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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1화 (2/120)

1화

살려 주세요.

그것이, 내가 그에게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 * *

“워, 워!”

마부가 고삐를 당기며 말들을 달래는 소리가 드넓은 정원에 퍼졌다. 황금빛의 화려한 마차가 대저택의 입구에 천천히 다가가자, 저택 안에서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용인들이 일제히 뛰어나왔다. 그들은 숨 가쁜 기색 하나 없이 일렬로 도열하고서 가지런하게 손을 모았다.

“오셨습니까.”

집사의 마중 인사가 이륜마차가 아니라, 마차의 옆을 나란히 달려온 흑마 쪽으로 향했다.

말 위에 타고 있던 남자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집사에게 눈길을 준 뒤 기다란 다리를 가뿐히 넘겨 내렸다.

높은 말 위에서 내리는데도 남자의 동작은 흔들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마치 말을 타고 태어난 자 같았다.

훤칠한 남자가 검은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으며 저택의 입구로 들어서자, 그의 뒤쪽에 대기하던 하녀 몇이 발그레한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을 털어 드리겠습니다, 가주님.”

개중 한 하녀가 용기 내어 남자에게 바짝 따라붙으려 했다. 그러자, 집사가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녀는 집사의 눈치를 읽고서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이 저택에서 오래 일하려면 집사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교육을 다시 해야겠군.’

집사 파올로는 감히 주인의 그림자를 밟으려 한 하녀의 얼굴을 머리에 담으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

검은 성의 저택에서 일한 지도 어언 20년, 웬만한 일에는 진력이 나 있었지만 젊고 아름다운 주인을 지키는 것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일개 하녀들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설레어 할 만큼, 주인은 아름다웠다.

먼지도 묻지 않은 검은 정복을 장갑으로 툭 친 그의 어깨는 떡 벌어졌다는 표현 말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늠름했다. 또한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며 점점 좁아지는 날렵한 선과 쭉 뻗은 다리마저도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다.

그림자만으로도 여인을 홀릴 만큼 수려한데, 심지어 외모까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전대 공작을 닮은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매서운 바람에도 부드럽게 살랑거렸으며, 그 아래로는 총기가 가득한 보라색 눈동자가 번득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조화로운 외모다. 굳게 다문 입술이 열리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또 그 얼굴에 훈풍이 부는 일 또한 적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완벽한 사내였다.

황제가 조카인 그를 제 곁에 두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갈 만했다. 때로는 아름다운 것도 권력이 되기 때문일 터다.

그리고 그 권력 때문에, 남자는 겨우내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황제는 조카인 공작을 아꼈다. 아끼는 동시에 그를 견제했다. 그 애증의 증거로, 황제는 조카에게 작은 선물을 선사하였다.

바로 원치 않는 정략결혼이었다.

“또 허탕이었다.”

하지만 정략혼은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혼인의 주인공들이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피치 못할 재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부의 행방불명.

검은 성의 주인, 서늘하고 아름다운 리카르도 비토레 대공은 지금 매일같이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그의 약혼녀 미라벨 에티에네트 왕녀.

리카르도가 왕녀를 찾기 위해 수색 팀을 꾸린 것은 사랑하는 이를 찾는다는 감성적인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는 왕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태양을 닮은 찬란한 금발과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녀라는 사실뿐이었다.

약혼이라 해도 서류에 인장을 찍는 것 말고는 다른 의식도 없었다. 미라벨 왕녀의 모국인 세골린데가 이곳 레나토에서 마차로 두 달은 족히 걸리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지나치게 먼 거리가, 이 사달의 화근이 되었다.

“이제는 가주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파올로는 리카르도의 뒤에 보이는 마차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만큼 했으면, 이쪽에서도 성의를 보일 만큼 보였다는 뜻이었다.

미라벨 왕녀가 리카르도와 결혼을 하기 위해 레나토로 오던 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게 어느덧 보름 전이다.

