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42)
  • 20화

    “안 그래도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후작 부인.”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본론을 꺼내려는 것이다.

    슈라더 후작 부인은 키가 아담한 탓에 제크론과 대화하기 위해서 고개를 한껏 위로 치켜들어야 했다.

    “어머나! 윌트슨 공작님이 저를요? 무슨 일로요?”

    그녀가 방글방글 웃었다.

    아까 나를 향했던 예리한 시선 따위는 바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귀엽게 휘었다.

    입꼬리도 위로 향했고, 광대뼈 역시 봉긋 올라갔다.

    제크론의 얼굴과 목소리를 동시에 접한 사람이라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치잇,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향한 이 세계의 차별이겠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들어 천장 쪽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저 위, 어딘가에 있을 이 세계의 창조자를 향한 째림이었다.

    “저희 윌트슨 공작성에 실내악단을 고용하려고 합니다. 괜찮은 실내악단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실내악단 말인가요? 무슨 일로요? 혹시 공작성에서 파티라도 열리나요?”

    “그게 아니라, 성에 상주할 악단이 필요합니다.”

    “뭐라고요? 제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지금 상주라고 하셨어요?”

    슈라더 후작 부인은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작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원래 크기의 두 배만큼 휘둥그레 커졌다.

    제크론은 침착하게 답했다.

    “네,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다. 윌트슨 성에 상주할 실내악단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어머나, 갑자기 왜요? 내가 너무 많이 묻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미안한 표정은 잠시뿐, 그녀는 우리의 사정이 매우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두 귀가 토끼의 귀처럼 쫑긋 세워진 게 비단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리라.

    제크론은 나에게 시선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의 심신 안정을 위해서입니다. 특히 임신 중에는 중요하다고 해서요.”

    “뭐, 뭐요? 심신 안정? 푸웁!”

    너무 놀라고 어이없었던 걸까.

    순간 후작 부인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나, 죄송해요. 순간 너무….”

    갑자기 튀어나온 그녀의 비웃음에 놀란 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후작 부인의 동그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사자 앞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로 뱉어 버린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역량 있는 어르신으로 자리매김 중인 슈라더 후작 부인이었기에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본인이 더 놀란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크론 윌트슨 공작이라면 더했다.

    모두가 그에게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데, 아무리 개인적인 담화지만 그의 발언에 비웃듯 웃음을 터트렸다니.

    슈라더 후작 부인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구겨졌다.

    이쯤에서 나는 매우 의아해졌다.

    심신 안정 때문에 성에 상주할 실내악단을 고용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설마 이 세계는 아직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동네인가?

    그렇다면 처음 내 제안에 웃지 않아 준 제크론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아리송한 심정으로 제크론과 후작 부인을 지켜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제가 좀 신경이 예민한 편이어서요. 그래도 음악을 들으면 금방 괜찮아져서 악단을 고용해 달라고 이 사람에게 부탁했어요.”

    “그, 그랬군요.”

    호호… 슈라더 후작 부인이 민망한 미소를 띠었다.

    “후작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음악이란 게 그렇잖아요. 어지러웠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주죠.”

    “네… 뭐.”

    “게다가 태아의 안정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이미 많은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졌고요.”

    “그런가요?”

    내 이야기가 생소했는지 슈라더 후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녀에게는 생소한 내용이리라.

    아니, 여기에 있는 모두에게 생소한 내용일 수도 있었다.

    분명 ‘교육학자’라고 했지 ‘쉐리던 제국의 교육학자’라고는 안 했으니 말이다.

    “어머, 처음 들어 보세요? 태아 조기 교육에 음악만 한 게 없다고 난리예요, 난리. 어디 태아 교육뿐만일까요? 유아기나 아동기의 아이들에게도 음악 교육은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지요. 두뇌 발달과 집중력 향상, 정서 발달 측면에서요.”

    어라?

    내 말빨 좀 보소?

    전생에서의 배경지식을 대충 버무려서 되는대로 뱉어 낸 말이 꽤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아… 그렇군요.”

    내 말을 경청하던 슈라더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날카로운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신이 난 나는 한술 더 떠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름다운 음악을 파티의 전유물로만 남겨 놓는 것은 큰 손해라고 생각해요.”

