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6화 (36/47)
  • 36. 히든 트랩(Hidden Trap)

    “한 전무! 한이원 이 개새끼 여기 와 있어? 어디 있어! 내가 아주 죽여 버린다!”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미현이 기겁하며 돌아보자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외삼촌이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헤친 채 거실로 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우성희 이사가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얘! 일혁아, 왜 이래! 너!”

    “썅, 이거 놔! 누나 때문에 집안 망하게 생겼잖아! 누나가 저 새끼 편을 들어서 지금 무슨 꼴이 났는지나 알아? 씨발!”

    “상무님, 잠시 진정하세요. 제가 먼저 이야기해 본다니까요. 지금 한 전무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상무님!”

    옆에서 진땀을 폭포처럼 쏟으며 만류하는 것은 박 이사였다. 우 상무는 누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너 이 개새끼. 무슨 개씹창 소릴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죽여 버린다 진짜!”

    붕, 우일혁 상무가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원은 고개를 뒤로 빼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붕, 붕붕, 주먹질이 거세지자, 홍연이 기겁하며 뛰어와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무님! 피하세요, 아니 상무님 이게 무슨, 으악!”

    빡! 홍연이 턱을 맞고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순간 이원이 우 상무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으로 확 처박았다.

    “으악, 씨바……!”

    콰당, 우 상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이원은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뒤로 돌려 경추까지 꺾어 올렸다.

    “와아악, 으악, 이 개새, 아악!”

    몸부림이 격해지자 이원은 무릎으로 몸통을 찍어 누르고 머리를 다시 바닥에 박았다. 쿵, 쾅, 이마가 마룻바닥에 되우 눌린 후에야 몸부림이 조용해졌다. 뒤늦게 날카로운 비명이 치솟았다.

    “이원 오빠!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한 서방, 아니, 한 전무, 아니 대체! 무슨 짓이야! 얼른 손 놔!”

    “우 이사님, 놓긴 뭘 놓습니까! 먼저 주먹질한 게 누군데요! 이 코피가 안 보이십니까? 전무님도 이빨 다 나갈 뻔한 거 못 보셨습니까!”

    홍연이 코피를 휘날리며 달려들어 우 이사와 이원 사이에 끼어들었다. 우 상무가 눈에 핏대를 세우고 누나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씨발, 누나 정신 나갔어? 저 새끼한테 무슨 한 서방이야, 엉! 여자 둘이 아주 집안 말아먹겠다고 작정을 했지! 저 개새끼가 요 며칠 동안 우리 친척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알아?”

    “글쎄요. 상무님이 직접 말씀해 보시죠. 이렇게 큰소리칠 만큼 자랑스러우시면.”

    이원이 말을 끊더니 다시 팔을 바투 잡아챘다.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던 우 상무는 마취도 없이 거세당하는 수퇘지처럼 울부짖었다.

    “최 실장하고 폭행 상해 합의하시려면 애 좀 먹으실 테니, 저는 이쯤 물러나겠습니다.”

    우 상무가 풀려난 것은, 그의 몸부림이 잠잠해지고 꽥꽥대던 소리도 잦아든 때였다. 미현은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뒤늦게 다가온 박 이사가 우 상무를 부축해 일으켰다. 하지만 부축하는 시늉만 했을 뿐, 다시 이원에게 주먹질을 하지 못하게 그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우 상무의 얼굴은 게진게진 흘러나온 눈물과 침으로 엉망진창이었고 얼굴은 고로에서 달궈진 쇳덩이처럼 시뻘겠다.

    “일혁아, 대체 왜 이래? 한 전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저 새끼가 내 뒷조사를 했어, 씨발, 내 밑에서 설설 기며 호텔 일 배울 때부터 씨발, 지금까지 계속…….”

    “상무님, 말씀은 바로 하시죠. 계열사 CEO 직무 역량 평가, 이게 지주사 대표이사인 제가 하는 일인데, 모르셨습니까?”

    이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우 상무는 시뻘게진 얼굴로 부드득 이를 갈았다.

