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8화 (38/47)
  • 38.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우연은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도망가요…….”

    기름 먹은 아빠의 바지 자락에 불이 붙었다. 아빠는 바짓단에서 손바닥만 하게 너울대는 불꽃을 발견한 순간, 끓는 물에 처박힌 수탉처럼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티가 어떻게 튀었는지, 이번에는 바닥으로, 그리고 아빠의 한쪽 다리를 으스러질 듯 잡고 있는 엄마에게로 불이 옮겨붙었다. 불꽃은 바닥에서, 아빠와 엄마의 옷 위에서 작은 깃발들이 팔락거리는 것처럼 나부꼈다. 불이라는 게 이렇게 천천히 옮겨붙는 거였던가? 아니, 지금 이 방에서 시간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연은 아저씨의 어깨를 이마로 힘껏 밀며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도망가요. 얼른…… 도망가라고!”

    “소화기는, 잠깐만, 저기 멀찍이 있는 집이 주인집인가……?”

    “아 씨, 이딴 시골집에 그딴 게 있을 거 같아요? 얼른 가요, 제발 나가서 신고나 좀 해 주세요!”

    우연은 이마와 어깨로 아저씨를 퍽퍽 밀어 대며 울부짖었다. 그의 뒤로 불길이 점점 세를 키우는 것이 보이는데, 아저씨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끈을 푸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불은 금방 우연의 발치까지 밀려왔다. 아저씨는 그제야 황급히 일어나 슈트를 벗어 들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아저씨가 옷을 휘둘러 불길을 힘껏 두드렸다. 펑, 펑, 펄럭, 펄럭,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기름이 흠뻑 스민 바닥에서 치솟는 불길을 막을 순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름을 먹은 슈트에도 불이 붙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밟아 끄다가 옆으로 집어 던진다. 그리고 옆에서 소리 지르는 두 사람을 보고, 우연을 보고, 그들을 잠식해 들어오는 불길을 보고, 다시 우연을 보았다. 항상 침착하던 아저씨도 지금은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아저씨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더니, 두꺼운 이불을 끌고 와 가까이 다가오는 불길을 덮었다. 엄마와 아빠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아예 귀가 먹통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이불에 눌린 불은 잠시 숨이 죽는 듯했지만 이내 가장자리를 날름날름 핥으며 더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불이 기름을 흡수했어. 좌우를 두리번대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연아, 수도는 어디 있어? 싱크대나 화장실 위치가…….”

    “마당에, 마당에 화장실하고 수도가 있어요.”

    아저씨는 한참 후 물을 대야에 가득 담아 들고 뛰어 들어온다. 그사이 불길은 이불 위로 훨훨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빠의 처절한 고함이 터졌다.

    “여기 불 좀 꺼! 나 좀 구해 줘! 이봐요 사람 살려, 악, 아아악! 이쪽 불부터 끄라니까!”

    새삼 신기했다. 아내와 딸에게 기세 좋게 기름을 붓고 라이터를 켜서 협박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아빤 어떻게 자기 운명에 대해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었을까?

    촤아아!

    얼굴로 찬물이 튀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저씨는 옷에 불이 붙은 두 사람에게 물을 붓는 대신 우연 앞에 놓아 둔 이불 위로 물을 부은 것이다. 아빠의 절망적인 부르짖음과 욕설이 튀어나오는데, 아저씨는 여전히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젖은 이불을 뒤집어 우연에게 다가오는 큰 불길을 눌렀다.

    “기름에 붙은 불은 물로 끄면 더 번진다. 이렇게 해 놨지만 얼마 못 가. 서두르자.”

    정말 이상하다. 엄마의 고함 소리, 아빠의 비명 소리는 온통 일렁일렁 찌그러져 들리는데, 아저씨의 목소리만 시원하고 뚜렷하게 귀에 들어온다.

    아빠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에게 너무 호되게 맞아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 아빠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높고 이상한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 뜨거, 아 뜨거, 이거 놔! 놔아아! 이 개쌍년, 놔아아!

    결박을 풀기 위해 한참 애를 쓰던 아저씨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으로 범벅이 된 아저씨의 숨이 거칠었다. 입에서 괴로운 듯한 신음이 샜다.

    “우연아. 엎드려.”

    “……네?”

    “고개 좀 바짝 숙여 보자. 몸을 최대한 바닥에 붙여서.”

    “네.”

    “팔이랑 등이 좀 많이 아플지도 몰라.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참자.”

    우연은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바닥에 바짝 숙였다. 아저씨는 왜 이런 순간에조차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까. 아저씨의 세상에는 왜 여전히 미안한 일밖에 없을까. 목이 메었다.

    이마 위로 부드럽고 축축한 무언가가 촉, 하고 와 닿았다.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메마르고 어둑어둑해 보이는 황무지의 색, 그리고 시커먼 얼룩과 땀과 물방울로 엉망이 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자, 이제 눈 감고.”

    그가 우연의 눈을 쓸어내려 감긴 것은, 이미 불길이 그의 등 뒤로 너울너울 치솟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의 헐떡이는 날숨과 뒤에서 치솟는 뜨거운 열기가 훅 느껴진다.

    ……이상해.

    이 모든 장면이 환각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특히 이 장면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아저씨였다. 이런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덜렁 들어와 있으니 이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퍽!

    몸이 크게 흔들리면서 생각이 끊어졌다. 퍽, 퍽, 팍. 아저씨가 탁자의 다리를 발로 후려치고 있었다. 허리와 엉덩이 쪽으로 매서운 충격이 연속으로 박힌다. 팍, 빡, 뻑, 쩍, 쩍. 타격음은 점점 빠르고 과격해졌고, 우연은 팔이 비틀리고 부러질 듯한 충격을 꼼짝 않고 버텼다. 견고하게 들리던 타격음은 어느 순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쩍, 빠직, 쩍, 쩍.

    빠스스.

    조금씩 어딘가가 어긋나고 비틀리던 소리를 내던 탁자 다리는 결국 맥없는 파열음과 함께 중동이 부러지고 말았다. 순간 균형을 잃은 탁자가 우연의 머리 위로 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우, 우연아,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가 기겁하며 황급히 우연을 끌어냈다. 우연은 등과 팔에 탁자 다리를 매단 채 질질 끌려 나왔다.

