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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14)화 (114/449)

제114화

그러자 당자가 부러워하며 즉시 말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역시 서열 누님이 최고죠. 이 아우가 자리를 마련할 테니 누님께서 실력 한번 발휘해 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장서열은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당자를 보며 속으로 권여아에게 무한한 동정을 느꼈다. 비록 전생에서는 그녀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자에게 저렇게 무시를 당하는데 권여아는 참고만 있었다. 입장을 바꿔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화를 냈을 것이다.

권서함도 무척 당혹스러웠다. 모두가 누이동생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하,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니 굳이 연주 실력을 겨루지 않아도 괜찮겠군요.”

권서함은 불평 없이 좋은 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장서열은 부끄러움에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또 한 번 남을 괴롭힌 셈이었다. 그녀는 권여아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속으로 얼른 네 남자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이어 옆으로 달려드는 당자를 한쪽으로 치웠다.

“넌 입 좀 다물어. 배에서 내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그래, 가자. 계속 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르겠어.”

당자는 정말로 기뻐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서열 누님! 역시 나를 이해해 주는 건 누님밖에 없다니까! 가자!”

헌원가가 황급히 말했다.

“나도 데려가요! 저, 정말 실례지만 제 남동생을 권 공자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헌원가가 앞으로 떠밀자 헌원상이 얼굴 가득 울상을 지었다. 그도 장서열과 함께 가고 싶었다.

구염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됐군. 나도 마침 지루하던 참이라 배에서 내려 좀 걸어야겠어.”

그 말에 만정은 무척 신이 났지만 권여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 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권서함은 무척 난감했다. 누이동생이 곧 울 것 같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자 그가 탄식하며 말했다.

“먼저들 내려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상이를 데리고 있겠습니다.”

장서열이 눈시울을 붉힌 권여아를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함께 가는 게 어때요? 나가서 좀 걷는 것도 좋을 거예요.”

장서열이 속으로 생각했다.

‘뜻밖의 일을 당해도 반격할 줄을 알아야지. 왜 네 매력을 믿지 못하지? 넌 그가 전생에서 진심으로 대했던 몇 안 되는 여인 중 하나인데.’

권여아는 더욱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장서열의 오랜 벗이었다. 심지어 오라버니조차 그랬다. 자신의 존재와 관계없이 그들은 모두 장서열만 두둔했다. 권여아에게는 매우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궁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아 온 그녀는 차마 나약하고 서운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서열 아가씨께서 싫어하지 않으신 걸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권여아의 말에 장서열은 살짝 무안해졌다. 겉보기와 달리 권여아는 성질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기야 면전에서 당자에게 면박을 당했으니 화를 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권서함이 입을 열었다.

“여아는 여기서 나와 함께 있자. 넌 수상(水上) 경치를 좋아하잖니.”

곁에 선 구염락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서열을 응시했다. 그는 무언가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누님이 권여아에게 건넨 말은 진심일까?’

장서열은 구염락과 권여아와의 정혼에 조금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권여아를 공격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성심성의껏 원만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질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과거 그는 오직 장서열에게만 잘해 주었으나 앞으로는 다른 여인에게도 잘해 줘야 했다. 그런데도 서열 누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아 보였다.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구염락은 즉시 스스로를 달랠 핑계를 만들었다. 아직 두 사람의 혼사가 정식으로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열 누님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녀가 권여아에게 잘해 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락의 마음이 다시 편해졌다. 그가 장서열을 향해 말했다.

“누님, 우리도 가요.”

장서열은 정말로 구염락의 뺨이라도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권여아가 화난 거 안 보여? 어서 그녀를 달래야지. 뭐하는 거야!’

이 일로 기분이 상한 권 씨 가문이 황후를 움직인다면 그의 황위도 날아갈지 모를 일이었다.

“서열 누님, 가자고요.”

구염락이 마치 어린 시절과 같은 모습으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그의 눈에서 지난 몇 년간 키워온 그의 고집스러운 면모를 확인했다.

‘혹시 황후도 이런 모습에 속아 구염락을 선택한 게 아닐까?’

장서열은 그에게 반드시 일깨워 주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권 씨 가문의 자제들에게 밉보여선 안 된다는 걸.

당자가 불현듯 장서열을 잡아끌고 밖을 향해 달렸다.

“갑시다! 드디어 해방이다! 우리 먼저 경주 한 판 해요. 그런 다음 문회(文會)에 가자고요.”

헌원가가 즉시 뒤를 따랐다. 만정과 구염락 역시 그 뒤를 쫓았다. 잠시 뒤, 팔각정에는 아름다운 경치와 세 사람만이 덜렁 남겨졌다.

권여아가 돌연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일어난 헌원상은 권여아를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 바깥으로 나왔다. 팔각정 밖에는 이미 한참을 울어서 눈시울이 붉어진 어린 궁녀가 꿇어앉아 있었다.

