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7화 (37/47)
  • 37. 데스 밸리(Death Valley)

    “계십니까?”

    우연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앞이 샛노래지면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떡해, 어떡해, 우연아, 나 어떡해. 엄마는 넋이 나간 상태로 덜덜 떨었다. 똑똑, 계십니까. 툭툭툭, 안에 사람 있어요? 점잖게 두드리던 노크 소리는 점점 커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쾅쾅!

    “씨발, 사람 있는 거 아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엉!”

    우연은 문손잡이를 붙잡고 와들와들 떨었다. 쿵, 쿵쿵쿵, 쾅쾅, 쾅쾅쾅. 낡은 문짝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크게 요동친다.

    “야! 문 열어! 거기 둘 다 있는 거 알아. 김현주, 진우연, 이 씨발년들! 당장 문 열어.”

    우연은 흔들리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고함을 질렀다.

    “엄마! 전화해! 경찰에 전화해! 엄마!”

    “씨발, 말하는 거 봐? 아빠를 엄벌에 처하라고 탄원하더니, 재미 들렸어? 당장 문 열어! 안 열면 들어가서 정말 죽여 버린다!”

    방구석으로 몰린 엄마는 이미 정신이 나갔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기만 한다. 우연은 이를 꽉 악물었다. 제발 주인 할머니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본채는 여기서 뚝 떨어져 있고, 할머니는 가는귀가 먹은 데다 초저녁잠도 많다 했다.

    아니, 차라리 안 오는 게 좋다. 저 인간은 누가 말린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다. 오히려 애먼 할머니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엄마! 얼른!”

    엄마는 전화기를 붙잡은 채 벌벌 떨었다. 이 쌍년들, 신고만 해 봐, 정말 찢어 죽여 버린다! 아빠의 협박이 들릴 때마다 전화기를 든 엄마의 손이 후드드 후드드 떨린다. 쾅, 쾅, 쾅쾅쾅쾅! 문은 부서질 듯 흔들렸고,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우연은 그때마다 펑펑 뒤로 튕겼다.

    “아빠아! 이러지 마! 경찰에 신고할 거야! 엄마! 빨리 경찰 부르라니까, 엄마아!”

    “세상 진짜 잘 돌아간다. 딸년이 애비를 빵에 처박는 시대라니. 말세다, 말세야. 너 지금 문 안 열면 내 손에 바로 죽을 줄 알아! 곱게 안 죽여, 씨발!”

    “여, 여보,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엄마는 결국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통곡했다. 아아, 맙소사. 우연은 황급히 문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전화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 얼른, 신고를, 신고를, 112…….”

    번호를 다 누르기도 전에 쾅,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간신히 잡고 있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면서 문이 활짝 열린다.

    쾅, 우연의 심장으로 벼락이 꽂힌다. 우연은 번호를 누르다 말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눈앞이 온통 하얘지면서 바로 극심한 공포가 엄습했다. 숨이 막힌다 싶은 순간, 아랫배에 거대한 충격이 일었다. 우연의 몸은 붕, 허공을 날아서 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아아악, 여보, 미안,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내가……!”

    엄마가 울부짖으며 비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는 다시 우연에게 다가와 배를 걷어찼다. 온몸이 마비된 우연은 전화기를 움켜쥔 채 그대로 맞기만 했다. 도망이라도 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연은 아빠가 주먹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마취 총에 맞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보, 살려 줘, 미안해, 잘못했어!”

    “여보? 째진 주둥이라고 여보 소리가 나와?”

    퍽, 퍽, 팍, 쩍!

    “아파트 판 거 다 줄게, 시, 십 원 하나, 아악, 안 남기고, 다 줄게, 여보, 악!”

    “맞을 일이 아파트 하나만은 아닐 텐데?”

    두 사람의 몸 위로 주먹질과 발길질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네년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평생 뼛골 빠지게 일해서 먹여 살렸더니 대가가 이거야? 딸년은 애비를 빵에 처박으려 안달이고, 마누라는 그사이 이혼 소송에 인감 훔쳐서 아파트 팔고 외국으로 토끼려고 하셨다? 엉?

    “내가 잠깐 미쳤었어. 누가 꾀었어, 어떤 변호사가, 우연이가 아는 변호사가, 아악, 악, 살려 줘, 악!”