    저 새끼가 경영 수업을 받는답시고 호텔 쪽에 순환 배치 되었을 때, 아주 혼쭐을 내 준 적이 있었다. 하우스키핑 실습만 반년을 시켰고, 까마득한 아랫사람들 앞에서 온갖 모욕을 다 주었다. 그의 얼굴에 대고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싫다는 내색조차 못 하고 고분고분 예,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예, 하며 일을 배우던 놈이었다. 우 상무가 보는 이원은, 패기나 도전 정신 하나 없는, 겁 많은 골샌님에 불과했다. 이런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지금까지 취합한 자료와 경영 실적을 보면, 상무님은 경영자로서의 자격을 논하기도 낯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우영석 회장님께서 성일호텔의 펀더멘털을 튼튼하게 잡아 두지 않으셨으면 제가 대표이사가 되기 전에 침몰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한배에 탄 동업자를 이렇게까지 똥창에 처박아? 너 혼자만 살자고?”

    “혼자가 아니고 2만 명입니다. 동업자가 정신이 나가서 배에 구멍을 내고 있으면 손발을 묶어 놓고, 그래도 계속 뚫고 있으면 바다에 집어 던져야죠. 같이 타고 있는 2만 명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한 전무, 우 상무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까 미현이에게 이야기하다 말았지만, 차제에 이사님도 함께 들으시죠. 최근 몇 년간 성일호텔 실적이 왜 그 모양이었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미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류철을 받아 들고 뒤적였다. 익숙한 얼굴이 여기저기서 보이는 사진, 숫자들이 빼곡한 문서, 녹취록, 이라는 이름이 적힌 문서들이 줄줄 이어졌다. 이원의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해외 원정 도박에 32억 횡령, 금지 물품 밀반입, 선물 투자에서 5년 누적 3500억 순손실, 이를 숨기기 위한 대대적인 회계 장부 조작.”

    “뭐? 그, 그럼 설마……?”

    서류는 두툼했고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현이 미친 듯이 자료를 뒤적이는 동안 우성희 이사는 이마를 짚은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동생이 하던 짓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단조로운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불법 성매매, 여직원 성추행 신고 자료 및 합의서 사본.”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일본 출장 중 마리화나 투약, 증인 진술 녹취록. ……내가 그동안 총력을 다해서 잡아낸 것들이야.”

    “……설마, 정말 외삼촌 뒷조사를 하고 있었던 거야?”

    “다시 말하지만, ‘경영자 직무 역량 평가’. 이렇게 종류별로 고루고루 걸리기도 힘든데. 놀라울 뿐이야.”

    담백하고 조용한 말투인데도, 등을 송곳으로 긁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미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늘 뭉치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우 상무가 드득드득 이를 갈더니 미현과 우 이사에게 고개를 확 돌리며 쏘아붙인다.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누나, 이러니 속 시원해? 동생을 이 지경으로 개 패듯 해서 죽여 놓고, 딸년한테 호텔 떡하니 안겨 주니까 속 시원하냐고!”

    하, 하하하, 하. 이원이 갑자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제가 미현이에게 호텔을 넘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후계자 수업을 한 번도 받은 적 없고. 경영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뮤지컬 배우에게 대체 뭘 믿고 경영을 맡기라는 겁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약속이 틀리잖아!”

    미현이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는 것을, 이원이 손을 잡아 탁자에 눌렀다.

    “귀 멀쩡하니 소리 지르지 마. 그리고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였을 텐데?”

    “뭐?”

    “이 계약은 시작부터 비열했어. 나는 철저하게 무기력했고, 너는 네가 가진 조커의 힘을 잘 활용했지.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다만…….”

    이원은 미현을 누른 손에 힘을 꽉 주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이상으로 비열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원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태연히 받아 내며 천천히 웃었다.

    “이 바닥에서의 승자는, 누가 더 오래 살아남느냐, 그리고 누가 더 완벽하게 비열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야. 그렇지?”

    네가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이용했던 것처럼, 나는 너를 사랑하는 모리스를 이용했다. 미현을 간절히 원하는 모리스는 내가 그녀를 놓아주겠다는 말에 인생 최고의 연기를 해 주었다. 이제는 딱히 비열하다는 가책조차 들지도 않았다. 이원에게 이 거래는 2년 전의 불공평했던 추를 공평하게 되돌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나중에 밝혀진다고 해도 그때는 미현이나 이쪽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끝까지 가 보자는 거야?”