    “괘, 괜찮아요……. 괜…….”

    괜찮지 않았다. 아저씨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연은 눈앞을 잠식해 들어오는 검은 안개를 걷어 내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지, 몸은 사실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은 흐릿한 시야로, 부러진 탁자 다리에 여전히 결박된 몸과 맥없이 질질 끌려오는 다리를 확인하며, 자신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무시무시한 공포가 치솟았다. 차라리 아까처럼 호되게 아팠으면 좋겠는데, 몸의 감각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의식은 깜박깜박, 오락가락한다. 아저씨의 뒤쪽 머리카락에 불이 옮겨붙는 것이 보인다. 손을 내밀어 저 불을 꺼 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으윽, 읍. 맨손으로 불을 눌러 끄는 아저씨의 짤막한 신음이 귓가에 스며든다.

    ……아아?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나무 기둥과 나일론 줄이 드디어 바닥에 팽개쳐지고, 우연의 몸은 아저씨의 어깨에 걸쳐진다. 아저씨의 셔츠는 너덜너덜했고, 등은 맨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이미 붉게 부풀어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핸드헬드 롱 테이크 샷 영상처럼 흔들리며 이동한다. 방을 떠나기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했다.

    온갖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진 방의 한가운데, 검은 기름통이 섬뜩하게 굴러다니고, 방바닥을 핥고 있던 불길은 이제 몸을 한껏 일으켜 펄럭펄럭 긴 소매를 나부끼듯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불길의 한가운데, 한쪽으로 넘어진 탁자의 다리에는 엄마가 여전히 허리를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전히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있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을 한껏 벌린 채, 그악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버티고 있다.

    이상해. 저렇게 힘이 센 엄마가 왜 지금까지 아빠한테 맞고만 살았을까.

    아빠는, 그 힘이 세고 거침없던 아빠는 왜 엄마의 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우연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인간이 아닌 이상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사람 살려, 살려 줘, 으아아악!”

    아빠의 처절한 비명은 이제 모깃소리처럼 가늘게 들린다. 어느새 아빠의 팔과 다리, 등, 엄마의 머리카락으로 불꽃이 너울너울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엄마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우는 듯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 * *

    왱왱왱왱, 왱왱왱왱.

    삐잇, 삐잇, 삐잇, 삐잇.

    홍연이 경호팀을 끌고 찍힌 주소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소방차와 경찰차의 붉은 경광등 불빛으로 사방 번쩍대고 있었다. 소방차는 아직 불길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작은 건물에 연신 물을 뿌려 대고 있었는데, 본채 건물과 뚝 떨어진,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은 이미 잿더미가 돼 있었다.

    현장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나온 듯 웅성웅성 야단이었다. 홍연과 경호팀은 사람들을 헤치며 이원을 찾기 시작했다. 없었다. 우연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기는 두 개 모두 전원이 꺼져 있었다.

    “우연이는 무사할까요? 설마 전무님이 어떻게 되신 건 아니겠죠?”

    민정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홍연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병원 구급차도 와 있는 걸 보니 이원의 무사를 장담할 수가 없다. 속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경찰 두 명이 할머니 한 명을 붙잡고 사건 경위를 묻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귀가 어두운지 질문마다 두세 번씩 물어 댔고, 화통을 삶아 먹은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초저녁잠이 많아서 일찌감치 뻗어 자는데 현관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갱갱갱 하는 거라, 시방 언놈의 손모가지가 문짝을 뽀사고 자빠졌지, 몽둥이 주워 들고 나가니까, 글쎄 키가 쩌만치 커다란 장정 하나가 야차 몰골을 하고 별채에 불났다고 소방서에 전화 좀 해 달라는 거야. 보니까 창문으로 불이 널름널름하는 게 보이잖어? 자기는 이 환자 데리고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차에 타는데…….”

    홍연의 등줄기가 빳빳해진다. 키 큰 남자? 그럼 혹시 전무님……?

    “차엔 쪼만한 여자가 시체마냥 널브러져 있는데, 그 방에 몇 달 살던, 조금 이상한 여자가 메칠 전에 데리고 온 딸이더만. 온몸이 피투성이에 눈이 뒤집힌 게, 완전히 사람 몰골이 아닌 거라.”

    시체마냥 널브러져? 피투성이? 그럼 혹시 우연이가……? 바짝 긴장해서 귀를 쫑긋 기울였다. 하지만 나오는 내용은 점입가경이었다.

    “그 남자는 더 심했어. 세상에, 옷은 타서 너덜대고 얼굴도 시커멓고 등짝은 아예 시뻘거니 익었더라고. 어이구 끔찍해라. 그런데 그 꼴로 차를 타고 운전해서 나가더라고. 참말로 미쳤는갑다 했지.”

    맙소사, 머리가 지끈한다. 전무님 제정신이신가?

    뒤를 돌아보니 민정도, 다른 경호 직원들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가는 것이 보인다. 할머니는 이제 손발까지 저어 가며 설명을 이어 갔다.

    “정신이 번쩍 나서 얼른 밖으로 나왔는데,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람. 그 속에서 시뻘건 게 툭 튀어나오는 거라. 온 몸뚱이에 불이 붙어 갖고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아이구, 살아생전 그런 끔찍한 꼴은 처음이야. 살려 줘, 살려 줘, 불 좀 꺼 줘, 으아아, 으아악, 그 울부짖는 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끔찍할 수가.”

    “그래 간신히 수돗가로 가서 물을 담아 뿌려 줬는데, 옷은 다 타고 온몸이 머리 꼭대기부텀 발끝까지 시뻘거이 익어서 사람의 형상이 아니야. 그래도 질긴 게 사람 목숨이라고, 병원 차 올 때까지 숨이 붙어 있더라고. 방금 병원 차 타고 간 그 남자.”

    “하지만, 그 방에 들었던 아지매는 탁자에 꽁꽁 묶여서 타 죽었다 안 하나. 어휴 세상에, 내가 원 심장이 벌떡거려서.”

    홍연과 경호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우연의 어머니는 죽은 건가?

    이혼과 외국 도주로 인생의 새 출발을 꿈꾸었던 여자. 우연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던 민정도 하얗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국, 그렇게 돌아가셨네요. 저희가 조금만 빨리 왔어도…….”