    엄마가 엎드려서 비는 것이 보인다. 우연은 빌지 않았다. 빌 수 있으면 빌 텐데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하니 문득 이상했다. 엄마하고 우연이 힘을 합치면 그래도 이 지경까지 일방적으로 맞지는 않을 텐데. 아빠는 엄마와 나에게 대체 무슨 최면을 걸어 둔 걸까.

    아빠가 우연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올리더니 주먹으로 뺨을 후려갈긴다. 뺨이 휙 돌아가는데 오히려 머리 껍질이 벗겨질 듯 아팠다. 통증이 느껴지는 감각이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다. 뺨을 맞고 있는데 가슴이 아팠다.

    엄마가 엉금엉금 기어 방구석으로 도망친다. 왜 도망치기 쉬운 문 쪽이 아니라 방구석일까. 우연은 엄마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도망쳐서, 주인 할머니를 깨워 신고라도 하기를 바랐지만, 역시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고개를 확 돌려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쥐어 싸고 납작 엎드렸다. 엄마가 입은 바지의 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

    “씨발, 찢어 죽일 년, 아비가, 그렇게 만만해?”

    퍽, 팍, 팍, 쩍, 퍽.

    “내가, 널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아비가 그렇게 만만해? 엉?”

    뜨끈한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픈 건 모르겠고 그저 가려웠다. 그는 머리채를 놓고 발길질을 시작했다. 학, 헉, 학. 아학. 주먹이나 발이 몸에 와서 꽂힐 때마다 몸이 둔탁하게 흔들렸지만,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악!”

    하지만 아랫배를 정통으로 걷어차이자, 그때는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지고 말았다. 배꼽 아래에서 뭔가 터져 나가는 듯한 격통이 치밀었다. 우연은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벌레처럼 몸을 말고 바닥을 굴렀다. 다리 사이로 뜨끈한 것이 느릿하게 흘러내린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빠가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바짝 마주 댄다. 눈이 찌그러져서 아빠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코를 찌르는 술 냄새만은 뚜렷했다.

    “내가 여기 어떻게 찾아왔는지 궁금하진 않냐?”

    “…….”

    “내가 이럴 줄 알고, 너 학교로 만나러 갔을 때 네년 전화기 받아서 거기에 앱 깔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거든!”

    ……역시. 내 전화기로 위치 추적을 당했구나.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빠의 성격을 생각했으면, 공항에서 바로 전화번호를 바꾸거나 하다못해 전화기를 버리기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우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혹시나 아저씨에게 전화가 올까 봐, 지금도 아저씨에게 전화가 올까 봐 전화를 켜 두고 함부로 받는 미친 짓을 했었다.

    아빠가 이를 갈며 시근거린다.

    “씨발, 내내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어디 처박혀 있나 했는데, 며칠 전에 서초동에서 뜨더니, 바로 인천 공항으로 가더니, 며칠 후에 김포 쪽에 뜨더란 말이지? 출국 금지 해 놓은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역시.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 오늘 드디어 발견한 거고.”

    아빠는 방구석에서 굴러다니던 굵은 나일론 줄을 가져오더니 우연의 손을 뒤로 돌려 무거운 탁자 다리에 단단히 묶어 버렸다.

    “여, 여보, 내가 잘못, 콜록, 제발 용서해 줘, 다시는 안…….”

    “주둥이 찢어 버리기 전에 닥쳐라?”

    빡! 소리가 들렸다. 우연은 엄마가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비명이 한참 이어지더니 결국 엄마도 우연처럼 조용해졌다. 잠시 후 엄마는 맞은편 탁자 다리에 똑같은 자세로 묶였다.

    “더러운 년, 왜 오줌은 싸고 지랄이야! 다시 몇 달 동안 오줌 봉지 차고 다니게 해 줘? 엉?”

    “네년이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결혼하고서, 바로 알았다고!”

    “네년이 연애할 때 입버릇처럼 그랬지. 오빠는 왜 이것도 몰라, 왜 저것도 몰라, 오빠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어! 그때 보지부터 째지 말고 아가리부터 확 째 놨어야 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대답해! 대답! 내 말이 그렇게 같잖아? 너 왜 이렇게 내 말을 무시해! 이 쌍년아, 대답하라니까!”

