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42)
  • 21화

    “질문 좀 여쭙겠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 요즘 건강 상태는 어떠십니까?”

    “절 아세요?”

    남자는 매우 전투적으로 우리 앞으로 머리를 쑤욱 들이밀며 말했다.

    “항간에는 두뇌 쪽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돌던데요? 사실입니까? 무슨 일이-”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제크론은 다짜고짜 내게 질문을 퍼붓는 남자에게서 나를 떼어 놓고, 그 사이에 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크론의 널따란 등이 내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어깨가 이렇게나 넓구나. 뒤에서 보니까 키도 더 큰 것 같아. 어깨에서 역삼각형으로 떨어지는 허리… 그리고 탄탄한 ㅎ…ㅣ…ㅂ… 와우!’

    제크론은 상대 남자에게 씩씩거리는 중이었지만, 나는 제크론의 뒤태를 감상하느라 바빴다.

    제크론의 뒷모습은 앞모습만큼이나 남자 주인공스러웠다.

    “저는 제국 중앙 신문의 기자, 닐 베이스입니다. 이쪽은 그림 기자, 필립 빙거이고요.”

    닐이라는 자가 뒤에 서 있던 갈색 단발머리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림 기자라는 필립은 쉴 새 없이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스케치에 집중하고 있었다.

    닐은 입꼬리를 한껏 늘이며 비즈니스적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제크론에게 먹힐 리 없었다.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갔다.

    분명 짙고 굵은 눈썹과 매서운 눈매를 잔뜩 찡그리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기자는 황궁 연회에는 출입할 수 있지만 함부로 질문이나 인터뷰를 시도할 수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 내 말이 틀린가?”

    “네, 물론입니다. 윌트슨 공작님께서 알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저는 그저 공작 부인의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입니다.”

    헤헤, 닐이 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질문은 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제크론이 다시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그것은 묻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협박이었다.

    닐이라는 신문기자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혹시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제크론의 사나운 기세에 기가 팍 눌린 신문 기자는 허둥지둥 움직이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의 명함인 것 같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명함을 제크론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고는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스케치에 열중하던 그림 기자도 닐의 뒤를 따라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갔다.

    도망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푸훗,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제크론의 서늘한 눈빛이 바로 나에게 향했다.

    “당신, 지금 웃음이 나와? 앞으로 이상한 자들이 말 걸어오면 대꾸해 주지 마.”

    “왜요? 내가 두뇌 쪽에 문제가 있어서요?”

    키득거리면서 제크론에게 물었다.

    그의 일그러진 미간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이 여기저기에 퍼진 모양이었다.

    미쳤다는 소문이 아니라서 다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가만있자… 두뇌 쪽에 문제가 있다는 건 결국 미쳤다는 말이랑 같은 거잖아! 아오씨!’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기자들이 사라진 쪽을 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제크론이 명함을 보지도 않고 버리려고 하자, 얼른 그의 손에서 명함을 낚아챘다.

    “버릴 거면 나 줘요.”

    “당신이 신문 기자의 명함으로 뭐 하게?”

    “빵 구워 먹게요.”

    “뭐? 지금 장난해?”

    “네. 장난해요.”

    후훗, 그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 주고는 신문 기자의 명함을 손가방에 넣었다.

    제크론이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더 듣고 싶은 말이 없었던 나는 바로 테이블 쪽으로 갔다.

    황궁 연회에 참석했으니, 황궁 음식을 입에 넣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분명 황궁의 음식들은 제국 최고의 맛을 자랑하겠지.

    “우…와!”

    테이블에는 각양각색의 음식들과 과일들이 가득했다.

    군침이 확 돌았다.

    자연스레 손을 뻗었다.

    “어라?”

    그런데 내 손을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제크론의 손이었다.

    커다랗고 거친 손은 단지 가로막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가락을 끼는 것이 아닌가!

    일명 손깍지.

    “뭐, 뭐예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잘생긴 얼굴 위로 진하게 떠올랐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만상을 쓰면서 그를 째려봤다.

    ‘이 사람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아까는 내 얼굴을 감싸지 않나! 이번에는 또 손을! 뭐 잘못 먹었나? 독이라도 먹은 거 아니야? 진짜 왜 이래!’

    이번엔 진짜 버럭 소리를 내지를 심산이었다.

    그 준비 작업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는데….

    횡격막이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윽!’

    그 이유인즉슨….

    순간 연회장 안의 모든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가, 깊은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오뚝한 콧날이, 하얀 치아가 모두 환하게 빛났다.

    그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음식에 손대면 안 되는 것쯤은 기억하고 있어야지, 당신.”

    “아… 그렇군요.”

    아직 먹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손깍지씩이나 끼고, 또 굳이 이렇게 해사하게 웃으면서까지 말할 건 뭐람.

    제크론을 힘껏 째려보며 손깍지를 훽 풀었다.

    버럭 내지르려던 기운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서인지 나는 곧 뚱한 얼굴이 됐다.

    제크론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화려한 백금 장식의 작은 상자 안에는 황후를 위한 생신 선물이 들어 있다고 했다.

    올해 뎀프샤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나온 것 중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오는 마차 안에서 들었다.