    “저희도 바로 출발한다고 한 건데, 중간에 내비가 길을 못 잡아서…….”

    여기저기서 변명 아닌 변명이 흘러나온다. 홍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체한 시간은 고작 15분 남짓이었다. 전무님이 아무리 과속으로 달려 도착했다 해도, 도착 시간 차이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전무님이 그때 서둘러서 먼저 떠나지 않았으면, 일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인 사람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홍연의 전화기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 최홍연 실장님이십니까? 여긴 인천 K병원 응급실입니다.

    * * *

    “……저는 괜찮습니다.”

    이원은 병실에 혼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물론 그 말을 하는 주인공은, 늘 그렇듯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환의도 입지 못한 채 상반신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늦은 시각인데도 전문의 명찰을 단 담당의가 직접 와서 브리핑을 해 주는 걸 보면, 눈앞의 이 환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이원이 ‘불행 중 다행히도’ 유독 가스를 마신 건 아니고, 3도 화상까지는 가지 않았으며, 화상 부위가 얼굴이 아니라 등 쪽이라 눈에 띄지 않고, 화상 전문 병원서 바로 응급 처치를 한 덕에 흉터가 크게 남지는 않으리라는 어설픈 위로를 주워섬긴다.

    “……하지만 당분간 통증은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수포가 군데군데 넓게 잡혀 치료 기간이 꽤 길 거고, 몇 주 동안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우시면 진통제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견딜 만합니다.”

    “전무님! 제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말로 넘기시지 말고, 아프면 좀 아프다고 말씀을 하세요! 안 아프신 거 아니잖아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 가서 우연이 상태나 보고 와 주세요. 아직도 의식을 못 찾고 있는지.”

    “전무님? 지금 우연이도 여기 있나요? 혹시 어떻게 됐습니까?”

    민정이 급하게 묻자 옆에서 처치하던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같이 온 환자분은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신에 타박상과 찰과상이 심하고 발목 염좌에 하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후우. 암울한 한숨이 일행 사이로 퍼졌다.

    “저희가 좀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전무님. 그래도 두 분 모두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니 불행 중 다행이긴 합니다만, 두 시간 넘게 연락이 안 되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아, 전화기를 놓쳐서 깨지는 바람에 못 받았던 건데, 괜한 걱정을 끼쳤군요.”

    이원은 창가에 놔둔 전화기를 가리켰다. 전화기는 그냥 떨어뜨려서 깨졌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부서진 상태였다. 홍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이원이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연이를 조수석에 앉히면서 전화기가 떨어졌는데, 모르고 운전을 했다가 바퀴에 깔려서 이 지경이 됐습니다. 걱정시켜서 미안합니다.”

    이원은 말을 잠시 멈추다가 고개를 들었다.

    “김현주 씨와 진형식 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김현주 씨는 묶인 상태 그대로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형식 씨는 앰뷸런스에 실려서 조금 전에 이 병원으로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됐는지는…….”

    이원의 어깨가 보일락 말락 꿈틀, 하는 것이 보인다. 홍연의 등으로 천천히 냉기가 흘러내렸다. 방을 나가려던 담당 의사가 뒤를 돌아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 환자는 다행히, 방금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과연 다행일까?

    이원을 따라 중환자실로 면회를 간 홍연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일까? 의식을 회복한 것이 다행일까?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라는 문자 그대로 온통 흰 붕대에 감겨 있었다. 붕대 사이로 보이는 것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보이는 붉은 입과 두 개의 콧구멍뿐이었다. 눈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조리 붕대에 감겨 있어서, 그는 옆에 누가 왔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옆에서 기척만 들리면 고함을 질렀다. 진통제, 아아악, 아아아, 진통제 좀 놔 줘, 죽겠어, 죽겠어! 씨발, 사람이 죽겠는데 왜 안 놔 줘어어! 간호원, 간호사 빨리 와 봐!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고통스러워 발버둥 쳤고, 발버둥 칠 때마다 아파서 울부짖었다. 이미 진통제 허용 용량을 초과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설득 따위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원이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것을 보며, 홍연은 조금 섬뜩해졌다. 이원은 형식이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무표정하게, 오랫동안 내려다볼 뿐이었다. 연민도 분노도 당혹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형식은 이원이 간호사인 줄 알고 계속 약을 졸라 대다가 다시 욕설을 퍼붓는다.

    홍연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기다렸다. 이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는 것이 두려웠다.

    아니 사실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경찰도 사건 조사를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형식의 몰골을 보고 말도 못 붙이고 돌아갔고, 이원은 참고인 조사에 응하는 대신 변호인을 통해 경위서와 답변서, 증거 자료만 제출하는 중이었다. 이원이 몸을 돌려 복도로 나오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묻는다.

    “우연이는 어떻다고 합니까?”

    “비슷하다고 합니다. 의식은 있는데, 여전히 아무 말도 없고, 반응도 없다네요.”

    이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우연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형식이 의식을 찾고도 이틀이나 더 지난 후였고, 면담을 허락받기 위해서는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화상은 가벼웠고, 하혈은 얼추 멎었으며, 이제는 팔다리도 조금씩 움직인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우연은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말뿐 아니라 주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앉아 있다가 밥을 주면 먹고, 졸리면 잤다. 멍한 눈으로 복도를 배회하기도 했다.

    다만 이원이 면회를 갔을 때만 반응이 달랐다.

    “우연아.”

    벽을 보고 앉아 있던 우연은, 이원이 부르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만다. 우연의 푸르딩딩하게 멍든 얼굴과 피딱지가 앉은 모습을 본 이원은 주먹을 지그시 쥐고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몸은 좀 어떠니?”

    우연은 대답하는 대신 몸을 주춤주춤 돌리더니 이원을 등지고 돌아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귀까지 막는다. 이원은 한참 동안 대답을 기다렸지만, 우연의 등은 점점 더 조그마하게 움츠러들었다.

    “우연아. 어머니 돌아가셨어.”

    이원은 문가에 선 채, 동그랗게 구부린 등에 대고 말했다. 여전히 우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말에서 약간의 반응이 보였다.

    “아버지는 살아 계시고.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야.”