    우연은 시야가 흐릿해진 눈으로, 아빠가 엄마를 묶어 놓은 상태 그대로 샌드백처럼 두들겨 패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정말 우리를 죽일 생각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때릴 수 있을까.

    아니, 아빠는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엄마를 때려 왔다. 엄마를 어느 정도까지 때려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차라리 엄마나 나, 둘 중 한 명이라도 목숨 걸고 도망치는 도박이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어차피 맞을 거, 바로 신고라도 했으면.

    우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와서야 그게 무슨 부질없는 망상일까.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맞다. 우연은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거나, 적극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은, 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도 좋으니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었다. 더 살아 봤자 남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 같지도 않다.

    순간 희미하게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퍼지는 형상처럼 흐릿하고 습하게 퍼진 목소리였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나를 믿고 조금이라도 싸워 줘.’

    ‘제발 조금만이라도 버텨 줘. 나머지는 내가 할게. 내가 목숨 걸고 다 해결할게.’

    ‘영원한 고통은 없어, 우연아. 모든 폭풍은 반드시 끝나게 돼 있어.’

    아, 제기랄. 하필, 이럴 때. 눈의 안쪽이 뻐근해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우연은 이를 악물고 뒤로 묶인 팔을 꿈지럭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렇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조차 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버텨 보려는 마음도, 그가 베풀었던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은 눈물을 툭툭 떨구며 필사적으로 버르적거렸다.

    나일론 끈은 탄력이 없어 강철처럼 손목을 옥죄었다. 손목을 비벼 댈수록 끈과 닿은 부분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손목이 잘리는 것처럼 지독하게 아프다.

    그래도, 손만 빼면, 일단, 문만 열고 달려 나가면, 적어도 주인 할머니라도 깨우면.

    할머니가 대신 신고라도 해 주면. 제발, 제발 좀 풀려 줘, 끊어져, 좀!

    맞고 있는 엄마의 입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축 늘어진 팔다리, 힘없이 꺾인 고개,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은 100년 된 담쟁이 넝쿨처럼 신산스레 엉켜 있었다.

    천천히 눈이 감긴다. 다음은 내 차례. 엄마처럼 맞으면 난 아마 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있었다.

    * * *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

    번호를 확인한 이원의 미간에 날카로운 주름이 잡혔다. 전화기를 쥔 손등으로도 빡빡하게 혈관이 솟아오른다. 그의 주변으로 팽팽하게 긴장한 기류가 훅 차올랐다.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버텼다.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

    벨 소리가 이어질수록 이원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거실은 기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씨발, 뭐 하는 거야! 왜 안 받아! 시끄럽잖아!”

    “저, 전무님, 혹시…….”

    홍연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홍연 씨, 우연이에게 연락 온 거 없었죠.”

    “예. 전무님.”

    “미현이 너한테도 없었지?”

    미현은 입술을 가늘게 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온 전화인지 알 것 같다. 띠리리리, 띠리리, 띠리리. 이원은 계속 받지 않고 버텼고, 벨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이쯤이면 지쳐서 끊을 듯도 한데?

    후우.

    이원이 긴 한숨을 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미간에 긴 주름이 깊게 팬다.

    “……예.”

    이원은 짧게 대답했다. 전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이제 팽팽한 긴장감과 무시무시한 침묵만 감돌았다.

    ― …….

    아주 가늘고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늘지만 날카롭고 절박한 소리가 토막토막 튀어나온다. 전화기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순간 이원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는 여보세요, 하며 큰 소리를 내는 대신, 입을 꽉 다물고 귀를 바짝 기울였다.

    전화기에서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내용은 들리지 않지만,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뚜렷이 알 수 있었다.

    미현은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원의 팔뚝으로 푸르게 혈관이 솟는 것이 보인다. 이원은 한 손으로 수화기를 가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홍연 씨, 경찰에게 신고하고, 우연이 번호로 위치 추적 부탁합니다.”

    “……우연이 지금 한국에 없어.”

    미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원은 미현을 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 인광(燐光)이 튀었다.

    “그럼 지금 어디 있어?”

    “미국…… 마이애미에 가 있을 텐데……? 한국 사람 하나도 없는.”

