있고 사치와 향락에 젖은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이토록 극악무도한 범죄를 방관하고 백주 대낮에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곳은 아니었다.
장서열이 발걸음을 돌려 소녀에게 가려 할 때였다. 그녀의 정면으로 우아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먹빛 비단 휘장이 드리워진 붉은 마차에는 모서리마다 옥으로 만든 수술이 매달려 있었다. 꼭대기에는 여덟 마리의 옥 두꺼비가 엎드려 있을 뿐 그 외의 다른 장식은 없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가운데 갑작스런 마차의 등장은 마치 여름 연꽃의 맑은 향기처럼 마음을 편안케 했다. 장서열은 마차에 작게 표시된 ‘권(权)’ 자를 바라보며 절로 반듯한 얼굴의 한 남자를 떠올렸다.
마차의 휘장이 걷어지자 예상대로 권서함이 나타났다. 일 년 전보다 훌쩍 키가 큰 그는 하늘색 비단 장포를 걸친 채 짙은 남색 띠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매와 또렷한 이목구비는 여유롭고 차분한 품성을 돋보이게 했다.
권서함 역시 장서열을 발견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부끄럽게 미소 지었다.
장서열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권서함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확실히 그는 책임감이 강했다. 건달들이 만행을 저지르는 게 딱히 그의 탓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장서열은 곧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며 얼른 소녀를 도와주라고 눈짓했다. 보라색 치마에 허리띠를 높이 묶고 얇은 비단을 걸친 그녀는 기품이 넘치면서도 아름다웠다.
권서함은 장서열의 눈빛에 왠지 감동을 받았다. 그녀가 나타나자 권서함은 갑자기 태양이 덥게 느껴지지도, 거리도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옅은 미소로 우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