    자그마한 어깨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꿈틀, 한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원은 벽에 대고 말을 하듯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어머니 장례식은 아직 못 했어. 경찰 조사가 끝난 후에야 치를 수 있을 거야. 정 관장이 알아서 준비할 건데, 참석하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

    “너 무사한 거 봤으니 됐다. 얼른 건강 회복하고, 앞으로는 아프지 마라.”

    문을 닫고 나오는 이원의 얼굴이 너무나 담담해서, 홍연은 그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온 거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원은 그 후로 우연의 병실에 찾아가지 않았다.

    * * *

    “퇴원하겠다고 말해 두었습니다. 그간 일이 너무 밀려서요. 나머지 치료는 서울에서 받도록 할 테니 수속 부탁합니다.”

    호출을 받고 병실에 들어가니, 마침 간호사가 이원의 상처를 소독하던 중이었다. 이쪽으로 돌아앉아서 팔 좀 들어 주세요, 하는 간호사의 말에, 이원이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두 팔을 들어 올린다.

    홍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상반신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려 있었는데, 붉게 진피가 드러난 얼룩들은 생각보다 컸다. 표정은 덤덤했지만, 솜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숨이 짤막하게 끊어지며 어깨 근육이 움찔거렸다.

    홍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연이는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하고 같은 병원으로 옮길까요?”

    처치하는 내내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던 이원은 우연이라는 말에 대놓고 미간을 구겼다.

    “……왜요?”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닌가?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걱정돼서 어떻게 살려고? 매일 상태 확인하라고 인천까지 사람 보내서 달달 볶아 댈 참인가?

    소독과 처치를 마친 간호사가 붕대를 다시 감기 시작하자 그제야 제대로 된 대답이 이어졌다.

    “그때 무사한 거 보고 왔으면 된 거죠. 작별 인사까지 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작별 인사요?”

    홍연은 그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얼른 건강 회복하고, 앞으로는 아프지 마라.’가 작별 인사였어? 대체 그걸 누가 작별 인사라 생각할까?

    이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홍연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가 도의적으로 도울 수 있는 선도 이 정도까지일 겁니다. 어차피 끝난 사이이니, 제가 옆에 있어 봤자 서로 괴롭기만 할 거고요. 얼굴 안 보는 게 서로에게 나을 겁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원이 우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홍연이 아주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우연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우 이사 집안을 작살내고,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우연을 화마에서 구해 냈다. 그래 놓고 이런 반응은 너무 가식적이다.

    홍연의 얼굴을 본 이원이 헛헛하게 웃는다.

    “제가 우연이를 많이 염려하는 건 맞습니다. 당분간 신경이 많이 쓰일 거고 걱정도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 관계는 끝났어요.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으셨으면 좋…….”

    말이 멈춘다. 이원은 시선을 문 쪽으로 둔 채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울대뼈가 물결치듯 길게 움직였다.

    홍연이 닫고 들어왔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은 한 뼘 정도 열리더니 그 상태로 얌전히 멈춘다. “왜, 전무님 뵈러 왔으면 들어가 보시지 않고요.” 보드랍게 달래는 듯한 목소리는 송 여사다. 송 여사는 아예 이 근처에 방을 잡아 두고 병원에 드나들고 있었다.

    “제가 오늘 전무님 퇴원하신다고 얘기는 했어요. 아무 반응도 없어서 못 들은 줄 알았더니…….”

    송 여사가 난처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송 여사는 의외로 우연을 아끼고 살뜰하게 챙겼다.

    이원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문틈으로 보이는 그림자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손짓했다.

    “나 보러 왔으면 들어오지 그러니.”

    하지만 우연은 여전히 문밖에 서 있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원은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과 멍든 팔, 그리고 환자복만 볼 수 있었다.

    이원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진다. 그는 이제 살짝 열린 문틈만 바라보고 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예의 익숙한 미소만 띤 채, 꼼짝 않고 그 지점만 바라본다.

    홍연은 두 사람의 반응이 모두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원은 지나치게 태연했고, 우연은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회피했다. 다만 고통을 제대로 된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만은 두 사람 모두 동일했다.

    간호사가 물건을 정리하고 나간 후, 홍연도 송 여사와 함께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 다쳤을까 봐 걱정돼서 온 거라면, 염려 안 해도 된다. 처치를 일찍 해서 흉터는 크게 안 남을 거고, 그래도 거슬리면 수술하면 된다고 하니까.”

    이원은 다소 껄끄러운 목소리로 먼저 말을 붙였다.

    “말도 없이 도망쳐서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나를 거절한 일로 미안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결혼해서 따뜻한 가정 꾸리는 걸 원했고, 넌 그걸 거절했을 뿐이니까. 네 말이 맞아. 누구든지 원치 않는 결혼은 거절할 권리가 있지.”

    문밖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는 네 결정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아. 어린 나이의 치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사랑이 끓어오르는 동안 곁에 머무르다가 식으면 미련 없이 정리하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겐 현명하고 좋은 방법이겠지.”

    “…….”

    “하지만 우연아,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난 그런 불안정한 관계를 견딜 수 없을 거야. 그러면 끝내는 게 맞지. 결혼이든, 비혼 동거든 두 사람이 모두 동의해야 하는 거니까.”

    이원의 긴 독백에도 문밖의 그림자는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한다. 이원은 짧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시간을 두고 널 설득하려고 생각했었어. 그러면 네가 결국 허락할 거라고 자신했지. 하지만 네가 남겨 둔 그림을 보고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나는, 너하고 있을 때는 늘…….”

    이원은 잠시 말을 골랐다. 우연과 함께 있을 때 ‘한이원’이라는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붕괴하고 해체되는지, 그 낯설고 절망적인 느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내가 아니었더라.”

    이원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문밖에 서 있는 아이가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은 우연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이성적이며, 사회에서 오래 버텨 온 성인이었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사랑하고, 다시 헤어지는 순간을 이렇게 담백하고 이성적으로 넘길 수 있는 힘 역시 나잇값이라 불리는 잡다한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걱정돼서 온 거면 난 괜찮고, 인사하러 온 거면 고맙고. 너도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렴.”