    이원은 감정을 지그시 억누르며 조용히 말했다.

    “멀리도 보낼 생각이었구나. 그런데 아무래도 출국을 못 한 모양인데. 일단 두 사람이 숨어 있던 곳 주소를 알려 줘.”

    “내가 왜? 지금 우리를 완전히 개털로 만들어 놓고, 온갖 뒤통수는 다 쳐 놓고 나한테 뭘 바라? 대체 왜 내가 그 아이와 오빠를 위해 협조를 해야 해?”

    “유미현, 지금 사람이 잘못될지도 모르는데 그따위 소리가 나와?”

    이원의 목소리가 지글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미현은 차게 조소하며 팔짱을 끼었다.

    “잘못되든 잘되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경찰이나 쫄랑쫄랑 따라가서 말해 보지 그래?”

    “미현 양.”

    우 상무를 잡고 있던 박 이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끊었다.

    “지금은 이렇게 싸우실 때가 아닙니다. 사람이 위험하면 일단 구하고 봐야죠. 나중에 이 사람들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현 양에게도 크게 불똥이 튈 수 있습니다. 한 걸음만 양보하셔서, 그 여자가 숨어 있었던 은신처를 빨리 알려 주세요.”

    그러더니 이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전무님, 이 늙은 사람은 어려서 우 회장님이 발탁해서 키운 사람이라, 그쪽 집안 사정을 먼저 생각했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작고하신 한 회장님과 오랜 친구로 지냈고, 전무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걸 늘 안타깝게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간곡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두 집안을 최대한 다툼 없이 중재하고 연결하려 애를 썼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저한테 섭섭하고 배신감을 느끼셨을 줄 압니다만…….”

    “이사님. 용건만 말씀하시죠.”

    이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박 이사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그동안의 인연을 생각해서, 그리고 2년 넘게 도움을 받으셨던 걸 생각해서, 지금 미현 양이 한 번 더 양보하고 우연 양을 찾는 데 협조해 드리면, 우 상무님 고소 건은 반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원은 박 이사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박 이사는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원은 박 이사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가 우 이사와 한때 깊은 인연이 있던 사이인 건 맞았지만, 아버지와의 우정도 돈독했고, 아버지와 이원에게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박 이사의 마음에 음습한 악의가 없었음은 이원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조차 양쪽을 중재해서, 최대한 양쪽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마무리하려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상황은 우 이사 집안의 완패였다. 협상이고 나발이고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노련한 박 이사는 이 실낱같은 기회조차 놓치지 않는다.

    이원은 시선을 천천히 미현에게 돌리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이게 무슨 상황이야.

    미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죽어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이원의 마음을 유일하게 사로잡았던 그 이상한 아이가 아비 손에 아예 뒈져 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까지는 없었다. 그나마 박 이사가 간신히 마지막 협상 자리를 마련한 것마저 헛되이 할 순 없었다. 꽉 물린 입술 사이로 씹어뱉는 듯한 소리가 한 토막씩 튀어 나갔다.

    “출국 전까지 그 집 엄마는 김포 쪽 민박집에 숨어 있었어. 내가 아는 건 거기 주소까지야.”

    주소를 빠르게 받아 적은 이원은 박 이사를 향해 씁쓸하면서도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가 이사님을 끝까지 옆에 두셨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

    “그래요, 그럼 마지막 거래를 해 볼까요, 우 상무님.”

    “지금 와서, 씨발, 대체 무슨 거래를!”

    “일혁이 넌 입 좀 다물어 봐! 넌 어째 그 나이를 처먹도록 나댈 때, 짜질 때를 구별도 못 하니, 엉!”

    우 이사가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이원의 웃음이 조금 더 비틀렸다.

    “미현이가 얘기해 준 장소가 맞고, 그 아이가 무사하다면…….”

    “…….”

    “그리고 상무님이 그간 공금 유용한 것 잘 채워 놓으시고, 저질러 놓은 일들을 잘 수습하신 후에 조용히 일선에서 물러나신다면, 소장 접수를 보류하고 자료 사본을 미현이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뭐? 씨발, 왜 그걸 미현이에게 넘겨!”

    일혁이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을, 이젠 우 이사가 기어이 주저앉힌다.

