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63)화 (163/449)

제163화

장서해는 평소 집안에서조차 존재감이 없던 하찮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가 감히 장서목의 자리를 빼앗고 군학(军学)을 배우게 된 것이다.

하루 종일 분노가 쌓여 있던 장서양은 그대로 장서목을 데리고 다시 관학에 들어가 그가 내쫓긴 이유를 추궁했다. 입구를 지키던 수위는 어린 도련님이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난건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이유를 알려주었다.

“국자감과 군학(军学)은 종5품 이상 관원의 적출 자제만 들어갈 수 있는 학당이오. 서출인 서목이 이제까지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건 다 장 씨 가문에서… 아니지, 조 씨 가문에서 어마어마한 은자를 내 왔기 때문이오. 헌데 이제 은자가 끊겼으니 서목이는 당연히 떠나야지요. 서해는 정실부인의 아들이 되었으니 자격이 충분하고요.”

아연실색한 장서양과 장서목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장서영 역시 제1교방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왔다.

제1교방은 소문에 민감한 곳이었다. 장 씨 가문의 파산은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그간 사람들이 장서영에게 잘해 준 건 그녀의 뒤에 조옥언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조 부인이 서출을 박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세 남매는 그 밑에서 평생 거칠 것 없이 뜻대로 살아 왔다.

그러나 조옥언은 장신성과 헤어졌고, 장신성 역시 관직에서 내쫓길 상황이 된 마당에 이제 장서영은 어디를 가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장서영의 스승은 그녀의 뛰어난 실력과 관계없이 계속해 제1교방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선 상당한 양의 은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선물로 준 거문고를 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장서양을 발견한 장서영이 그의 품에 뛰어들어 울었다. 사실 거문고를 돌려달라는 마지막 말은 그녀의 스승이 아니라 그 곁에서 가장 총애 받는 대사제(大师姐)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거문고는 이미 전당포에 저당 잡혀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이를 되찾아올 은자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는 제1교방에서 거문고를 배울 수 없었다.

장서영이 흐느껴 우는 모습은 매우 구슬프고 애처로웠다. 장서양과 장서목은 누이동생을 위로하는 것 외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들은 무력했고,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었다.

훌쩍이며 고개를 든 장서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장서양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아버지와 우리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래요. 조 부인이 우리를 쫓아낸 건 잘한 일이라고요. 어째서죠? 그 저택은 원래 좌상부이고 우리 집인데 왜 사람들은 우리에게 배은망덕하다고 하는 거예요?”

장서영은 배은망덕하다는 말을 듣고도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장서열을 이기려 들었다는 것을 한사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속으로만 생각한 것이기에 결코 다른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절대로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 불쌍하게 울기 시작한 장서영의 눈물이 장서양의 옷깃을 흠뻑 적셨다. 가슴팍이 차가워지자 장서양이 순간 황급히 누이동생을 밀어냈다. 섭섭해 하는 누이동생의 표정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안아줄 수 없었다. 지금 입은 옷은 이제 그가 가진 유일한 비단옷이었다.

장서양은 그제야 후회했다. 사실 조 부인의 얼굴은 그렇게 밉살스럽지 않았고 장서전의 백치 같은 모습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했다. 심지어 장서열의 오만방자한 모습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크게 인심을 써서 조 부인과 그의 자녀들을 너그럽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 * *

사흘 후, 충왕부 앞은 수레와 말, 그리고 연경의 상공을 뒤덮은 깃발의 기세로 가득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충왕부의 연기는 천 리 밖까지 퍼져 나갔다.

배웅하는 인파가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황제의 전송회가 끝난 후, 병사들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의 송별회가 차례로 이어졌다.

호기로운 말투로 용감하게 싸우고 돌아오라며 용기를 북돋워 주는 부모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는 아내, 그리고 깜찍한 눈을 깜빡이는 천진난만한 아이까지 인파는 끝이 없었다.

인산인해 속에서 조용한 곳으로 장서열을 끌고 간 서풍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고개 들어도 돼. 정말 보지 않을 거야? 비웃는 사람 없으니까 어서 고개 들어.”

장서열이 즉시 서풍엽을 노려보았다.

“뭐라고요?”

서풍엽이 웃음 띤 얼굴로 항복했다.

“알았어. 아무 말 안 할게.”

부드럽게 손을 뻗은 그가 그녀의 귓가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혼례일이 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올게. 사람들과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고 외출은 자제해. 이미 내가 폐하를 찾아뵈었으니 더는 널 난처하게 하지 않으실 거야.”

고개를 끄떡인 장서열이 손을 뻗어 서풍엽의 옷자락을 만져 주며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부디 조심해요. 만일 위험에 처하면… 정 안 되겠으면 혼자라도 꼭 도망쳐요.”

서풍엽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서열도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농담인데 뭘 그렇게 웃어요! 잘 들어요. 혹시라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됐죠? 나도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요.”