폭설이 원인이었다. 세골린데와 달리 혹한이 1년의 반을 차지하는 아르칸젤로 제국, 그중에서도 국경 지역인 레나토는 추위가 매섭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레나토는 웬만한 폭설은 눈이라고 쳐주지도 않을 만큼 극심한 눈보라가 일상인 곳이었다. 하지만 세골린데는 온후한 기후가 장점인 국가였기에, 국경을 넘자마자 몰아치는 눈 폭풍에 왕녀 일행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아르칸젤로의 겨울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세골린데의 기준에서 한 준비였다.

마차의 바퀴는 지나치게 얇았으며, 말들은 유약했고, 마부와 호위병들은 추위에 맥을 못 추렸다.

결국 왕녀 일행은 눈보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이들의 시신은 마차의 잔해와 함께 모두 발견되었으나, 단 한 명, 미라벨 왕녀만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여 리카르도는 왕녀 수색을 하게 되었다.

이 또한 약혼과 마찬가지로, 황명에 따르기 위해서였다. 황명만 아니었다면 리카르도가 직접 매일같이 눈산을 헤맬 이유가 없으니까.

“피곤하군.”

혼잣말과 같은 낮은 중얼거림에 집사는 주인의 얼굴을 재빨리 살폈다.

조각같이 콧대가 높고 옆선이 완벽한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늘도 빈 마차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집사는 한숨을 조용히 삼키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가 가볍게 덜컹거리는 것을 보고서 짐작은 했다.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파올로를 흘긋 보던 리카르도가 마차가 물러나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파올로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마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덜컹, 하고 소리가 날 만큼 다소 격하게 마차 문을 잡은 리카르도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도열했던 사용인들은 어느새 제 일거리를 찾아 자리를 물린 뒤였다.

리카르도의 곁에는 집사인 파올로와 하녀장인 카타리나 부인뿐이었다.

“열어.”

파올로에게 시선을 던지던 리카르도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카타리나 부인에게 명했다.

부인은 주인의 짤막한 명령에 집사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설명을 원하는 사용인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리카르도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부인이 열도록 해.”

“예, 가주님.”

꼭 할 말이 아니라면 하지 않는 주인의 성정을 잘 아는 카타리나 부인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서 마차로 다가갔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는 탓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파올로도 카타리나 부인도, 이 마차 안에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 마차는 미라벨 왕녀를 마중하라고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두운 회색빛인 레나토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하고도 화려한 장식이 가득 박혀 있었다.

마차 내부도 하녀들이 서로 청소를 담당하겠다고 다툴 만큼 아름다운 세공이 되어 있었다.

오로지 미라벨 왕녀만을 위한 마차.

그 마차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건, 그리고 미라벨 왕녀를 찾으러 갔던 대공이 이 안에 누군가를 태우고 돌아왔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한다.

미라벨 왕녀를 찾았다는 것.

조용히 침을 삼키며 마차의 손잡이를 돌리던 카타리나 부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아까 리카르도는 ‘허탕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안에 누가 들어 있단 말인가?

“어서.”

“예.”

불길한 예감에 차마 손잡이를 당기지 못하자, 뒤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 부인은 숨을 들이켜고서 마차의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세상에…….”

그리고,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을 본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경악의 탄성이 비어져 나왔다.

마차 안에는 비쩍 마른 여인이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손과 발은 동상을 입어 붉게 얼어붙어 있고 입고 있는 옷은 차마 옷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여인의 몸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미라벨 왕녀님?”

카타리나 부인이 마차 안으로 뛰어들며 외치자, 뒤에서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리카르도는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었다. 그는 망토에 묻은 눈을 떨어낸 뒤 여인의 몸에 덮었다.

벌거벗다시피 한 여인을 감싼 리카르도가 망토에 둘둘 말린 가냘픈 몸을 안아 들었다.

“가, 가주님?”

“왕녀님을 찾으신 겁니까?”

집사와 하녀장은 혼비백산하여 물었다.

그들은 여인의 등장보다도 주인의 행동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다른 이의 손이 닿는 것도 질색하는 주인이 직접 먼지투성이의 여인을 안다니.

“미라벨 왕녀는 금발이라지.”

리카르도는 대답을 하며 망토 사이로 삐죽 나온 여인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시선을 따라서 흙과 눈이 엉겨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보던 두 사람은 곧 입을 다물게 되었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새빨간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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