    “정확히 말하면, 고발에 관한 결정권을 우성희 이사님 측에 드리겠다는 겁니다. 나중에 미현이가 배우를 그만두고 제대로 경영 수업을 받고, 실력도 충분히 인정받는다면 호텔 지점 중 한두 곳을 맡길 수도 있겠죠.”

    “뭐, 뭐가 어째?”

    “2년간 저를 도와주었던 대가로,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원은 탁자에 놓여 있던 두꺼운 서류 봉투를 미현에게 밀었다. 미현은 멍청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무엇엔가 홀린 것 같다.

    “늦은 밤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원은 말을 덧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성희 이사가 벽에 기대 있다가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아 흐득흐득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 상무의 입에서도 울부짖음이 터졌다.

    “저 씨발, 새끼, 저 배신자 새끼. 흐흐, 흐어어, 거지 같던 새끼가 어디서!”

    “…….”

    “아버지 말이 맞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거야. 여자들이 나대면 안 돼. 이 꼴을 봐, 이 꼴을 보……!”

    쫙!

    벌떡 일어난 우성희 이사가 따귀를 후려치는 바람에 우 상무의 악다구니가 멈춘다. 입 닥쳐! 네놈 새끼가 싸질러 놓은 짓이나 생각해! 이 머저리 등신 새끼야, 엉! 우 이사가 이를 갈며 으르렁대는 사이사이, 미현이 히득히득 이상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홍연 씨, 경호팀 호출해서 따라오세요. 저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이원은 여전히 통화 상태인 전화기를 거치대에 얹은 후 바로 시동을 걸었다. 홍연이 다급하게 만류했다.

    “전무님,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경찰에 신고는 됐고, 한 20분만 기다리면 경호팀과 함께 출발하실 수 있…….”

    “그러면 늦습니다.”

    꽉 짓눌린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비명과 신음, 고함이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전화기에 박혀 있었다.

    “사람이 죽는 데는 20분이 아니라, 이삼 분이면 충분합니다.”

    * * *

    제발,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연은 미친 듯이 묶인 손을 버르적거렸다. 빨랫줄로 쓰이는 나일론 끈은 끔찍하게 질겼다. 손목을 잘라 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으으윽, 으윽.

    간신히 팔을 빼냈을 때, 손목은 살짝 까진 정도가 아니라 피범벅이 돼 있었다. 아픈 것은 느끼지 못했다. 아빠는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주먹질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몸은 망그러진 인형처럼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장면은 베이컨과 달리의 그림을 뒤섞어 놓은 것처럼 괴이하고 그로테스크했다.

    우연은 벽을 타고 살금살금 기다시피 몸을 움직였다. 아랫배는 끊어질 듯 아프고, 하혈이 있는 것도 같고, 다리는 달달 떨렸다.

    어차피 문이 열리는 순간 아빠가 발견할 것이다. 바로 본채로 뛰어가서 문을 걸어 잠가야 할까. 할머니가 문을 잠그고 주무시면 어떡하지. 내가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으면 어떡하지. 문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먼데 어쩌지. 등으로 진땀이 흘렀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가슴을 징징 울려 댄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맞다. 어차피 포기하면, 나는 여기서 죽거나 아빠에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연은 이를 악물었다.

    ‘나를 믿고 조금이라도 싸워 줘. 제발 조금만이라도 버텨 줘.’

    ‘영원한 고통은 없어, 우연아. 모든 폭풍은 반드시 끝나게 돼 있어.’

    가슴 안으로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치민다. 아저씨에게 기댈 수 있던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적어도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말 하나는 위안이 되었다.

    달그락.

    문을 여는 순간, 아빠가 고개를 확 돌린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저, 저년이!”

    우연이 도망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아빠는 황급히 몸을 돌려 따라나섰다. 우연은 맨발로 달렸고, 아빠는 어둠 속에서 신발을 찾느라 약간 뒤처졌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가 있는 본채까지는 너무 멀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아랫배가 찢어지게 아프다. 어떡해, 어떡해. 우연은 배를 움켜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할머니, 할머니! 사람 살려요, 할머니! 살려 주세요! 신고, 신고 좀……!”