    미현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이원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업계에서는 그의 공격을 ‘여러 겹의 그물’로 표현하곤 했는데, 정말 거대한 그물에 몰려 사냥당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방패를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 막아도 다른 방향에서 끝없이 공격이 들어오는 것만 같다.

    “꼴좋다. 꼴좋아! 누나, 봤지? 저딴 새끼를 뭘 믿고 동생까지 버리고 그 미친 지랄을 한 거야? 꼴좋다고!”

    우 상무가 탁한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씨발, 한이원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넌 지금 대표이사 자리를 완전히 걷어찬 거야. 나도 씨발 기분이 좆같지만, 그래도 누나가 지금이라도 나를 밀어주면 깨끗하게 잊어 줄 수 있어. 내가 빵에 들어앉아 옥중 경영 하는 한이 있어도 네놈 새끼한테 세경홀딩스 안 넘겨!”

    우성희 이사와 미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원에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당연히 외삼촌 쪽으로 돌아서야 하는데, 그러면 이제 호텔 경영 일선에 참여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남이 들으면 상무님이 맡겨 줘서 제가 홀딩스 대표이사 맡은 줄 알겠네요.”

    이원은 미현의 손을 놓아 준 후,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언 전문을 기억하시는 분 계십니까?”

    “미현이와 결혼해야 지분 상속이 된다고…….”

    “그렇죠.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원은 이제 유언장 사본을 꺼내 들고 그들의 눈앞에 잘 보이게 펼쳐 들었다.

    「한세경의 상속분 (주)세경홀딩스의 보통주 785,500주, 25%의 지분에 대하여 상속인 한이원은 우성희 이사의 딸 유미현과의 혼인 신고를 필하기 전까지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음.」

    “지분을 ‘상속할 수 없다.’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없다.’가 아니라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다.’죠. 비슷한 것 같지만 꽤 다른 말입니다. 그렇죠?”

    “…….”

    “지분을 ‘행사’한다는 말이 쓰이는 곳은 단 한 군데입니다. 그게 어디겠습니까?”

    “주주 총회입니다.”

    우 상무를 붙잡고 있던 박 이사가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이원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내내 생각해 봤습니다. 아버지는 왜 오랜 지인이자 법무팀장인 박 이사님이 아니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새파란 정서형 변호사에게 유언 공증을 부탁했을까.”

    박 이사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 얼마 전 일련의 사태로 알게 됐죠. 아버지는 박 이사님이 우 이사님을 비밀리에 지지하던 걸 알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박 이사님께 공증을 부탁했으면, 문구를 고치라고 할 걸 아셨던 거죠. ‘지분을 행사할 수 없다.’, 가 아니라 ‘지분을 상속할 수 없다.’로.”

    이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지 못했다.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끌고 나가는 이원을 보니 점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이원은 좌우를 빙 둘러보며 차분차분 말을 이었다.

    “물론 세경이야 어차피 비상장사고, 지분 소유자도 저와 두 분 빼면 40명밖에 안 되고, 그분들도 모두 이사님 집안분들이니 주총이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하겠지만, 그래도 규정은 규정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이 규정대로 해석하면, 저는 주총에서 상속받은 주식을 ‘지분 행사’만 못 할 뿐이지 증여하거나 매매할 수는 있습니다. 소유권 행사 제한은 없고, 상속 자체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상속세까지 완납한 상태니까요.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 같은 경우는 총회에서 ‘지분 행사’가 불가능하지만, 배당금 수수나 매도, 증여 같은 ‘소유권 행사’는 당연히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증여, 매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박 이사의 얼굴이 허옇게 질릴 뿐이었다.

    “미쳤네. 지분 25%나 되는 걸 누구한테 넘긴다는 거야? 아무리 비상장사지만 세경홀딩스 주식 가치 평가액이 얼마가 나올지 알고? 그 엄청난 세금을 생으로 다 물고?”

    “물론 내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지, 미현아.”

    이원은 빙그레 웃었다. 미현은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만약 내가 PEF(private equity fund) 법인을 하나 만들어서, 음, 일단 이름을 ‘이원 PEF’라고 해 볼까? 거기에 내 지분하고 아버지 지분을 현물로 투자한다고 하면? 그건 법으로 막을 수 없는 소유권 행사잖아?”

