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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0화 (프롤로그) (1/120)

[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

프롤로그

“하아, 하아. 하아!”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퍼져 나온다. 정처 없이 내달리는 여인의 발이 무릎까지 쌓인 눈에 푹푹 잠겼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눈꽃이 핀 나무 사이를 마구잡이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눈산을 올라가는 여인의 표정은 절박했다.

그녀는 마치 뒤에서 마수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마구 뛰어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멀리.

검은 성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여인은 미친 사람처럼 달려 나갔다.

“아……!”

한참을 달리던 여인이 풀썩, 눈밭에 쓰러졌다. 정면만 내다보고 달리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버린 것이다.

‘하필이면.’

추위에 빨갛게 언 손이 발목을 거머쥐었다. 살짝 쥐자마자 고운 얼굴이 단번에 찡그려진다. 날카로운 통증이 다리 전체를 지배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삔 것 같았다.

‘어쩌지.’

난감해하며 발목을 주무르던 여인이 초조함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공포에 사로잡힌 눈으로 눈보라 속의 성을 보았다.

아르칸젤로 제국의 국경 지역 레나토를 수호하는 비토레 가문의 성(城).

검은 늑대 기사단을 통솔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토레 대공, 리카르도 비토레가 있는 곳.

‘이럴 때가 아냐.’

시린 눈으로 성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늘에 어둠이 깔리기 전까지 이 눈산을 벗어나야만 한다. 끔찍한 추격자가 그녀를 찾아내기 전에.

컹, 컹!

컹!

얼마나 걸었을까. 눈바람 사이로 사냥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틀거리며 걷던 여인은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소리에 걸음을 재촉했다. 다리의 통증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제는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윽…….”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벗어날 기회가 없다. 또다시 붉은 방에 갇힐 수는 없다.

자신을 봐 주지 않는 남자의 애정을 갈구하며 갇혀 사는 건 지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릎을 거머쥐던 하얀 손이 문득 납작한 배로 옮겨 갔다. 그녀는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이,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도망쳐야만 해.’

따스한 시선으로 배를 내려다보던 초록색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여인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서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그녀의 몸을 검은 그림자가 뒤덮기 전까지는.

“……아르밀라.”

여인, 아르밀라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부름에 몸을 흠칫 떨었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깊은 음성. 위엄이 서린 고압적인 말투.

어두운 밤과 차가운 검의 지배자, 리카르도 비토레가 아르밀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나.”

서늘한 보랏빛 시선이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내리꽂혔다.

어느덧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단지 그녀를 위협하기 위해서 개를 풀었던 것처럼.

겁에 질린 아르밀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빙빙 돌았다.

하지만 그뿐. 그의 위압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르밀라는 벌벌 떨며 고개를 틀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를 외면하는 게 고작이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시선을 피하자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그리고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드레스가 엉망이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리카르도의 목소리에 아르밀라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아르밀라는 리카르도가 무서웠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이 사람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사랑한 걸까. 어떻게 이렇게 차가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아르밀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보라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고요하게 아르밀라를 바라보다가 너덜너덜해진 레이스로 손을 뻗었다.

“한참 찾았잖아.”

옷소매를 잡던 손이 얇은 팔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흣…….”

“멋대로 성을 나가다니. 누가 그래도 된다고 했지?”

리카르도는 아르밀라를 잡아당기며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내 것이라고 했을 텐데.”

그새 잊었나?

낮게 덧붙인 말에 그에게 붙잡힌 아르밀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걸 어찌 잊을까. 리카르도의 신부가 되었던,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던 날 밤에 들은 말인데.

결혼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아르밀라는 정식 대공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에게 전부를 바치겠다고 했다. 행복하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불쌍한 아르밀라.

정부 취급을 받게 되는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기뻐했을까. 어리석게도.

“전하를 위해서도 제가 사라지는 게 나아요.”

“나를 보고 말해라.”

“보내 주시면 죽은 것처럼 살게요. 레나토 근처에는 얼씬도…….”

“나를 보라고.”

차가운 손이 갸름한 턱을 쥐었다. 아르밀라의 고개를 돌린 리카르도가 말랑한 뺨을 꾹 누르자, 다물린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아……!”

아르밀라의 입이 벌어지자마자 입 안으로 말캉한 살덩이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껴안고서 혀를 거칠게 얽었다.

리카르도는 아르밀라의 부드러운 입 안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두툼한 혀가 아르밀라의 혀를 휘감고서 안쪽 점막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입술이 떨어졌다 싶을 때 고개를 틀어 다시금 타액을 섞고서 아르밀라의 혀를 빨았다. 서늘한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키스였다.

“흐읏…….”

거칠게 시작한 키스가 점점 농밀하게 변해 가자, 아르밀라의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그의 아래에서 신음했던 수많은 밤의 기억이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아냐.