    “…….”

    “하루 종일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는 집. 그곳이 제가 평생 살고 싶은 곳이랍니다.”

    호호호, 이쯤에서 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작게 소리 내어 웃는 것과 동시에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제크론의 짙푸른 눈동자에는 신기함, 의아함, 어리둥절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이토록 음악이나 아이들 교육에 조예가 깊은지 미처 몰랐군요.”

    슈라더 후작 부인이 고상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그녀는 베테랑 귀족다웠다.

    후작 부인의 얼굴 전체를 덮었던 웃음기나 민망한 표정은 싹 다 지워지고 없었다.

    그리고 금세 우아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게다가 윌트슨 공작이 이렇게나 공작 부인을 염려하고 신경 써 주는 자상한 분이셨다니요. 우리 남편도 보고 배워야 할 텐데요.”

    호호호, 후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민망한 상황에서는 상대를 칭찬하는 스킬은 언제나 옳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라더 후작 부인.”

    제크론이 공손하게 답했다.

    나도 그를 따라 가볍게 묵례를 했다.

    후작 부인을 흉내 낸 우아한 미소와 함께.

    “내일 바로 괜찮은 실내악단을 섭외해서 연락드리라고 전해 놓을게요. 윌트슨 공작성에 상주하게 될 실내악단인데, 최고 중의 최고로 골라 볼게요.”

    호호호, 슈라더 후작 부인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웃었다.

    와우, 아부 스킬까지 완벽했다.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상큼한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제크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의외로 쉽군.”

    “뭐가요?”

    “조쉬의 이야기와는 딴판이야. 우리에게 실내악단 섭외하는 것을 꺼려 하는 것 같다고 하던데.”

    “그야… 멀론 경과 당신은 다르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조쉬의 일이 곧 내 일인데.”

    “그래도 슈라더 후작 입장에서는 윌트슨 공작가 보좌관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는 것보다야 윌트슨 공작이 직접 와서 부탁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죠.”

    “굳이?”

    제크론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사람은 어쩌면 다른 능력에 비해 정치력은 조금 떨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하긴 본인이 갖고 있는 두뇌 능력과 신체 능력이 워낙 출중했다.

    그러니 타인에게서 뭔가를 얻으려는 심산에서 우러나오는 정치력은 발달할 기회가 많지 않았으리라.

    “제국 내 대세인 제크론 윌트슨 공작이 직접 와서 부탁하는 것과 그 보좌관이 부탁하는 것이 어떻게 같겠어요?”

    “…….”

    “이번 기회에 직접 얼굴도 보고 말도 섞으면서 부탁을 들어주면 누가 알아요? 다음번에 그들이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생길지? 그때를 대비해 미리 적금이라도 들어 둘 심산이었겠죠, 뭐.”

    제크론의 짙푸른 눈동자가 나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왜, 왜요?”

    “내가 제국 내 대세야? 난 호구 잡혀서 부려 먹힘만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아?

    순간 내 입이 쩌억 힘없이 벌어졌다.

    이 사람 진심인 걸까?

    자기가 대세인 줄 모른다고?

    황실에서 자신을 부려먹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납득이 갔다.

    소설 <쉐리던의 기도하는 밤>을 읽은 나에게 이곳은 소설 속의 세계였고, 제크론은 유일무이한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미 이야기의 흐름을 알고 있는 나는 제크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국 그를 주인공의 길로 인도하는 것들임을 안다.

    어떤 힘든 사건들도 결국 그는 완벽하게 헤쳐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을 읽은 독자의 관점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소설의 결말을 알 리 없는 제크론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인생은… 그저 매우 빡셀 뿐이긴 하겠다.’

    지금 그의 일정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주 7일 중 쉬는 날,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으니까.

    ‘하지만 남편님! 아무리 바쁘고 지치더라도 힘내 주세요. 당신은 결국 승리할 것이고, 나는 당신이 일궈 놓은 돈과 권위로 내 생명을 연장해야 하거든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당신은 대세 맞아요, 호구 잡힌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도 돼요.”

    손바닥으로 제크론의 가슴팍을 톡톡 가볍게 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그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 아주 사이좋아 보이십니다!”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고, 붓으로 그린 듯 얇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우리 곁으로 불쑥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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