    “아……?”

    “그리고 이원 PEF에 다른 주주들의 지분도 현물 투자를 받을 수 있겠지? 물론 다 받을 필요는 없고, 남은 10% 중에서 5.1% 이상만 받으면 될 거고.”

    박 이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우 상무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미현과 우 이사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만 되면, ‘이원 PEF’는 세경홀딩스의 과반이 넘는 지분을 갖는 최대 주주가 되는 거야.”

    “아, 씨발, 저, 저 개새끼 말하는 꼬라지 좀 봐라, 엿장수 맘대로?”

    우 상무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 나간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튀어 나가려는 것을, 박 이사가 필사적으로 가로막는다. 하지만 막고 있는 박 이사의 얼굴도 우씨 집안 사람들처럼 참담했다.

    “웃기지 마! 우리 집안 어른들이 오빠 계획에 눈이나 까딱할 거 같아?”

    “계획은 아니고…….”

    이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가방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주)이원 PEF’라는 글자가 박힌 용인시 소재 사업자 등록증이 눈앞에서 달랑거렸다.

    “이미 했어.”

    미현은 파랗게 질렸다. 이원의 차분차분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지분 20%, 아버지 상속 지분 25%, 나머지 10% 지분을 가진 주주들 중 박 이사님을 제외한 전원이 이원 PEF로 주식 현물 출자나 매도를 결정하셨어. 며칠 동안 주주 40명을 모두 만나고 신규 법인 수속하느라 굉장히 바쁘긴 했어.”

    미현의 등으로 소름이 쫙 올라오며 팔다리가 우들우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연이 도망친 후, 사무실에 계속 출근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실연의 아픔으로 정신없이 헤매며 방에 처박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뒤로 이런 대규모 딜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저 사람은 정말 감정도 없나? 소문으로만 듣던 한이원의 실체가 이런 건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데! 그따위로 배신할 리가 없어!”

    뒤에서 우 이사의 찢어지는 소리가 터졌다. 이원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그분들도 처음엔 완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2년간 그 고생을 했던 거겠죠. 하지만 제가 맡은 이후에 올라온 실적 앞에서 결국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최근 Y시 재개발이나 인도네시아 해상 공항 수주 건으로 점수를 크게 땄죠. 그동안 악전고투하며 버틴 보람이 느껴지더군요.”

    이원은 미현에게 고개를 돌리고 차분차분 말을 이었다.

    “그분들께 솔직히 말씀드렸지. 나는 썩어서 침몰하는 회사 끌어안고 같이 죽을 생각은 없으니, 나에게 지분을 팔거나 이원 PEF에 현물 출자를 해 주지 않으시면, 이 자료를 전부 다 검찰과 신문사에 넘겨서,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성일호텔 침몰시키겠다고. 그래서 우 상무님이 출소한 후에 산뜻하게 바닥에서 새 출발 하게 해 드리겠다고 했어.”

    “미, 미쳤어. 오빠 미쳤지……?”

    “어차피 그동안 제정신으로 살았던 것도 아닌데 뭐.”

    “우리 집안 어른들이 거절하면 어쩌려고 했어? 우리가 그 얘기 듣고도 우리한테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었을 거 같아? 정말 아버지 지분이든, 회사든 다 날려도 상관없었던 거야?”

    이원은 담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분 확보에 실패하든, 호텔이 침몰하든 내 손에 남는 게 없는 건 똑같잖아. 어차피 이번 딜이 실패하면 난 정말 정원사나 고양이 미용사 하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되든 아쉬울 것도 없었어.”

    모인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리스크 회피형 경영자로 첫손에 꼽히던 이원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조리 판돈으로 걸고 이 미친 도박을 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분들도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만, 결국 주식을 저에게 매도해 주시거나 이원 PEF에 현물 출자를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호텔의 침몰보다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서 키우는 게 작고하신 우 회장님의 뜻일 거라면서요.”

    “…….”

    “무엇보다 제 약혼자의 사실혼 상태가, 파혼 사유로 합당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미현은 크게 몸을 휘청거렸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면서 바닥이 빙, 돈다.