권서함은 밖으로 나가는 헌원상을 내버려둔 채 조용히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권여아는 책상에 엎드려 흐느꼈다. 그녀 자신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너무 서러워서 울고만 싶었다.

권서함은 차 한 잔을 따른 뒤 찻잔에서 김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가 더 높아질 무렵, 그가 비로소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다 울었니? 그가 네게 잘해 주지 않아 서러운 게야? 너와 정혼한 걸 감사히 여기고 오직 너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권여아가 깜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찻잔 속의 차를 따라낸 권서함이 새로 잔을 채우며 말했다.

“우리 둘뿐이다. 못할 말이 뭐가 있느냐.”

눈물을 떨군 권여아가 오라버니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오라버니… 대체 제가 뭘 잘못했죠? 사촌 오라버니나 십삼황자나 똑같아요. 제가 그렇게 별로인가요? 다들 하나같이 왜 그러는 거예요.……. 오라버니, 절 데리고 집에 가 주세요. 집으로 돌아갈래요. 더는 궁에 있기 싫어요. 구염락 그는… 그는…….”

권서함이 차분한 얼굴로 누이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전 이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요. 어렵사리 희망을 발견했는데 오늘 또… 오라버니, 전 황궁이 싫어요. 정말 싫어요…….”

권서함은 참을성 있게 누이동생의 말을 들어 주었다. 그 역시 전부터 동생을 데리고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황궁은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나오기는 더더욱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현재 황후의 상황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자기 세력을 필요로 했으며, 조카인 권여아는 새로 옹립할 태자의 곁에 심기에 최적의 후보였다.

“지난번 너는 이렇게 울지 않았지.”

그 말에 깜짝 놀란 권여아가 이내 씁쓸해 하며 말했다.

“열셋째 전하는 제게 매우 잘해 주세요. 정말로요.”

“잘해 주는데 어째서 눈물을 보이는 게냐.”

권여아는 잠시 멍해졌다. 맞는 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데 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와 혼인할 남자는 훗날 수많은 비빈을 거느리게 될 몸이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꿈꾸었단 말인가.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권서함의 평온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아야, 황실에선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 너는 당연히 미래의 황제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지. 하지만 사랑보다는 공경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 오라버니는 네가 즐겁게 살기를 바란단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오라버니는 사랑이 없어야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걸까?’

권여아는 고개를 들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큰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하지만 마음이 아플 거예요.”

“아니, 마음 아파하지 말거라. 장서열은 너의 적이 아니다. 앞으로 수많은 여인들이 너와 총애를 다투려 할 텐데, 네가 그때마다 이렇게 아파한다면 이 오라버니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니.”

그 말에 권여아는 다시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마음껏 울었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과 평생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간단한 소원조차도 이룰 수 없다니.

* * *

배가 서서히 청산에 가까워졌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부축을 받으며 배에서 내렸다. 사실 부축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그녀는 거절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기에 그가 내미는 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배에서 뛰어내린 당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미친 듯이 기뻐했다. 청산항은 이미 정박한 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구에는 ‘문회(文會)’라는 두 글자가 힘찬 필력으로 크게 써 있었다.

문회에 참석하려는 이들이 속속들이 산에 오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드리운 사람도, 하얀 두건을 머리에 쓴 사람도 있었다. 부귀한 비단 도포를 입은 이가 있는가 하면 거친 광목옷을 걸친 이도 있었다.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머리에 면사를 쓴 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한두 명의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문회는 문인에게 글재주를 겨루는 자리이자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붓을 놀려 세상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달랐다. 여자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까마득한 남자의 관심, 총애 따위밖에 없었다.

장서열은 그런 삶에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전생에서 여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지만 이는 긴 역사 속 말라비틀어진 꽃 한 송이에 불과했다. 결국 그녀는 대주국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무자비하게 버려졌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고귀하면 무얼 하나. 남자의 세계에서 여자의 미모란 햇빛만 닿아도 쉽게 변해 버리는 나약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번 생에서 그녀는 부단히 노력하고 성장해야 했다. 스스로를 감추고, 그늘에 적당히 몸을 숨기며 영원히 아름답고 고귀해야 했다.

구염락이 뜨거운 시선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복사꽃과 자두나무 꽃잎이 휘날리는 풍경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 떨기 설련화(雪蓮. 연꽃을 닮은 국화과 꽃 이름)처럼 평온한 그녀의 모습에 구염락은 깊이 빠져들었다. 산의 어떠한 빛깔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봄바람조차 흐트러뜨리지 못할 맑고 투명한 얼굴과 청순한 자태는 그 아련함이 유달리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구염락은 마치 그녀가 달아날까 두려운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열 누님.”

‘이리 와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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