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장서열은 뱃머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사모하는 눈으로 응시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은백색 옷을 갖춰 입은 그는 하나의 선과(仙果, 선계의 과일)처럼 맑은 향기를 풍겼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그녀의 마음에 어떠한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가 냉정하게 변한 것일 수도, 혹은 과거 황궁이 그녀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열정까지 모조리 죽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열 언니!”
만정이 기쁨에 겨운 얼굴로 달려와 장서열의 팔을 끌어안았다. 울긋불긋 화려한 경치와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부두를 감상하던 시선에 놀라움과 의아함이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건 처음 봐요. 모두 문회에 참가하러 온 걸까요?”
구염락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 장서열은 곧 만정과 함께 걸었다. 아름다운 산길과 꽃밭 사이로 듣기 좋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회는 다른 말로 용문회(龍門會)라고도 부르지. 연경에서 열리는 성대한 잔치이니만큼 당연히 찾는 사람도 많아.”
구염락이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한 뒤로 용문회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문인이 출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름길이 생긴 셈이었다. 그녀는 이름만 들어 보았을 뿐 직접 용문회에 참석해 본 적은 없었다.
구염락은 서둘러 장서열의 뒤에 섰다. 당자와 헌원가는 빨리 달린 탓에 순식간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서열은 발길이 닿는 대로 버드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붉은 치맛자락을 풀 위에 드리운 그녀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청산에서만 누릴 수 있는 봄날의 정취를 마음껏 음미했다.
“과연 아름다운 곳이야. 이곳을 관리하는 청산지주 연경 제일의 부호가 된 것도 당연해.”
말을 마친 장서열은 과거 뚱뚱했던 청산지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정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풍경을 보며 아이처럼 흥분해 소리쳤다.
“언니, 저 앞에 수각(水閣, 물가에 있는 누각) 좀 봐요! 오늘은 물이 흐르네요. 정말 예뻐요.”
수각은 청산의 첫 번째 누대에 있었다. 이곳은 평소, 아래 호수의 반짝이는 빛을 받아 하나의 예술품처럼 사람을 매료시키곤 했다. 특히 오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은 그 우아함이 한층 더했다.
구염락이 설명했다.
“저 수각은 구각영월(九閣映月)이라고 불러요. 오를 수 있는 날은 오로지 문회가 개최되는 단 하루뿐이죠. 잉어가 용문(龍門)에 뛰어올라 용이 됐다는 전설처럼 문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또한 큰 성과가 있기를 기원하는 뜻이에요. 누님도 한번 올라가 보시겠어요?”
만정이 기대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척 예뻐 보여요.”
“올라가 공중에서 폭포를 바라보면 더 예쁩니다.”
장서열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 가세요. 이따 산에도 올라야 하니 전 여기서 쉬고 있을게요. 전하께서 만정을 잘 보살펴 주세요. 사람이 많으니 길 잃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만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구염락은 장서열을 하인들과 남겨두고 떠나는 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럼 저도 여기서 누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손 공공에게 만정을 데리고 올라가라고 하죠.”
순간 만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떨구는 시선 속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서열이 만정의 손을 잡으며 구염락을 향해 웃었다.
“만정이 가 보고 싶다잖아요. 잔말 말고 어서 가요. 미인을 호위하는 걸 영광으로 아셔야죠.”
장서열이 만정의 어깨에 떨어진 꽃잎을 치워주며 격려하듯 말했다.
“데리고 가세요. 다녀와서 얼마나 멋졌는지 말해 주시고요.”
구염락은 다시 한번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하려 했지만 장서열의 기분이 언짢아 보였기에 두말 않고 만정과 함께 누각에 오르기로 했다. 만정은 기쁜 얼굴로 장서열을 향해 웃어 보인 뒤, 물에 젖지 않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신나게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만정을 향한 장서열의 미소 속에 알 수 없는 염려가 깃들었다. 만정은 궁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부디 그가 유년 시절 초혜전에서 함께한 정을 생각해 만정을 잘 보살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한편, 매끈하고 평평한 돌을 찾아 온 농교가 그 위로 털가죽을 덮었다.
“아가씨, 여기 앉으세요. 아마 두 분은 다시 오는 데 한참 걸릴 거예요.”
장서열은 사람들이 오가는 돌길을 피해 농교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았다. 구각영월천(九閣映月泉)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곳의 물을 만지면 행운이 따른다는 전설이 있어 배를 타고 온 이들은 풍경을 감상하며 함께 들르곤 했다.
장서열의 시선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큰소리로 현재의 정세를 이야기하는 사람, 국자감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 홀로 길을 걷는 사람, 친구와 동료를 부르는 사람 등 인파는 끊이질 않았다. 문회의 인기가 아주 높은 듯했다.
“아……!”
농교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를 내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침 장서열도 농교와 같은 장면을 목격한 참이었다.
