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16)화 (116/449)

제116화

은자 열 냥을 꺼낸 소리자가 이제 막 변성기를 맞이한 남자아이처럼 굵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손한 태도였다.

“세 공자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도련님께선 고의가 아니라 정말 급한 일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혹시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의원이 필요하면 부르시고 배상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모두 따르겠습니다.”

장서목은 화가 났다. 부딪친 팔뚝은 욱신거렸고, 특히 방금 전 그가 떼어낸 손목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배상해요, 배상해! 모두 가능하다고? 만일 내 팔뚝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당신들이 가산을 다 탕진해도 물어내지 못할 거요! 배상한다고 했으니 금 백 냥을 배상하시오!”

군말 없이 가슴팍에서 은자를 꺼내려던 소리자는 오늘 대금(對襟, 윗옷의 두 섶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서 단추로 채워지는 옷) 도포를 입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소매에서 은표 열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그러자 장서양이 나섰다.

“실례 많았습니다. 제 아우가 철이 없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누구나 급한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제 아우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저희도 시비를 따지지 않겠습니다.”

소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차라리 이들이 시비를 따지길 빌었다. 그래야 서둘러 배상하고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여기, 은자 천 냥입니다. 저희 도련님께서 공자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한 배상입니다.”

장서목이 입을 떡 벌렸다. 은자 천 냥이라니! 두 번 부딪치면 무려 이천 냥이었다.

하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단번에 이만한 거액을 배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신분을 가진 이는 아닐 터였다. 아까 그 자는 돈으로 상황을 무마할 수 있는 사람인 듯했다. 장서목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형님을 바라보았다.

장서영 역시 놀란 눈으로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천 냥씩이나 몸에 지니고 다니다니…….

사실 소리자는 매우 마음이 아팠다. 그는 고생한 기간이 길었던 만큼 은자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삶에 있어 은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장서양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해하셨군요. 이쪽은 제 아우이고 저희는 장 씨 가문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댁의 가문과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니 괜한 돈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자가 답했다.

“혹 어느 장 씨를 말씀하시는지요?”

소리자의 반응에 장서양은 분명 그의 가문이 부친의 지인쯤 될 거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설 립()자에 이를 조()자를 쓰는 장()입니다. 좌상(左相)께서 저희의 부친 되십니다.”

장서양은 구태여 자신들이 서출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부친과 친분이 있는 가문의 사람이라면 돌아가 주인에게 고할 것이고, 머지않아 그들의 부친 역시 알게 될 것이다.

소리자가 이제야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서열 아가씨의 서출 남매들이었다. 좌상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통에 부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바로 그들. 소리자가 다시 은표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소인, 도련님을 대신해 인사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주인을 따라 눈 깜짝할 사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진 장서양과 장서목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 간다고? 우리가 장 씨 가문의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그들은 구체적인 신분을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돌아선 소리자가 의아할 따름이었다.

장서양의 시선이 장서영에게로 향했다. 누이동생은 비록 오늘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한눈에 여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적녀인 장서열의 명성이 드높긴 했지만 장서영 역시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어여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자신들을 적출 소생이라 여겨야 마땅하지 않은가.

게다가 얼마 전 장서열로 인해 연경 전체가 들썩였던 일을 생각하면, 설령 부친과 대립하는 가문의 사람들이라 해도 이처럼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장서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누이의 물음에 장서목이 답했다.

“어쩌면 정말 급한 일이 있는 지도 모르지. 그가 도련님이라고 부른 자가 엄청 급하게 뛰어갔잖아. 그 뒤를 웬 아가씨가 쫓아가는 거 봤어? 아마 그 아가씨에게 붙잡혀 남편이 될까 봐 도망치는 중인지도 몰라. 하하!”

그러나 장서양은 웃지 않았다. 분명 그들의 신분은 평범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표를 꺼내던 그의 동작에서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했다. 하나는 그가 단순한 심부름꾼이라는 거였다. 사금(斜襟, 비스듬히 옷깃을 낸 옷)을 입을 수 있는 건 심부름꾼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그가 태감이라는 것이었다.

장서양은 전자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한 심부름꾼의 행색이 아니었다. 항시 주인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 같았다.

태감을 부릴 수 있는 자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좌상부의 자제라는 말을 듣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만한 사람. 상대는 그들의 신분을 듣고도 별다른 호감을 표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쉬워해야 하는 건 자신들 쪽이었다. 어쩌면 황실의 자제와 서로 안면을 틀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만 가자. 너도 좀 조심하거라. 자칫 그래선 안 되는 사람에게 원한을 살 수도 있으니.”

장서목이 약간 두려운 양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마주친 그 자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뿌리친 손이 너무 아픕니다.”

장서양이 답했다.