    ‘맞다! 선물을 먼저 드려야 한다고 했었지.’

    먼저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린 다음에야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이 황궁 연회에서의 예법인 것 같았다.

    제크론을 따라 넓은 연회장을 가로질러 중앙 단상으로 향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어머, 디아브 백작 부인!”

    내 요소킨 운동 메이트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이 이쪽을 보며 반갑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귀부인 두 명과 함께 서 있었는데, 짐작건대 지난번 왕립 아카데미에 함께 갔던 귀부인들인 것 같았다.

    잠시 통성명과 함께 인사가 오갔다.

    “말도 마요. 디아브 백작 부인이 요소킨 운동이 너무나 좋았다고 입이 닳도록 자랑을 하더라고요.”

    “어머! 입이 닳을 정도는 아니죠! 내 입은 아직 멀쩡하다고요!”

    “여러분들도 언제든 환영입니다. 아무 때라도 생각 있으면 윌트슨 공작성에서 진행하는 요소킨 수업에 참여해 주세요.”

    빵끗빵끗.

    정말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바짝 당겨 미소를 지었다.

    마치 TV 광고 속의 배우들처럼.

    기필코 그녀들에게 수강 신청을 받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그런데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낯익은 목소리까지 내 광고에 가세하는 게 아닌가!

    “운동은 여럿이 함께할수록 더욱 즐겁게 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제크론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중저음의 동굴 목소리에 함께 섰던 여인들의 동공이 동시에 풀렸다.

    “조… 좋아요!”

    “물론이죠!”

    얼랄라?

    이게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인 거지?

    오늘따라 날 어리벙벙하게 만드는 상황이 연속해서 발생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윌트슨 공작께서 이렇게까지 말해 주신다면야 우리야 당연히 참석할 수밖에 없죠!”

    조안 프렛 백작 부인이라는 여자가 노래를 부르듯 말했다.

    아니, 왜?

    나나 디아브 백작 부인이 말하는 건 듣고 넘겨도 되고, 제크론이 말하면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 거야?

    순간 조그마한 화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도로 눌러 담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맞아요! 운동은 좋은 것이고! 함께하는 운동은 더욱 좋은 것이니까요!”

    이번엔 맨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얼씨구?

    그게 뭐야?

    제크론이 말하기 전까진 운동은 그저 그런 것이었는데, 그가 말한 후로 갑자기 운동은 좋은 것이 되는 건가?

    흥!

    화는 겨우겨우 눌러 담았지만 뿜어져 나오는 콧김까지는 눌러 담지 못했다.

    ‘이것 역시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차이라는 건가!’

    흥이다, 흥!

    또다시 천장 쪽을 힐끗 째려봤다.

    따지고 보면 제크론의 한마디 덕분에 내 목표가 달성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역할 차이에서 오는 영향력의 크기를 몸소 체감했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롤러코스터 같은 기분 변화가 다 호르몬 때문인 걸지도 모르지!’

    그래, 차라리 모두 호르몬 탓으로 돌리는 게 속이 훨씬 편했다.

    에휴우, 짙은 한숨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제크론을 보며 흐물거리는 여인들을 뒤로 하고 중앙 단상 쪽으로 간 우리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저 앞에 있는 황제와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와… 아!’

    입이 절로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 뾰로통 심술이 났던 것은 벌써 휘발되어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기분이 계속 오락가락이다.

    황제와 황후는 황금으로 만든 화려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머리에는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 왕관의 크기가 얼굴만큼이나 커서 멀리서 보니 얼굴 위에 얼굴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무거워서 목이 아플 것 같다는 감상은 일단 저 뒤로 미뤄 뒀다.

    지금은 단지 내 시야에 걸린 모든 것들이 뿜어내는 화려한 아름다움에 전율하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황제와 황후라니! 황금 의자라니! 황궁이라니!’

    모든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난 25년간 대한민국에서 소시민의 삶을 살았던 나에게 쉐리던 제국의 황궁이란 곳은, 지금 내가 발을 디딘 이곳은 그저 대단한 곳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꿈과 환상의 세계였다.

    ‘그리고 내가 그 일부가 된 거지. 내가 황궁에 서 있어!’

    너무도 비현실적인 세계가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시선을 내려 내 몸을 봤다.

    한쪽 팔은 제크론의 팔에 팔짱을 낀 상태였다.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팔찌가, 목에는 주먹만 한 에메랄드 목걸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초록색 바탕에 금색 자수 무늬가 수놓인 드레스는 고왔고, 그 아래로 살포시 보이는 구두도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반짝였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또 완벽했다.

    ‘몇 개월 후에 죽을 운명만 아니라면 말이지.’

    욕심이 났다.

    원래도 욕심이 났지만, 모든 것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살아 있는 이곳 황궁에서 나는 더 욕심이 났다.

    ‘살고 싶어. 난… 꼭 살아남고 싶어!’

    운명이 정해 놓은 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찔끔 새려는 것을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 이 불안은 꼭 호르몬 때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지금 내 몸을 전율시키는 이 불안은 출산의 날을 맞을 때까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내 목숨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좀 더 확실한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 남편,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그도 나를 내려다봤다.

    굳었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비쳤다.

    나도 그를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녀를 만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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