    아아, 맙소사.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우연은 아주 잠시, 주인집의 현관 유리를 박살 내고 뛰어 들어가야 하나 망설였다. 어떡해. 어떡해!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요란하게 헐떡대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아악!”

    우연은 머리채를 잡힌 채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 개 쌍년이 어디 도망을 쳐? 아주 발모가지를 분질러 버려.”

    퍽, 퍽, 아빠는 말대로 우연의 다리를 짓밟았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흙바닥에 뒹굴었다.

    “신고, 신고, 그놈의 신고, 다시는 그따위 소리 안 나오게 아가리를 아예 지져 놔야 정신을 차리지.”

    아빠는 우연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문 앞까지 다다랐다. 몸이 돌처럼 굳었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서 문이 닫히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우연은 손발을 허우적대며 뭐라도 손에 잡히는 것이 있나 더듬거렸다.

    그래, 희망이 없다는 건 아는데, 정말 편하게 포기하고 싶은데, 그래도 죽을 때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었던 아저씨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 주었던, 그 진실한 마음에 대한 예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좀 살려 주세요.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막대기 하나, 그럴듯한 유리병이나 돌멩이조차 잡히지 않았다. 보일러실 옆을 지나가며 문손잡이를 잡고 버텼으나, 주먹질 한 번에 그대로 손잡이를 놓쳐 버렸다.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보일러실 앞에 놓인 새까만 기름통이 보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을 움켜쥐고 일어나 힘껏 휘둘렀다. 기름이 있어서인지 통은 무거웠고, 휘두르자 붕, 하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퍽, 소리와 함께 아빠가 나동그라진다.

    “저, 저 씨발년이? 오냐, 해봐, 어디 해봐!”

    우연은 통을 휘두르면서도 점점 뒤로 몰렸다. 아랫배와 다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팔에 점점 힘이 빠져 간다. 원래도 힘이 약한 데다가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휘두를 때마다 입에서 쇳내가 났다.

    “아악!”

    뒷덜미를 다시 잡혔다. 아빠는 우연의 손목을 비틀어 기름통을 뺏은 후, 우연을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 탁자 다리에 다시 묶었다. 아까와 달리 허리까지 친친 묶어 놓고는, 엄마의 허리도 새로 단단히 결박한다.

    “우연이 너도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이게 어디서 겁도 없이 이런 걸 들고 설쳐, 응? 어린애들은 이런 거 함부로 갖고 노는 거 아니야.”

    아빠가 우연이 휘둘렀던 기름통을 들고 오더니 비죽이 웃으며 이죽거린다. 뚜껑을 여는 순간 석유 냄새가 확 올라온다.

    “으읍!”

    머리 위로 기름이 콸콸 쏟아졌다. 입으로 기름이 들어가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연과 엄마의 몸은 기름으로 흠뻑 젖고, 바닥에도 질펀하게 고였다. 아빠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드는 순간 엄마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여보, 왜, 왜 이래! 뭐 하려고 그래!”

    “……아, 아빠.”

    “왜, 이제야 겁나? 칼을 한번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우리 다 같이 죽고 끝내자고, 엉?”

    눈앞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자꾸 치솟는다. 지독한 석유 냄새 때문이겠지. 엄마는 미끈대는 기름을 이용해 간신히 팔을 빼내고는, 아빠를 향해 두 손을 비비며 빌기 시작했다.

    “하지 마, 하지 마, 여보, 죽을죄를 지었어. 시킨 대로 다 할게,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 제발!”

    우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니 외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다.

    다만 후회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나는 2년 전 마포 대교, 그 생명의 다리에서 멋지게 번지 점프를 했어야 했다.

    거기서 아무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 다시 한번 말해 봐. 아빠를 경찰에 신고한다고?”

    “우연아, 하지 마! 죽어도 안 한다고 해! 제발! 잘못했다고 빌어! 얼른, 우연아!”

    엄마는 울부짖었고, 아빠는 손에 들린 라이터를 까닥이며 웃었다. 상황이 정리될 때쯤 항상 보게 되는 승자의 웃음이었다.

    우연은 멍하니 위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까. 저렇게 이를 허옇게 드러내고, 저렇게 의기양양하게. 저렇게 비열하게. 뇌의 한 부분이 고장 난 게 아니고서야.