    “…….”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타박, 타박, 타박. 슬리퍼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이원은 점점 작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연이 몸을 돌려 병실로 돌아가는 것을 알았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가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우연이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원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가 발을 디디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자그마한 아이는 가도 가도 슬픔과 고통으로만 점철된 기나긴 길을 걷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 길을 함께 걸어 주고 싶었다. 힘에 부치면 손을 잡아 주고, 때로 많이 힘들면 안고, 업고 그 길고 힘든 길을 같이 걸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걸 거절하고 기어이 혼자 그 길을 가겠다는 거니.

    이원은 이제 치솟는 의심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너는 나를 사랑했을까? 내가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했을까?

    혹은 네 걱정대로, 너의 사랑은 경조증 상태에서 성욕이 기승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열띤 감정 상태였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단칼에 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걸까?

    우연은 복도 끝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한 번도 이원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원은 왜인지 그것마저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현주의 장례식은 보름 후, 인천의 한 공원묘지에서 수목장으로 이루어졌다. 부검과 사건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장례식이 미뤄졌다.

    딸은 참석하지 않았고, 어찌어찌 연락을 받은 몇 명의 친척과 전신을 붕대로 감은 전남편만 휠체어에 실려 왔다. 분골이 나무 주변에 훌훌 뿌려질 때, 그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꺽꺽대며 통곡했다. ‘이젠 다 필요 없다, 나는 살 희망이 없다, 나는 현주를 따라갈 거다.’ 하며 발작하듯 울부짖었으나 그녀의 친척들은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았다. 그들은 전남편에게 할 말이 무척 많은 듯 보였으나 그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병원으로 돌아온 형식은 딸이 입원해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엄마가 죽었는데, 네년은 어떻게 오지도 않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붕대로 칭칭 감고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우연은 새하얗게 질렸다. 여전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침대 구석에 몰려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몸을 잔뜩 오그렸다.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는데, 네년은 왜 장례식에도 오지를 않아! 네가 기름통을 들고 나대지만 않았어도 엄마는 죽지 않았어! 그러고도 숨을 쉬고 밥을 먹어? 네가 사람이야?”

    간병인이 황급히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니 병실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계속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너만 얌전히 있었으면 엄마는 죽지 않았어!

    병실 간호사가 우연에게 황급히 달려왔을 때, 우연은 열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시트를 움켜쥐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 * *

    “……퇴원시키세요.”

    보고를 받은 이원은 이사회를 잠시 중단시키고 옆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입가를 쓸어내리고, 길게 심호흡을 되풀이한다.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우연이는 상처가 크지 않고 통원 치료가 가능한 상태이니, 굳이 아버지와 같은 병원에 있을 필요는 없겠죠.”

    그의 눈치를 살피던 홍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연이는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그 인간은 아무 짓도 할 힘이 없는데…….”

    “글쎄요. 정신을 망가뜨릴 힘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데요.”

    “…….”

    “아기 때부터 사랑과 폭력으로 길들인 아버지와 싸우는 일은, 반항심이나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녀의 세계에선 아버지가 신과 비슷한 위치일 테니, 세상에서 제일 버겁고 희망 없는 전쟁이겠죠.”

    맞다. 그 인간은 이제 딸에게 엄마의 죽음이라는 가책까지 뒤집어씌워 새로운 족쇄를 채우는 중이었다. 홍연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인간은 대체 언제까지 다 큰 자식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걸까요.”

    “죽기 전에는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죽든, 딸이 먼저 죽든.”

    부정할 수 없었지만, 우연에게는 너무 암담한 미래였다. 이원은 등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우연이 치료비는 이쪽에서 정산한다고 해 주세요. 아직 아무 경황도 없을 테니 작은 아파트라도 하나 구해서……. 아니,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일은 아니겠군요. 음…….”

    눈썹을 찌푸리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던 이원이 고개를 들더니 뒤를 돌아본다.

    “……그렇죠. 우연이는 신인 공모전 출신 작가이니, 과천 아트빌리지에 5년간 입주할 권리가 남아 있군요.”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목소리가 한 톤 정도 올라간 것을 홍연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원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트빌리지는 보안도 괜찮고 예술인을 위한 심리 상담도 제공되니까, 치료받으면서 조용히 지내기엔 나쁘지 않겠습니다. 우연이가 괜찮다고 하면 바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수속해 주세요.”

    홍연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신경을 쓰려면 제대로 쓰든가, 끊으려면 확 끊든가, 한 가지만 하라고, 한 가지만. 당신답지 않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하긴, 그게 말처럼 쉽겠냐만.

    한이원 전무는 업계에서 차가운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사업의 진입과 후퇴에 관한 판단이 빠르고 정확했고, 인사(人事)는 냉정했으며, 매몰 비용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따뜻한 성품과 예의 바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인간적인, 이라는 수식어 대신 냉철한, 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곤 했다.

    하지만 한이원이라는 개인 모드로 스위치가 켜지면 미련할 만큼 정이 깊고 감정의 꼬리가 긴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아낌없이 사랑을 줄 줄 알고, 받기도 원했으며, 공감 능력이 뛰어난 만큼이나 외로움도 많이 탔다. 특히 아끼는 대상을 잃는 것을 심하게 고통스러워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전혀 다른 두 개의 모드로 살아가는 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사람이 자신의 모든 소유와 미래를 걸고 사랑한 여자에게 버림받았을 때, 거기다 가장 소중한 성역을 모독당했을 때, 과연 어떤 얼굴이 나타날까. 홍연은 조마조마했다. 지금은 저렇게 태연한 척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지만, 속에서는 재깍재깍 시한폭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대체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감정에 빠지게 되었을까.

    당신은 왜 그렇게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원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뭔가 마땅치 않은 듯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깊이 일그러진 미간과 팽팽하게 긴장한 입술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한참 후, 그가 유리창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 회의 마치고 분양 사무실에 들렀다가 인천에 가 보겠습니다. 최 실장님은 먼저 퇴근하세요.”

    “우연이 병문안입니까? 퇴원 전에 한번 만나 보시려고요? 제가 모시겠…….”

    “아뇨. 진형식 씨 병문안입니다. 우연이는 만나지 않습니다. 안 오셔도 됩니다.”

    딱 자른 대답이었다. 홍연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원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회의실과 연결된 옆문을 열고 들어가 의장석에 앉았다.

    “회의 계속합니다.”