    씨발, 저 인간이 저렇게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할 줄이야.

    법원에서의 사실혼 판정은 쉽지 않다. 몇 년 전 동거만으로 사실혼 판정 따위가 나올 리가 없다. 그래서 모리스와의 대화나 소문을 대체 뭐에 써먹을까 했었다. 그랬더니 어른들을 구워삶으려 했던 건가?

    끔찍한 꼰대들로 가득 찬 보수적인 노인들에게 저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그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모리스와 딸의 관계를 알고 있던 우 이사가 울부짖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 나쁜 새끼,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이원이 너, 세경건설이 누구 돈으로 그렇게 컸는지 알면서 이래?”

    “성일호텔이 일정 정도 자본금을 투입했다는 건 잘 압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잘난 아들이 몇 번이나 말아먹을 뻔한 위기를 우리 아버지가 죽을힘을 다해 막아 줬다는 것도 잘 알죠.”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게다가 세경건설을 키웠던 진짜 자본금은 우리 외가에서 나왔죠. 세경건설은 부동산 재벌이었던 우리 외가의 재산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큰 회사고, 세경홀딩스의 제 지분 20%도 제 어머니의 상속분이란 말입니다. 성일에서 보은을 말하기엔 너무 뻔뻔한 것 아닙니까.”

    “이…….”

    이번엔 우일혁 상무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이원은 차디찬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어쨌든 이원 PEF는 이번에 세경홀딩스 지분의 54%를 소유한 최대 주주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원 PEF의 지분 중 89%를 소유한 최대 주주가 됐고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씨발. 미현은 욕설을 삼키며 이를 물었다. 박 이사의 긴 한숨 소리가 뒤늦게 귀에 들어온다.

    ……맞다. 2년 전, 박 이사의 한숨과 걱정을 새겨들었어야 했다.

    ‘미현 양. 그 방법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한 전무는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차라리 외삼촌을 설득하면 제주나 부산 지점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박 이사는 할아버지가 발탁해서 키운 사람이자 한세경 회장과 대학 동창으로, 두 집안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십 년간 맡아 왔다. 한때 어머니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고, 성일호텔을 어머니에게 넘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가 세경건설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2년 전, 미현이 이원과 결혼을 통해 호텔 경영권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듣자, 박 이사는 난색을 표하며 만류했다.

    ‘온건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적으로서는 굉장히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한 전무는, 합법적인 선 안에선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바짝 엎드려서 적의 약점을 샅샅이 조사한 후에 그물을 이중 삼중 쳐 놓고 한꺼번에 죄어들어 가는데, 당해 보면 멘탈이 박살 납니다.’

    ‘이사님, 왜 이렇게 겁이 많아지셨어요? 이번에 그물을 이중 삼중 친 건 오빠가 아니라 저예요.’

    미현이 고집을 꺾지 않자, 박 이사는 긴 한숨을 쉬며 충고했다.

    ‘미현 양, 한 전무는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겁니다. 하려면 처음부터 작정하고 빈틈없이 옭아매야 할 겁니다.’

    미현은 그의 말대로 한이원이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옭아맸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지지 기반이 너무 약했고, 우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그 천재일우의 타이밍에…….

    ……협박 결혼이 아닌 협력 계약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믿을 만한 동역자이자, 공동 경영자로 끝까지 남아 주었을 것이다.

    다 끝났다. 이원이 오랫동안 준비한 그물은 이미 바짝 죄어졌다. 준비 기간은 길었을지 몰라도 승부는 순식간에 끝났다. 이제 외삼촌이나 엄마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배은망덕 스킬이 멋진데? 우리 덕에 간신히 버티던 주제에 이제 와서.”

    “아, 요새는 원래 상태로 되돌린 걸 배은망덕이라 하니? 난 통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말기 암 환자를 협박해서 만든 유언을 무효로 만들고 내 몫을 간신히 되찾은 것뿐인데?”

    “…….”

    “그리고 파혼 소식은 나보다 네가 더 반갑지 않을까? 아니, 뉴욕에 숨어 있던 남편이 가장 반가워하…….”

