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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후회는 필요없다-2화 (3/120)

2화

커다란 창을 통해 눈부신 빛이 방 안을 가득 밝혔다. 거대한 침대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가녀린 여인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빛에 흩날리며 반짝이는 먼지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침대에 달려 있는 화사한 캐노피와 천장이 보였다.

눈앞의 풍경을 멍하니 보던 여인은, 창가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발견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

“그건 이쪽이 할 말인데.”

검은 형체가 여인을 향해 몸을 돌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이며 여인을 관찰하였다.

카타리나 부인이 씻기고 입힌 덕에, 여인은 저택에 막 도착했을 때보다는 제법 사람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어깨선이나, 새하얀 슬립 위로 언뜻 비치는 투명한 살결은 어딘지 안쓰러운 구석이 있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여인은 누구라도 뒤를 돌아볼 만큼 아름다웠다. 청초하고 우아한 얼굴은 마치 인형 같았으며, 선명한 붉은 머리 색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티 없이 맑았다.

여인의 얼굴에는 흔한 주근깨나 점도 하나 없었다. 상품의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듯한 진녹색 눈동자와 장미 꽃잎을 짓이겨 색을 낸 것 같은 도톰한 입술까지. 여인은 신이 공들여 빚은 공예품 같았다.

“오늘로 일주일째인가.”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움은 리카르도에게 아무런 감흥을 자아내지 않는 듯했다.

리카르도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인을 보다가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다가오자, 여인의 녹색 눈동자가 경계의 빛을 띠었다.

“뭐, 뭐가요?”

“그쪽이 여기에 온 지.”

리카르도는 다소 불친절하게 말하며 장갑을 벗었다. 그는 오늘도 새벽부터 미라벨 왕녀를 찾기 위해 수색을 나갔다 온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허탕을 쳤다.

사실 레나토의 모두는 왕녀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벽난로 가득 장작을 태워도 오슬오슬 떨리는 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날씨에 변변한 방한복도 없이 사람이, 그것도 세골린데인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황명은 황명.

합리와 불합리를 따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황제가 대공에게 왕녀를 찾으라는 명을 내렸으니 따라야 한다. 설령 시체를 찾게 되더라도 수색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레나토의 젊은 군주에게 어떤 무고죄가 덧씌워질지 모르니까.

리카르도는 정치적인 공작에 엮이는 것을 질색했다. 그에게는 황실의 인사들이 제멋대로 추측하는 것처럼 북부를 장악한 다음에 황실을 집어삼킬 야심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레나토의 군사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리카르도는 이런 지긋지긋한 의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레나토의 군사력이 뛰어난 것은 국경을 지키기 위함이다. 아르칸젤로의 문턱을 방비하기 위해 애쓴 것뿐인데 그게 꼬투리를 잡힐 일이라니.

미라벨 왕녀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세골린데 왕의 넷째 딸로, 국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왕녀라고 들었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친절한 막내 왕녀.

세골린데의 꽃이라고까지 불리는 왕녀를, 황제는 정략혼의 대상으로 점지했다.

여기까지야 다들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리카르도도 그중 하나였다. 황실이 돌아가는 사정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의 변덕이 그를 이 정략혼에 끌어들이자 상황이 달라졌다.

황제는 미라벨 왕녀가 막내라서 황태자와는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인을 리카르도에게 떠넘겼다.

리카르도는 고분고분히 황명을 받들었다. 그 결과, 매일같이 눈산을 헤치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탐색이 여인과 리카르도를 이어 주었다. 산에 가지 않았다면 여인을 만날 일도, 그녀를 여기에 데려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리카르도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일주일째 자다가 이제야 깨어났지. 오늘도 일어나지 않으면 일부러라도 깨울 생각이었다.”

“제가…… 그, 그렇게나 신세를 졌나요? 죄송해요.”

여인은 리카르도의 말에 사색이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가녀린 몸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을 본 리카르도가 무심히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네?”

“죄송해할 것 없다고.”