    우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같이 죽는 거 좋아하시네. 아빤 혼자 튈 거잖아.”

    아빠는 애초에 동반 자살 따위를 할 생각이 없다. 지금 라이터를 켜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아빠는 우리가 비굴하게 울면서 비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빠가 길들인 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린다.

    우연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불 질러. 맘대로 해 봐.”

    아빠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우연은 입술을 힘껏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이제 무서워하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도망치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냥 라이터 켜.”

    “정말 네년 몸뚱이에 불을 놔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직도 네가 잘못한 거 몰라? 어디서 큰소리야, 엉!”

    아빠가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확 들어 올리더니 라이터를 코앞에 들이대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허리가 묶인 엄마가 두 팔을 한껏 버르적대며 찢어지는 소리로 울부짖는다.

    우연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상하다. 대한민국 한가운데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체 사람들은 왜 아무도 와 보지 않을까?

    이곳은 혹시 내 환상 속에 존재하는 세계인 걸까? 아니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인 걸까? 산 자도 망자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깊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 같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코가 둔해졌는지, 석유 냄새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부우우우. 우우우.

    끼이익.

    아빠의 움직임이 멈췄다. 엄마도 비명 지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이렇게 늦은 시각에, 이렇게 외진 곳까지 들어와 줄 사람이 누굴까.

    갑자기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 온다. 이상한 예감이 든다. 등으로 차가운 것이 주르르 흘러내려 온다.

    달칵, 차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툭, 툭, 툭. 툭, 툭. 차에서 내려서 문까지 오는 거리는 몇 발자국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은 그게 누구의 발소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눈을 애써 깜박거렸다. 아저씨가 여기 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위험하다는 거 알고 온 걸까?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오신 걸까?

    여기 오셔도 괜찮을까?

    쾅쾅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계십니까?”

    “사람 살려요, 살려 주세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엄마의 고함이 터졌다. 빡, 아빠가 그 입을 후려갈기는 것이 보인다.

    콰당!

    아저씨는 바로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우연은 힘껏 눈을 치떴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우연아!”

    아저씨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인영만 감지할 수 있다. 저 익숙한 실루엣, 저 그리운 목소리.

    “우연아! ……하느님, 이, 이게…….”

    충격으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눈에서 뜨거운 것이 욱하고 치솟았다. 바짝 말라붙은 줄 알았던 눈물이, 갑자기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저씨는 바로 다가오지 못하고 문가에서 멈춰 섰다. 아빠가 우연의 앞을 가로막고 코앞에 라이터를 들이댄 것이다.

    “씨발, 거기서 멈춰! 멈추라고!”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는지 안 보여? 씨발, 이년 머리카락에 불 싸질러 버리기 전에 거기서 멈춰.”

    아저씨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어 내린다. 바닥을 구르는 석유통, 사방 가득한 석유 냄새, 기름을 뒤집어쓰고 있는 두 여자, 바닥에 쫙 퍼진 기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온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지는 압니까? 당신 딸하고 아내 아닙니까?”

    “딸? 아비 엄벌에 처해 달라고 탄원서 올리는 딸? 집 팔아서 도망치다 걸린 마누라? 다 필요 없어.”

    아저씨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빠는 아빠대로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라이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아빠는 아저씨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딸에게 나쁜 짓을 했다는 증거 하나 없이 무작정 증오했다. 아마도 자신보다 우월한 자에 대한 열등감의 다른 얼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빠는 정정당당하게 패배를 수용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도 무슨 게임을 하다가 지면, 이길 때까지 다시 해야 직성이 풀렸고, 백 원짜리 돈내기를 했다가 져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돈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온갖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학력마저 변변찮았던 아빠는 그렇게 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만만하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갑자기 엄마의 찢어지는 고함이 들렸다.

    “살려 줘요. 제발 살려 주세요. 신고 좀 해 주세요!”

    탁, 타탁, 탁.

    정물처럼 꼼짝도 안 하고 멈춰 있던 아저씨가 움직인 것은, 엄마가 소리를 지른 직후, 아빠가 잠시 몸을 돌려 엄마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던 찰나였다. 껑충, 껑충, 파팟, 우연은 아저씨의 동작이 아주 느린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졌다.

    “저 개같은 년이…… 악!”