안 돼.

리카르도에게 녹아내리던 아르밀라가 불현듯 눈을 홉떴다. 이대로 휩쓸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영영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옥죄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고, 탄탄한 가슴을 밀어 냈다.

하지만 리카르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디단 과실을 생전 처음 맛보는 사람처럼, 아르밀라를 끈질기게 탐했다.

이윽고 뭉근하게 열이 오르자, 아르밀라는 턱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껏 리카르도의 혀를 깨물었다.

그러자 리카르도가 눈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반듯한 입가에 붉은 피가 맺혔다. 리카르도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눈썹을 모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부탁이에요.”

하얀 눈길에 피를 내뱉은 리카르도의 귀에 떨리는 음성이 박혀 들었다. 어느덧 눈물로 엉망이 된 아르밀라가 오들오들 떨며 간절히 말했다.

“제발, 저를 보내 주세요…….”

“왜 이렇게 떨어.”

아르밀라를 지그시 보던 리카르도가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눈보라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추운가?”

“전하께 저는 이제 필요 없잖아요.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되시면 저는…….”

“성에 돌아가면 함께 목욕을 할까? 그런 지도 오래되었지.”

“제발!”

아르밀라는 자신을 무시하는 리카르도를 향해 외쳤다. 절박한 외침에 리카르도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보내 달라고?”

리카르도는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그는 아르밀라를 노려보며 가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왜?”

아르밀라의 손을 쥔 남자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태울 것처럼 보며 읊조렸다.

“내가 왜 널 보내 줘야 하지? 내 것을, 왜?”

“이것 놔요.”

흐느낌이 섞인 애원이 아르밀라의 잇새에서 비어져 나왔다. 두 사람 사이를 차가운 바람이 가득 메웠다.

침묵 속에서 아르밀라를 응시하던 리카르도의 날카로운 눈매가 문득 반으로 접혔다.

“반항은 이만하면 됐어. 돌아가자.”

여유롭게 말하는 리카르도의 얼굴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리카르도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더 하면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으니까.”

아르밀라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그의 태도에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손목을 쥔 리카르도의 손을 세게 깨물었다.

“무슨……!”

놀란 리카르도가 움찔하며 손을 놓았다. 아르밀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뒷걸음질을 치며 보디스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 검은 어디서 났지?”

아르밀라에게 물린 손등을 황망히 보던 리카르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날의 끝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만도 벅찼다.

리카르도는 어설픈 자세로 검을 들고서 자신을 겨냥하는 그녀를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무서워 죽겠군.”

리카르도는 한가로이 말하며 아르밀라에게 다가갔다. 전장을 지휘하는 데 진력이 나 있는 그에게 이런 건 위협이 되지 않았다.

리카르도에게 이건 어린아이가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르밀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르밀라!”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젠장, 검 내려놔!”

아르밀라가 푸른 검날을 하얀 목에 대자, 선명한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자 그녀에게 다가가던 리카르도가 경악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던 그가 평정심을 잃고서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미쳤어? 그러다 다친다고!”

“다가오지 마.”

아르밀라는 검을 바투 쥐며 결연하게 말했다. 검날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그 광경에 그녀의 말을 줄곧 무시해 오던 리카르도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르밀라는 그를 쏘아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다가오면, 이 자리에서 죽어 버릴 거야.”

“알았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아르밀라의 협박에 리카르도가 그녀를 달랬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항복의 표시를 보이며, 그가 초조하게 말했다.

“제길, 내가 알았다고 했잖아. 그 빌어먹을 검 내려놔.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날 보내 줘.”

“…….”

아르밀라의 요구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태 그녀를 조롱하고 좌절시켰던 자는 어디로 갔는지,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르밀라는 석상처럼 굳은 리카르도를 보며 조소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고?

거짓말.

리카르도는 아르밀라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

아르밀라를 보내 주겠다고, 그도 아니라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된다.

그 말이면 다 되는데.

그 말이면, 아르밀라는 리카르도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데도 그는 그 말만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아르밀라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젠장, 아르밀라!”

검이 목을 깊이 파고들자, 인내심이 닳은 리카르도가 소리를 질렀다.

“검을 내려놔라.”

“…….”

“검만 내려놓으면, 도망치려 한 것도 다 용서해 주겠다. 네가 갖고 싶은 건 다 사 주겠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아르밀라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 리카르도를 응시하며 쓰게 웃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서글피 웃은 아르밀라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손목을 틀자, 안절부절못하며 아르밀라를 보던 리카르도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잠깐…….”

아르밀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안 돼!”

리카르도의 외침이 퍼진 순간. 새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검이 눈 속으로 떨구어지고, 눈바람이 몰아치는 소리에 비명이 섞여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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