    * * *

    “몸은 좀 어떠십니까. 위독한 고비는 넘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꾸벅꾸벅 졸던 형식의 간병인은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키가 큰 사내 한 명이 침대 옆에서 형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회색 양복 차림의 그는 어깨가 넓고 다리도 긴 편이었는데, 깨끗하고 반듯한 이목에 붉고 선이 단정한 입술까지 합쳐지니 연예인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간병인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들고 온 과일 바구니와 음료수 상자를 내주었다.

    간병인이 알기로, 이 사람은 환자를 병문안하러 온 첫 번째 손님이었다. 환자를 찾아오는 손님이라곤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인지 검사인지 하는 안경잡이와, 병실 밖에서 유령처럼 서 있다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정신이 약간 이상해 보이는 딸뿐이었다.

    “씨발. 네놈 새끼가 여기 왜 와? 죽고 싶어서 온 거야? 엉?”

    하지만 환자는 첫 번째 문안객을 반가워하기는커녕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남자에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불똥이 간병인에게 튀었다.

    “아줌마, 이 개새끼는 왜 들여보냈어? 일 똑바로 안 해?”

    간병인은 옆으로 주춤대며 물러앉았다. 옆에 있으면 언제 엉뚱한 벼락이 떨어질지 몰랐다.

    환자는 화상이 몹시 심했는데, 상처보다 성격이 더 끔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약 기운이 떨어질 때마다 욕설과 고함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고, 참을 필요가 없는 사람에겐 정말 아무것도 참지 않았다. 의사에겐 고분고분했지만, 간호사에겐 반말을 했으며, 간병인에게는 가리는 말이 없었다. 보름 동안 간병인이 세 명이나 갈려 나갈 정도였다.

    ‘거 아줌마 월급 얼마나 받아? 허? 그 정도나 받아? 겨우 똥오줌 치워 주고 휠체어 좀 밀어 주는 일뿐인데? 날로 먹네 정말.’

    ‘하긴 남의 똥오줌 치워 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보통 비위론 꿈도 못 꾸잖아. 아줌마는 지금 대단하신 일 하는 거요.’

    ‘씨발, 아프잖아, 빨리 약 가져오라 해! 귓구멍이 터졌어? 왜 빨리빨리 안 움직여, 씨발 네년이 하는 일이 뭔데.’

    ‘아줌마, 왜 내 말 재깍재깍 안 들어? 나 무시해? 내 꼴이 이렇다고 네깟 년이 날 무시하냐고.’

    ‘돈이 아주 썩어 나가는 줄 알아. 세금도 안 내는 짱개 연놈들한테 이렇게 돈을 퍼 주니까 대한민국이 망하는 거야.’

    우습게도, 그 돈을 주는 건 본인이 아닌 걸 뻔히 아는데 저런 지랄을 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이 개같은 환자 옆에 붙어 있는 건, 간병비가 50%나 더 나오기 때문이었다. 조건이라고는 같은 병원 위층에 입원한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런 웃돈을 내면서도 환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요구가 없는 것이 이상했지만, 다행이기도 했다. 저런 말을 한 번씩 들을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수명이 10년씩 줄어드는 기분이라, 뭔가를 더 잘해 줘야 한다면 돈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워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문안을 온 사내는 욕을 먹고도 태연하게 의자에 앉는다.

    “병문안도 못 옵니까?”

    “나를 이 꼴로 만든 원흉이 여기 왜 와? 약 올리려고? 나 뒤지라고 고사 지내려고?”

    간병인은 속으로 혀를 차며 살금살금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이 꼴로 만든 원흉’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죽은 아내, 정신이 이상해진 딸, 간병인들, 간호사, 의사, 그러더니 이제는 병문안 온 손님까지. 저 인간에게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이 꼴로 만든 원흉’으로 보이는 듯했다.

    문을 열고 눈치껏 나가 있으려던 간병인은 흠칫 걸음을 멈췄다. 환자의 딸이 문 뒤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딸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다가 죽을 뻔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천륜이 뭔지, 하루에 한두 번씩 이렇게 와서 몰래 아빠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곤 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한 번도 없어서, 간병인은 못 본 척하고 문만 한 뼘 정도 열어 두곤 했다.

    병문안 온 사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사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입니까. 저는 진형식 씨가 오래오래 사시길 매일 기도하고 있는데요.”

    환자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병원비 청구 문의는 보험사마다 모두 거절당했다면서요. 스토킹과 살인 혐의로 검찰에서 조사받는 상태니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중환자실, 1인실에 이렇게 오래 계셨으니 병원비가 만만찮을 텐데요. 얼른 퇴원하고 직장에 복귀하셔야죠.”

    병원비, 직장 이야기가 나오자 환자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몸 상태가 다소 호전된 듯 느껴지시겠지만, 그건 마약성 진통제가 한계치까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장기 연용이 금지된 약품이라 조만간 용량이 줄어들 거고, 퇴원 후에는 처방도 잘 되지 않을 겁니다. 만성 통증에 적응하시려면 마음의 준비도 하셔야 할 거고요.”

    그는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 아내가 처분한 재산은 딸에게만 상속될 것이며, 현재 간병인 비용은 딸의 보호 차원에서 이쪽에서 내고 있었지만, 내일 딸이 퇴원하니, 내일부터 간병 비용도 직접 지불하셔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 피의자 소환 조사가 있을 듯합니다. 미리 답변을 준비해 두시는 게…….”

    “씨발, 개새끼, 뚫린 입이라고, 내 꼴이 안 보여? 난 피해자야, 가해자는 너라고! 어디서 구라를 쳐! 씨발 좆같은 새끼야아아아!”

    드디어 환자의 입에서 괴상한 비명이 터졌다.

    “현주 앞에 라이터 던져 준 건 너야. 너 때문에 내가 도망을 못 치고 이 상태가 된 거야. 네놈은 무사할 줄 알아? 그러잖아도 내가 너 벌써 검찰에 고소했어! 조금 있으면 소환장 줄줄 날아올 테니 기대하라고! 요새는 재벌 아니라 재벌 할애비라도 빵에 잘만 처박…….”

    “글쎄요. 두 사람을 스토킹한 것도 당신이고, 때린 것도 당신이고, 묶은 것도 당신이고, 기름을 부은 것도 당신이고, 라이터 들이댄 사람도 당신인데, 제가 기소가 될까요? 전 화상을 입어 가며 당신 딸도 구했는데, 그럼 용감한 시민 표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닥쳐 새꺄!”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을 끊는다.