그 말에 서풍엽은 왠지 마음이 아팠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장서열을 와락 껴안았다.

“바보야. 걱정하지 마. 널 위해서라도 난 무사히 돌아올 거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직접 돌보지 않으면 나도 마음이 안 놓여.”

장서열은 서풍엽에게 안겨 있는 게 쑥스러웠지만 그가 곧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가 승리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지만 전장은 변수가 많았기 때문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서열이 손을 뻗어 그를 함께 껴안았다.

“알면 됐어요. 나 혼자 버리고 가면 안 돼요.”

서풍엽이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현천기의 일은 일단 내버려 둬. 내가 돌아와서 처리할게.”

장서열은 멈칫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집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숙인 서풍엽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잊지 마. 생사가 우릴 갈라놓을 지라도 넌 내 거야!”

장서열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네. 생사가 갈라놓을지라도.”

서풍엽은 국가를 지킨다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채 여전히 사소한 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황제를 떠나 북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 * *

그날 이후, 장서열은 충왕비를 만나러 충왕부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만정과 이제 막 기력을 찾은 헌원가만이 가끔 그녀를 찾아왔다.

최근 연경에 떠도는 소문은 대부분 조 부인의 과거와 관련된 일이었다. 장신성과 이혼한 후 조옥언의 이름은 다시 한번 연경을 떠들썩하게 했다. 과거 그녀와 친분이 있었으나 감히 구애하지 못했던 남자들은 추억에 젖어 조옥언을 찾아갔다가 괜한 욕만 잔뜩 먹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저택을 찾는 이들 때문에 귀찮아진 조옥언은 대문을 굳게 닫아건 뒤 멋대로 찾아오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겠다고 선포했다. 다가오는 남자들을 모두 내친 덕분에 조옥언은 예전보다 더욱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물론 연경에는 이를 헐뜯는 부인들도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탐내는 걸 좋아할 부인이 어디 있겠는가. 다행히 조옥언은 외출하는 일이 없었고 딱히 손님도 만나지 않아 지나친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 역시 매우 바빴다. 그간 태평한 나날에 익숙했던 그는 익숙지 않은 전란에 대응하면서 점차 전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호기로운 모습이 사라진 황제는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에 젖은 제왕에 불과했다.

황제의 초조함을 눈치챈 구염락은 과감하게 동남쪽 업무를 모두 가져왔다. 시간이 지나자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명목 아래 전쟁과 관련한 모든 업무는 태자인 구염락의 소관이 되었다.

군정(军政, 군사에 관한 행정)을 장악한 후 구염락이 첫 번째로 주장한 것은 바로 화평(和平)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나날이 치열해졌고, 그는 화평과 대치되는 양쪽 군대를 모두 비판하다 끝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 황제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조성된 만큼 전쟁 또한 곧 끝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될 때까지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처에서 전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여전히 동남쪽 전투에 성과가 없자 조정 대신들은 더는 전쟁을 끝내자고 떠들지 못했다. 전쟁을 향한 비난은 정중한 권고로 바뀌었고, 권고는 이제 어떻게 하면 전쟁을 화평히 끝낼 수 있는지 태자의 고견을 묻는 것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기, 연경의 장신성에게도 사건이 발생했다. 그와 부하였던 서 대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난 것이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은연중에 흘러나온 소문을 종합해 그 이유가 혼담에 있음을 추측해 냈다.

‘혹 전장에서 장서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그래서 서 씨 가문에서 파혼을 요구한 거 아냐?’

‘그럼 서 씨 가문의 딸과 장 씨 가문의… 아니지, 조 씨 가문의 아들이 정혼을 했었다는 거야?’

그러나 말이 되질 않았다. 조 부인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파를 통해 아들의 혼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서 대인은 최근 벌어진 장 씨 가문의 소란에 몹시 언짢던 차였다. 이혼을 선포한 성격 강한 시어머니에 줄기차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가문인 것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집안에 딸을 시집보내기로 한 것이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서 부인 역시 남편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모르는 체하고 있었지만 조옥언이 아직도 며느리를 구하고 있다는 소문에는 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장서전의 혼처는 꽤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관직이 협판 대학사(協辦大學士)이라고 했다. 자신들과 비교하면 듣도 보도 못한 하찮은 가문인 데다 심지어 조정에서 정리를 고려하는 관직이라는 소문까지 있었다. 결국 서 부인은 남편과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

체면을 구긴 서 대인은 조옥언이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조 씨 가문을 찾아갔다. 그러나 조옥언은 누구도 만나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 대인은 몇 번의 사정 끝에 겨우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서 대인은 조옥언을 마주보지 않은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말 속에 담긴 분노는 감출 수 없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당하면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조 부인, 오늘 소인이 이리 찾아온 것은 대체 부인께서 며느리를 몇 명이나 들이려는 것인지 알기 위함입니다. 대관절 제 딸이 무엇이 부족하여 부인께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합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