    아저씨가 번개처럼 달려와 라이터를 쥐고 있는 아빠의 손을 걷어찬다. 아빠의 손에서 튕겨 나온 라이터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진다.

    아아악,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아빠는 엄마의 발치에 떨어진 라이터를 잡으려 몸을 뻗다가 기름에 미끄러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빠는 급하게 일어나 엄마의 발치에 떨어진 라이터로 몸을 날렸지만, 라이터를 잡지는 못했다. 아저씨가 그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들이박기 시작한 것이다.

    쾅! 쾅! 빡, 빠각!

    벽이 무너질 것 같은 무서운 소리가 났다. 아저씨의 눈빛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눈빛과도 달랐다. 귀신에 사로잡힌 것처럼, 눈빛과 표정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감돌았다.

    “안 돼, 안 돼요, 아저씨! 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그러면 안 돼.”

    우연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안 된다. 아저씨가 저러면 안 된다. 다시 눈물이 터졌다. 아저씨는 이를 악문 채 그의 머리를 계속 벽에 후려쳤다. 악, 악, 아악, 어느 순간 코피가 터진 아빠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악을 쓴다.

    “너 이 새끼, 이 자리에서 다 죽여 버린다!”

    아빠는 간신히 아저씨를 뿌리치고 엄마 발치에 있는 라이터에 손을 뻗으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엄마가 조금 더 빨랐다. 엄마는 그사이 발끝으로 라이터를 당겨 오른손으로 황급히 움켜잡았다.

    아빠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내놔……. 좋은 말 할 때.”

    “…….”

    “지금 내놓으면 아무 짓도 안 하고 용서해 줄게.”

    순간, 우연은 눈을 의심했다. 엄마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씩 웃었던 것이다. 잘못 본 줄 알았지만, 웃음소리는 너무 확실했다. 엄마는 기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미쳤어?”

    “싫어……? 지금 웃음이 나? 이 씨발년이!”

    아빠는 벌떡 일어나려다 다시 미끄러져 기름 위에서 호되게 굴렀다. 다시 일어난 아빠는 이제 엄마와 마찬가지로 기름에 흠뻑 젖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달려들어 라이터를 꽉 쥔 손을 움켜잡았다.

    “내놔, 내놓으라고!”

    엄마는 라이터를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다. 아빠는 다시 엄마를 후려갈기며 팔을 꺾고 손가락을 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연아, 정신 차려.”

    딱, 쩍, 쩍. 뺨이 얼얼했다. 아저씨가 뺨을 내리치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아저씨는 우연을 데리고 나갈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탁자 다리에 묶어 둔 끈이 너무 단단했다.

    “칼, 가위 같은 건?”

    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저씨는 몇 겹으로 단단히 묶인 매듭을 풀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짧은 시간 내에 풀릴 것 같지 않았는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이로 끊어 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빨랫줄로 쓰일 듯한 굵은 나일론 줄이었다. 될 턱이 없었다. 아저씨가 끈을 힘껏 끌어당기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 단단히 묶은 거야. 손이 괴사할 것 같잖아.”

    아아, 어쩐지, 손에 감각이 없고 느낌이 이상하더라.

    우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이 장면이 점점 현실과 붕, 떠서 괴리되는 것 같다. 애초부터 비현실적이었던 장소, 비현실적이었던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시간마저 이상하게 휘어서 흘러가는 것 같다. 현실이 현실 같지 않으니 무섭다기보다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이거 놔! 이거 뭐 하는 거야!”

    아저씨는 자신의 뒤에 매달려 나일론 끈을 끊어 내려 애를 쓴다. 엄마가 아빠의 한쪽 다리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었다. 아빠는 발버둥을 치며 엄마를 떼어 내려 애쓰고 있는데, 엄마의 두 팔은 거대한 프레스처럼 아빠를 꽉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다. 아빠의 다른 한쪽 발이 엄마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치는데도,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연은 멍청하게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와 시선이 맞닿았다. 엄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린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저씨의 숨이 거칠어진다. 아저씨의 온통 일그러진 얼굴과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가 이제야 제대로 보인다.

    “제기랄, 왜, 왜 이렇게…….”

    짜르르…….

    찰칵.

    엄마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흩어지며, 손에 쥐어져 있던 라이터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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