“……네.”

여인은 작게 주억거리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마른 체격의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앉으니, 체구가 더 작아 보였다.

“저는 왜 여기에 있나요?”

“몰라서 묻는 건가.”

“저를, 아세요?”

“……뭐?”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여인의 질문에 여상히 대답하던 리카르도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까부터 내가 할 말을 자꾸 뺏는군. 그건 내 질문이야.”

퉁명스러운 대꾸에 녹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여인은 리카르도에게 의지라도 하려는 양, 무릎을 꿇고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 바람에 슬립의 어깨 한쪽이 흘러내렸다. 백합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살결에, 침대에 걸터앉으려던 리카르도가 멈칫했다.

결국 그는 거리를 두고 침대 곁의 의자에 앉았다.

“기억이 나질 않나?”

“저는…….”

여인의 붉은색 속눈썹이 분주히 깜박였다. 커다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막막함에 두려움마저 느끼는 듯했다.

리카르도는 한숨을 쉬고서 침대 밑쪽에 놓여 있는 모포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인은 모포를 건네받고서야 옷매무새가 흐트러졌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몸을 다급히 휘감고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손목에 감겨 있던 황금색 팔찌가 잘그락, 하고 흘러내렸다. 팔찌를 발견한 리카르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건 뭐지?”

“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던 여인은 리카르도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리카르도는 여인을 지그시 응시하며 자신의 손목을 톡, 하고 건드려 보였다.

여인은 리카르도를 보다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팔찌를 보고서는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제 건가요?”

리카르도는 그녀의 물음에 낮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나마 팔찌가 단서가 되지는 않을까 했는데, 여인이 생전 처음 본다는 표정을 지어서 난감한 모양이었다.

“이리로.”

리카르도는 여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인은 그의 손짓에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리카르도의 커다란 손 위로 여인의 자그마한 손이 겹쳐졌다. 날카로운 눈이 신중히 팔찌를 살폈다.

팔찌는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여인의 가느다란 손목에 어울리는 얇은 금색의 띠 모양의 뱅글이었는데, 붉은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었다.

세공의 섬세함과 보석을 아낌없이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급품으로 보였다. 이런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여인도 높은 신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단지 이것으로 신분을 증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게 처음부터 여인의 것이었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리카르도는 팔찌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여상히 말했다.

“뺄 수는 있나?”

여인은 리카르도의 물음에 손목을 살짝 틀어 보았다. 하얀 손목을 비틀자, 팔찌의 이음매가 드러났다.

팔찌의 뒷면을 확인한 리카르도의 눈썹이 꿈틀했다. 팔찌는 마치 자물쇠처럼 잠금장치가 있었다.

열쇠가 없다면 풀 수도 없게끔 되어 있는, 그리고 그나마도 혼자서도 풀기 어려운 디자인이었다.

“열쇠는?”

“네?”

여인은 질문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리카르도를 빤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죄송해요.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기억나는 건 있나? 이름은 뭐지?”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카르도는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놓아주었다.

“나이는?”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이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인은 이번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팔찌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스물둘.”

리카르도가 여인이 가리킨 부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팔찌의 한 지점에 세골린데어로 ‘그대의 스물두 번째 해를 축복하며’라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왜 이걸 몰랐지?”

깊게 잠긴 혼잣말이 작게 울려 퍼졌다. 커다란 손이 여인에게 향했다. 리카르도는 가녀린 손목을 잡아당겨 팔찌를 다시금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팔찌에는 그 밖의 단서가 없었다. 리카르도는 맥이 빠진다는 얼굴로 여인을 놓아주었다.

“스물둘이라면 성인이로군. 세골린데인이고.”

“아마도요.”

여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하얀 이에 짓눌려 붉은 기를 띠는 것을 보던 리카르도가 팔짱을 끼고서 의자에 상체를 기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이번에도 모른다고 한다면 별수 없겠지만.”

“뭔가요?”

“미라벨 에티에네트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나?”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던져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받은 여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리카르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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