    미현은 찻잔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촥. 찻잔의 차가 이원의 머리에 그대로 쏟아졌다.

    “전무님!”

    최 실장이 기겁하며 뛰어오려는 것을, 이원은 손을 저어 막았다. 머리카락에서 불그스름한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려 흰 와이셔츠와 슈트를 흠뻑 적셨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지도 닦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미현을 바라보았다. 미현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그래, 이제 속 시원해? 그동안 비굴하게 기고 병신 취급 당하던 거 이따위로 한꺼번에 뒤통수를 쳐 버리니까 속 시원하냐고!”

    “아주 시원해.”

    이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티포트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연 후 미현의 머리 위에 그대로 쏟았다. 촤아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찻물로 홈빡 젖은 미현은 기가 막혀 입만 멍하니 버린 채 말도 잇지 못했다.

    이원은 천천히 덧붙였다.

    “뉴욕에 갈 때까지만 해도, 너를 만나서 제대로 사과하고, 새로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었어. 협력만 해 준다면 적어도 호텔 경영권에 대한 약속만은 지킬 생각이었어. 뮤지컬 그만두고 경영 수업 제대로 받는다는 조건으로.”

    “그런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을 때는, 대가를 치를 각오도 했어야지.”

    미현은 미지근한 물이 줄줄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작고, 가늘고, 허옇고, 매력 없는 아이. 겁먹은 듯한 눈동자만 새까마니 말갛던 그 아이. 대체 저렇게 안목이 높고 까다로운 사람이 왜 그런 아이에게 빠지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원은 눈을 조금 내리깔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참고로, 박 이사님은 너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나에게 오지 않은 1%의 지분이 박 이사님 거야. 이사님은 적어도 우 이사님께 끝까지 충성스러운 분이셨으니 오해는 없길 바라.”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고, 박 이사의 얼굴은 아예 시커멓게 가라앉았다. 미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새파랗게 날이 선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 그래서? 이제 꼴리는 대로 모조리 쓸어 담았으니, 그 애까지 다시 찾아와서 결혼이라도 할 거야? 연락도 안 될 텐데, 지금 어디 있는 줄이나 알아?”

    이원은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독이 오른 미현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 댔다.

    “오빠 마음대로 될 줄 알아? 걔를 데려와서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건 오빠 맘이지만, 그게 얼마나 큰 스캔들이 될지는 잘 알지? 우리가 그냥 둘 줄 알아?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완전히 매장해 버릴 줄 알아!”

    미현은 발을 구르며 악을 썼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눈앞까지, 손에 잡힌 듯이 가까이 있던 것을 말짱 잃어버린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원은 빙그레 웃었다. 웃음 끝은 매우 썼지만, 대답만큼은 확실했다.

    “매장당하는 것 따위는 아무 상관 없어. 어차피 늘 무덤에 파묻혀 있는 기분이었거든. 다만…….”

    너무나 덤덤하고 우울한 대답에, 미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원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대답했다.

    “우연이, 안 찾을 거야.”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당연히 나와야 할 결말이 이상한 데서 어그러진 것이다. 왜냐고 미현은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없었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원의 입가가 이상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애는 날 떠나는 걸 택했어. 그럼 끝난 거지. 네가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하지만 무너질 듯한 표정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뒤에서 가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 이사가 동생 옆에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우 이사는 남동생에게 모든 권리를 뺏긴 것을 평생 억울해했고, 이원이 가장 힘이 없을 때를 노려 오랜 꿈을 이루려고 했을 뿐이었다.

    이원의 성품이야 온건하고 부드럽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성격이 불같고 강한 딸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었다. 저 정도면 딸의 비위도 살살 잘 맞춰 가며 살 거라 생각했었다. 일이 이 지경으로 어그러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미현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 이사의 한숨, 씨발, 꼴 좋아, 꼴 좋다고. 동생 감방까지 보내 놓고, 개털이야. 응, 꼴 좋아 씨발! 우일혁 상무가 내뱉는 욕설만 넓은 거실을 성글게 채웠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

    미현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원의 슈트 안쪽에서 전화기가 울린다. 이원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전화기를 꺼내 드는 것이 보인다.

    “……이건?”

    부재중 메시지로 돌리려던 이원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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