    “그 상황에서 눈 안 돌아갈 사람이 어디 있어? 이혼한 마누라가 전 재산을 들고 튀지 않나, 딸년은 아비를 엄벌에 처하라고 탄원하지 않나.”

    “그래서 기둥에 묶어 놓고 화형이라도 집행하려고 했던 겁니까?”

    “씨발, 난 화재하고 상관없어! 마누라를 죽게 한 건 화재고, 그 원인은 바로 너야. 라이터를 현주 앞으로 던져 준 게 너잖아. 그 말은 쏙 빼먹었겠지, 엉!”

    “분명 이렇게 헛소리하실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한 일 기억 못 하시고.”

    의자에 앉은 사내는 여전히 차분하게 대답하며 한쪽 다리를 포개고 등을 뒤로 기댔다. 간병인은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내의 얼굴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져서 의아했다.

    “다행히, 사건 정황이 녹음된 45분 분량의 음성 파일이 무사히 복원됐습니다.”

    “뭐, 뭐? 파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연이가 112를 누르려다 당신에게 잡히는 바람에, 단축 번호 1번으로 연결이 됐던 모양입니다.”

    “뭐……?”

    “그게 하필 저였고요.”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환자의 입이 크게 벌어지더니 이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의자에 앉은 사내의 말투도 점점 건조하게 변해 갔다.

    “저는 그걸 끊지 않고 끝까지 들으면서 주소를 찾아갔습니다. 운전할 때 제 기분이 어땠는지, 아마 도저히 짐작 못 하실 겁니다.”

    “그, 그……, 씨발!”

    “어쨌든 검찰에 가셔서 그 파일을 들으시면, 석유를 끼얹고 라이터를 들이대면서 아내와 딸을 협박했던 게 누군지, 참사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몸싸움을 하고 화상까지 입으면서 사람을 구한 게 누구였는지 기억이 좀 나실 겁니다.”

    “…….”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유죄 판결이 나와도 수감될 가능성은 크지 않거든요.”

    “……무슨 말이야?”

    “지금 당신 몸 자체가 감옥인데 굳이.”

    환자의 입이 뻐끔거리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시커먼 입속에서는 꺽꺽대는 소리만 나오고 어떤 말도 나오지 못한다. 붕대에 친친 감긴 얼굴이었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환자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와, 마약으로 눌러놓은 자신의 몸 상태를 모를 수가 없다. 그는 절대 거울을 보지 않지만,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근육이 망가져서 혼자 걸어 다니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 젓가락질도 하지 못해 식사 시중도 들어 주어야 했다. 움직일 때마다 간신히 아물던 피부가 붕대 속에서 툭툭 찢어져 피가 스며 나왔다. 팔다리를 구부리고 펼 때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심지어 소리 내서 웃을 때마다 피부가 터져 나간다. 앞으로 웃을 일이 남아 있기는 할까? 피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저 상태일 것이고, 통증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한쪽 눈도 실명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저 모습으로 외부에 돌아다니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성기와 고환도 녹아 붙어서 사내구실마저 끝장난 상태였다. 아니, 사내구실은 고사하고, 아마 평생 소변 줄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몸 자체가 감옥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물로 얼룩진 누런 붕대가 눈가에서부터 축축하게 젖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키 큰 사내의 얼굴로 깊은 그늘이 내려앉는다. 그는 잠시 눈을 감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나직하게 말했다.

    “예전에 일가족 동반 자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가 제 손에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도 당신처럼 전신 화상 환자였죠. ……전 그 아이에게 매일 찾아가서 밤새 기도를 드렸습니다.”

    “…….”

    “다들 제가 그 아이를 무사히 살려 달라고 비는 줄 알았지만, 그 기도는 도저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꽤 고통스러워 보였다.

    “어린아기의 울음소리는 아주 작고 가늘더군요. 밤새 고통스러워하며 우는데, 거미줄처럼 가는 바늘로 온몸의 통각 세포를 모조리 후벼 파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작은 아이의 코와 입을 막아 괴로움을 멈춰 주려는 자신과 매일 사투를 벌여야 했어요. 하지만 그럴 용기까진 없었죠.”

    “…….”

    “내가 이 고통을 대신 당하게 해 달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 생명을 거둬 달라고, 제발 당장 이 아기 좀 데려가시라고, 그렇게 밤새 기도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이제 환자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간헐적으로 헐떡대는 숨소리마저 멈추자 침묵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저는 한 달 내내 그 고통을 함께 겪었지만, 아이의 아픔을 조금도 덜어 주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한 달 만에 죽으면서, 제 미각과 숙면을 거둬 갔죠. 저는 우연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 상태로, 의무처럼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천천히 말을 잇던 사내가 긴 한숨과 함께 눈을 뜨더니, 환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덧대는 대신 시계를 확인하더니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무병장수하시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정 병원비가 부족하면 찾아오시고요. 치료를 잘 받으셔야 80살, 100살까지 사실 것 아닙니까.”

    간병인은 문가에서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래오래 살라는 덕담에 이렇게 소름이 끼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던 간병인에게 가볍게 묵례하고 문을 연다. 순간 침대 쪽에서 흐윽, 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흐으, 씨발…….”

    환자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허물어진다. 흥건하게 젖은 붕대 사이로 꺽꺽대는 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문에 귀를 대고 서 있던 우연은 몸이 앞으로 확 쏠리며 휘청했다. 갑자기 문이 열린 것이다. 허둥지둥 몸을 돌렸지만 다친 발목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이번에는 몸이 뒤로 쏠리며 벌렁 자빠졌다.

    “……우, 우연아!”

    아저씨가 황급히 팔을 내밀어 나동그라지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손목을 잡는다. 너무 억세게 잡아서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아저씨는 잡아 놓고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 손에 힘을 푼다. 우연은 몇 걸음 비틀대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아저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크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상태 보러 왔니? 걱정돼서?”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말을 안 하기 시작하니, 말을 아예 배운 적이 없는 것처럼, 낱말을 입에서 만들어 내는 것조차 너무 어려워졌다.

    말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편할 때가 더 많았다. 아예 영원히 말을 안 하고 살면 얼마나 편할까. 차라리 벙어리로 태어났으면 아빠에게 맞는 일도 훨씬 줄어들었을 텐데.