“네 또래의 황자는 많지 않지. 지금 태자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이들은 전부 힘이 센 자들이다. 그가 네 팔목을 부러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장서목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무서운 상황이었다고요? 그나저나 방금 전 일이 혹시라도 나중에 장서전에게 도움이 되진 않겠지요?”

만약 그러한 거물이 오늘 일을 곱게 넘겨 준 은혜를 엉뚱하게 장서전에게 갚는다면, 그 또한 재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문제만큼은 장서양도 단언하기 어려웠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지켜보자. 인연이 있다면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되겠지.”

장서영은 두 오라버니 사이에서 얌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급하게 사라진 그 남자를 떠올렸다.

‘정말 오라버니의 말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일까?’

한편, 순식간에 누각에서 뛰어내려 온 구염락은 어두운 얼굴로 장서열을 잡아끌었다. 장서열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앗, 내 손수건.”

완정이 떨어진 아가씨의 손수건을 주우며 급히 뒤를 따랐다.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만정은 어디에 두고 혼자 내려왔어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안색이 그리 안 좋아요?”

대답 없이 계속해 걷는 그에 의해 장서열은 바삐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누각에서 멀리 떨어진 뒤에야 구염락은 비로소 발걸음을 멈췄다.

장서열은 약간 불쾌했지만 구염락의 신분 때문에 뭐라 따질 수가 없었다.

“만정은요? 왜 혼자 내려왔어요?”

그녀는 꽉 쥐어져 붉어진 손목을 살살 문질렀다. 들짐승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센 힘이었다. 구염락과의 우정을 유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걸핏하면 타인의 의사를 무시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구염락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잡힌 장서열의 손목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파요?”

네가 손을 놔야 괜찮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장서열은 애써 말을 삼키며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만정은요?”

“그녀는…….”

구염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만정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감히 사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가서 찾아올게요.”

구염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발치에서 힘겨운 모습의 만정이 나타났다.

“서… 열 언니… 전하… 너… 너무 빨라요……!”

말을 마친 만정은 그대로 녹초가 되어 풀밭에 주저앉았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서 구염락이 다시 뛰어간다면 만정은 더는 그 뒤를 쫓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너무 힘들었다.

만정의 얼굴은 온통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곁의 시녀 또한 기진맥진한 채였다. 장서열은 농교를 시켜 만정에게 물을 떠다 주도록 한 뒤, 그들을 깨끗한 장소로 부축해 쉬도록 했다.

“왜 뛴 거야. 전하가 뛰더라도 넌 천천히 걸어야지. 이것 봐, 완전히 지쳤잖아.”

말을 마친 장서열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뛰면 어떡해요? 누가 쫓아오기라도 했나요? 만정 같은 여자아이를 인파 속에 내버려두고 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몰라요?”

손수건을 꺼낸 장서열이 만정의 땀을 닦아 주었다. 장서열의 어깨에 기댄 만정은 그대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이렇게 긴 거리를 뛰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구염락의 시선은 오로지 장서열을 향해 있을 뿐 만정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누각에 오른 사람들이 온통 장서열을 쳐다보던 광경을 떠올리며 다시금 화가 치솟는 걸 느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멋대로 서열 누님의 외모를 평가하고 그를 토대로 시를 짓는단 말인가.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한편, 장서양과 그의 아우들은 누각의 정상에 올랐다. 삼삼오오 무리 지은 이들이 아쉬운 얼굴로 탄식하고 있었다.

“그렇게 데려가 버리다니 참으로 아쉽군.”

“그 청초하고 우아한 자태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시를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장서양을 발견한 누군가가 다가왔다. 국자감에서 친분이 두터운 자였다. 평민의 자제인 그는 서출인 장서양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전혀 값비싸 보이지 않은 옷을 걸친 그가 애석한 얼굴로 다가왔다.

“서양 형님, 한발 늦으셨습니다. 조금만 일찍 왔다면 선경(仙境, 신비하고 그윽한 경치)을 볼 수 있었을 텐데요.”

그 말에 장서영이 호기심 어린 눈을 크게 떴다. 긴 속눈썹과 반짝이는 두 눈동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무슨 선경이요? 아름다웠어요?”

백계상학(百溪嚮學)이 놀란 눈으로 장서영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그 여인을 보지 못했다면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이는 분명 눈앞의 여자아이였을 것이다.

백계상학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본디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이 옳았다.(非禮勿視非禮勿聽 [비례물시비례물청], 논어 <안연편>)

“아… 아가씨께 고합니다. 별 것 아닙니다.”

백계상학은 감히 여인 앞에서까지 미녀를 평가하는 취미를 뽐낼 수 없었다. 장서영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아가씨라 칭하자 즉시 빨개진 얼굴로 큰오라버니의 뒤에 몸을 숨겼다.

장서양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이동생은 본래 감추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아이였다. 그러나 오늘 동생을 굳이 남장하여 데려온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의 행동에 불편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