장서양이 오고 있었다. 곁에는 곱상한 아이가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남장을 한 장서영이었다. 장서목도 있었다. 그는 장서영과 논쟁을 벌이는 중인 듯했고, 장서영은 몹시 불쾌한 얼굴로 입술을 쭉 내민 채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농교는 그제야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사에 그들이 오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러나 장서양의 학식으로 선비들을 놀라게 할 만한 성과를 거두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아직 어렸다. 대주국 선비들의 수준이 낮지 않은 이상 그가 이곳에서 두각을 나타낼 일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예상과 달리 전도유망한 모습을 보인다면, 어쩌면 이를 눈여겨 본 문인이 그를 제자로 받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서출이지만 좌상부의 자제라는 신분은 앞으로 그의 앞길을 밝히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가씨, 혹 또 무슨 소문이라도 나지 않을까 두럽네요. 서영 아가씨가 봉명지명을 타고났다는 풍문이 아직 다 사그라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돌아다니는 걸 부인께서도 알고 계실까요?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행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부인께서 곤란해지실 겁니다.”
“괜찮을 거야.”
장서열은 그들의 뒤에 시위가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곳은 청산이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청산지주는 그들이 장 씨 가문의 자제인 것을 감안하여 정성껏 보살필 터였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비바람이나 의외의 사고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이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장서열은 잠시 멈칫했다. 구염락이 위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곳을 장서양이 올라가고 있었다.
‘설마 그들이 만나진 않겠지?’
그녀는 주변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보며 이들이 분명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마주친다 해도 서로 누군지 알아볼 리 없었다.
장서열은 계속해 그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한 여인은 분명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었다. 전생에서 장서열은 장서전과 몰래 나와 ‘기 미인’이 누구인지 확인한 적이 있었다. 기 미인은 오늘 자주색 면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특별히 용모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얌전한 모습만큼은 마치 대갓집 규수를 연상케 했다.
물론 진짜 대갓집 규수도 눈에 띄었다. 국자감 수석의 딸과 한림원 대학사의 여식이었다.
방금 목격한 세 명의 여인이 모두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떠올린 장서열은 갑자기 무언가를 번뜩 떠올렸다. 그녀는 세 여인들이 예전에도 문회에 참석했었는지 궁금했다.
‘장서영과 장서양은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단순히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뜻인 걸까?’
장서열은 신속하게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다. 장서영의 출현은 분명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대문호의 여식들이 모두 나타나 학식을 뽐내는 자리라면 장서영도 분명 아버지의 지시로 온 것이리라.
아버지는 언제나 적녀인 자신보다 서출 여식을 챙기느라 열심인 사람이었다. 여기서 장서영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간 아버지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장서열은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붉은 치맛자락은 푸른 잔디 위에서 더욱 선명히 빛을 발했다. 옥 같이 맑은 피부는 그늘에서도 밝은 달처럼 눈이 부셨다. 꽃에 둘러싸인 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던 그녀는 누군가 높은 누대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누각에 오른 구염락은 이곳이 매우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지만 모두가 질서정연했다. 어떤 이는 아래로 내려가는 발걸음을 멈춘 채 누군가 지어낸 시를 감탄하며 듣고 있었다.
만정은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피곤에 절은 작은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더는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하, 조금만 천천히 가세요……. 너무 힘들어요. 좀 쉬었다 가요.”
정상에 오르자 인공적으로 지은 꽃의 바다가 넓게 펼쳐졌다. 셀 수 없는 정자 중 하나를 고른 만정은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구염락은 만정을 그대로 둔 채 시선을 떼지 않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을 둘러싼 경관은 평범했지만 그녀가 미소를 보내는 곳은 마치 은백색으로 환히 빛나는 것 같았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행인들을 바라보는 경국지색의 미모는 온화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 여긴 듯했다.
그녀의 눈에 들고,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은 엄청난 행운아였다. 허나 동시에 그들은 불행한 이들이기도 했다. 바로 곁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절세미인이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염락은 왠지 모를 노여움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피가 끓어오른 그는 돌연 바람처럼 올라온 길을 반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자신의 서열 누님을 감히 마음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놀란 만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부르려 했지만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다리를 이끌며 그의 뒤를 따랐다.
달리던 구염락은 마침 올라오던 장서목과 부딪쳤다. 장서목이 소리쳤다.
“누가 뛰는 거냐! 오고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천천히 다녀야지!”
“미안합니다.”
그러나 구염락은 속도를 조금 늦췄을 뿐, 그대로 그를 지나쳐 가려 했다.
“이맥(李陌, 소리자), 배상의 뜻으로 원하는 만큼 은자를 줘라.”
그 말에 장서목이 구염락을 붙잡아 세웠다.
“뭐라고? 이 도련님이 네 은자 따위가 필요할 것 같으냐?”
장서영이 얼른 오라버니의 손을 붙잡았다.
“급한 일이 있겠지요. 그만 하세요.”
즉시 장서목의 손을 떼어낸 구염락이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뛰어 내려갔다. 만정이 한 줄기 향기를 남기며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기다려요.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