    대답을 기다리던 아저씨는 시선을 약간 아래쪽으로 돌리며 말을 돌렸다.

    “몸은 많이 회복된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

    “병실로 들어가야지. 데려다줄까?”

    후우.

    이원은 시선을 돌리고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답답하다. 가슴이 뻐근하게 죄어들고 목이 졸리는 것처럼 아팠다.

    이원은 우연의 병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연의 병실은 위층 가장 안쪽에 있는 1인실이었다. 사박, 사박,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묻고 싶다. 내 이야기 들었니. 너 지금 몸은 어떠니. 어떻게 지냈니. 보고 싶었다. 많이 힘들었지. 의지에 반하여 튀어 나가려는 말들은 갓 잡은 생선처럼 혀 밑에서 펄떡거렸다.

    하지만 이원은 그 말들을 기어이 잡아 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펄떡대는 말을 눌러야 하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와서, 그것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는 데 익숙했다.

    우연의 상태에 대해서는 간병인과 최 실장, 담당 간호사, 송 여사를 통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너무나도 발랄하고 딱 그 나이대 대학생처럼 느껴지던 우연의 상태는, 이제 이해할 만한 회피나 퇴행 반응을 지나 정상 범주에서 너무 멀리 나가 버렸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난 이제……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연의 시선이 느껴진다. 병실 앞까지 왔을 때도, 그녀의 시선은 짙은 회색 정장으로 감싸인 그의 등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고 처절하리만큼 다급한 시선이었다.

    “왜? 내 등을 왜 이렇게 열심히 보는 거니?”

    “…….”

    “혹시 그때 내 등의 상처를 봤나? 그래서 신경 쓰여?”

    “…….”

    “괜찮아, 다 나았어. 바로 화상 전문 병원에서 처치를 받아서, 지금은 괜찮아.”

    고개가 가만가만 돌아간다. 이제 우연은 송 여사나 최 실장처럼 자신이 괜찮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새까만 눈동자에 함빡 맺힌 물은, 얕은 눈시울에서 아슬아슬하다. 저것이 터져 내려오면 자신의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괜찮아. 다 아물었어.”

    “…….”

    “……보여 줘?”

    눈이 깜박, 한다. 다행히 함빡 고인 것이 굴러떨어지지는 않는다. 보여 주세요. 깜박, 보여 주세요. 깜박깜박. 우연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여전히 솔직했다.

    이원은 병실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슈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고 싶다는 낯익은 고함 소리가 이겼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주춤대며 다가온 우연의 간병인에게 슈트와 넥타이, 타이핀과 칼라 바를 맡긴 후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이원은 자신의 등에 남은 상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제대로 아물어 가는 중이고, 흉터는 의학의 도움을 잘 받으면 몇 년에 걸쳐 점점 희미해질 것이며, 수술을 하면 깨끗해지리라는 말은 기억이 났다.

    새로 차오르는 피부의 감각은 기이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민하고 낯설었다. 몸에서 가장 민감한 그곳의 피부처럼, 이원은 그곳에 옷이나 물건이 닿을 때 종종 기겁하며 소스라쳤다. 새살이 돋아난 그 부분은 아예 다른 영토가 된 것 같았다. 백배는 더 아프고, 더 간지럽고, 더 따뜻하고,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이원은 셔츠를 벗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우연에게 등을 돌렸다.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원은 우연의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우는 표정이든, 놀란 표정이든, 웃는 표정이든, 멍한 표정이든. 그래서 이원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네…… 그림은, 다음 날 지웠, 지워졌어. ……아니, 지웠어.”

    이원은 거푸 고쳐 말하다가 입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목이 다시 잠기기 시작했다.

    “계약 하나 남았어.”

    “…….”

    “아직…… 계약이 하나, 남았어. 그렇게 바로 지워지는 걸 작품으로 카운트할 순 없잖아. 20호 사이즈도 아니었잖아. 그렇지 우연아? 아직 계약이 하나…….”

    이원은 이마를 벽에 대고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네 뜻을 존중하겠다는 의지와 당위는 무참해졌고 본능은 한껏 비열하고 비루해졌다. 그림을 더 이상 안 줘도 된다고 해 놓고, 이런 구차한 말이 튀어나와선 안 됐다. 목에서 이렇게 흐느낌이 튀어나와서도 안 됐다. 이 모든 것이 아이에게 족쇄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남은 끈이라곤 그렇게 구차하기 짝이 없는 것뿐이었다.

    우연은 등을 돌리고 흐느낌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는 키 큰 사내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가끔 어깨가 들썩이긴 했지만,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버텼다.

    그날, 그 무섭던 날, 자신을 안고 나오던 아저씨의 등은 붉게 익어 여기저기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제 다 아물어서 괜찮다고 하는 그때의 흔적은 여전히 참담했다.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의 폐허 사진을, 블러 툴로 뭉개 놓은 것 같았다.

    우연은 천천히 다가가 그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이마를 벽에 대고 눈물을 참는 아저씨의 심연에서 시작된 거대한 진동이 우연의 등과 어깨로 전해졌다. 우연은 그의 등에 뺨을 대고 가만히 끌어안았다. 꿈틀대는 진동은 이제 파도처럼 어깨와 등으로, 허리로 물결치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다.

    하아. 하아아. 우둘투둘한 상처가 뺨에, 손끝에 느껴진다. 날숨이 깊고 편안해진다.

    미안하다 해야 할까, 고맙다 해야 할까, 왜 이러냐고 해야 할까, 혹은…….

    사랑한다 해야 할까.

    하지만 아저씨의 흉터에는 그 어떤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고 뛰어넘은 거대한 감정에 어울리는 말을, 우연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연은 그깟 하찮은 말들을 입에 담는 대신,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차근차근 눌렀다.

    형식은 이원이 돌아간 날부터 말을 잃었다. 입맛도 잃었다. 가끔 거울을 보고 넋을 잃었고, 가끔 창밖을 보며 또 넋을 잃었다.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거울을 보며 펭귄처럼 끽끽꺽꺽 울기도 했다. 그의 얼굴을 감은 붕대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날이 점점 늘었다.

    한 달 후, 형식은 4층 야외 휴게실 난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