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42)
  • 19화

    “한결 편해 보이는 복장이군. 보기 좋아.”

    “칭찬 맞죠? 고마워요.”

    생글생글 웃으며 드레스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허리가 여유로운 드레스 덕에 볼록 나온 배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내 요구 사항을 제대로 반영해 준 마담 린다를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상냥하게 대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드레스는 초록색 바탕에 금실 자수가 아름답게 박힌 디자인이었는데, 오프숄더 네크라인 스타일이었다.

    허전한 목에 알이 굵은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었는데, 제크론의 시선이 내 목걸이로 향했다.

    “…그 목걸이를 했군.”

    치장을 돕던 케이트와 주디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이 목걸이는 엘프윈의 지난 생일에 제크론에게 받은 것인데, 보석 알이 너무 크고 투박하다며 제크론을 타박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그날 저녁 식사 내내 냉랭한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이 목걸이는 보석 보관함 제일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말이다.

    으으… 지금 밀려오는 이 민망함과 난처함은 분명 내 몫이 아닐 텐데… 그럴 텐데….

    ‘민망해!’

    제크론을 올려다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이거요? 예전엔 제가 보석 알이 크다고 불평했다는 것 같더라고요. 기억나진 않지만요.”

    “…….”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보니 보석 알이 커서 오히려 더 비싸 보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내 얼굴이 작아 보여서 좋은 것 같아요. 선물 고마워요, 당신.”

    내가 그땐 왜 그랬나 몰라, 나는 민망한 미소를 띠며 제크론을 바라봤다.

    그의 동공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다소 냉정한 성격의 제크론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헛, 내가 또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그의 낯선 반응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군.”

    어라?

    제크론이 시선을 살짝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감사 인사를 듣는 게 부끄러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가 내미는 팔에 팔짱을 꼈다.

    순간적으로 멈칫하기는 했지만, 지난번 왕립 아카데미 앞 상점가에서 한번 해 봤다고 이번에는 덜 어색했다.

    역시 인간이란 동물은 적응이란 것을 잘한다.

    *   *   *

    제도로 가는 마법 마차 안.

    비록 10분 남짓의 주행이었지만, 제크론은 엘프윈을 관찰하는 데 짧은 시간을 알뜰히 사용했다.

    둘 사이에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엘프윈은 조용히 앉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제크론은 신문을 읽는 척하면서 힐끔힐끔 엘프윈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엘프윈의 달라진 점과 그렇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말이다.

    투박해서 싫다고 했던 목걸이를 오늘은 좋다며 착용했다.

    게다가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예전의 엘프윈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었다.

    확실히 달라진 점이다.

    ‘하지만 지난번 제도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팔짱을 낄 때마다 잠시 주저하는 모습은 여전하단 말이지….’

    엘프윈은 그를 비롯한 다른 누구와의 접촉을 그다지 반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녀의 많은 부분이 기억을 잃기 전과 달라졌지만, 접촉을 꺼려 하는 부분만큼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저 기억을 잃었다고 하기엔 인격 자체가 달라져 버린 엘프윈이었다.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정체 모를 의심들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과거와 비슷한 점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내를 의심하는 제 자신을 비난했다.

    ‘오늘은 확실히 확인해 봐야겠어.’

    제크론의 꽉 다문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랬다.

    제크론은 확신의 뭔가가 필요했다.

    엘프윈이 진짜 엘프윈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제멋대로 떠지는 의심의 눈동자를 완전히 가려 버릴 확신 말이다.

    *   *   *

    “우…와!”

    황궁이란 곳은 정말 휘황찬란한 곳이었다.

    윌트슨 공작성도 거대했는데, 황궁은 더했다.

    ‘이름값은 제대로 하는군!’

    휘둥그레 뜬 두 눈을 이쪽저쪽으로 굴리며 화려함의 극치를 감상했다.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패전국을 흡수하여 제국을 완성한 쉐리던 제국.

    아직 제국 곳곳에서 전쟁 복구 작업이 한창이라 국세를 충분히 거둬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제국의 상징인 황궁의 재건축에만큼은 힘을 제대로 빡 준 듯했다.

    황궁 전체 기둥과 타일의 화려한 금장식이 압권이었다.

    연회장 천장을 가득 메운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와아… 진짜 대단하다! 엄청나다! 정말이지… 훌륭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반짝거리는 것들투성이였다.

    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연회장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데 바빴다.

    “엘프윈,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전방 주시를 게을리하는 내게 제크론이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잔소리가 무색하게도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귀부인과 부딪칠 뻔했다.

    다행히 불상사 직전에 제크론이 내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아 줬고, 덕분에 타인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제크론과 충돌했다는 데에 있었다.

    “아앗!”

    내 이마와 코가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콩 부딪쳤다.

    내 등허리를 바짝 감싸 안은 불끈거리는 팔이 확연히 느껴졌다.

    쿵쾅쿵쾅, 누군가의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를 때렸다.

    내 심장인가?

    아니면 제크론의 심장인가?

    모르겠다.

    “당신, 괜찮아?”

    머리 위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으으, 창피해.’

    허흡, 그런데 다음 순간에 보인 제크론의 행동에 나는 헛숨을 삼켜야 했다.

    그는 내 등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고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으… 잉?’

    이 사람이 미쳤나?

    뭘 잘못 먹었나?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굳은살이 박여 거친 그의 손바닥이 내 뺨에 닿았다.

    몸속 피가 모두 얼굴로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얼굴은 그의 손에 의해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제크론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그런데 제크론이 싱긋, 웃는 게 아닌가!

    ‘뭐, 뭐야?’

    당혹스러웠다.

    그것도 몹시.

    너무 놀란 나머지 쿵쾅쿵쾅,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제크론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소리라도 버럭 질러 주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손에도, 입술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 열심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눈을 힘껏 부릅뜨고, 콧구멍을 벌렁벌렁거리고, 입술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괜찮아, 당신?”

    “덕분에요.”

    “당신 얼굴이 빨개.”

    “창피해서 그렇죠.”

    “이런 얼굴… 귀엽군.”

    “놀리지 말고, 이제 놔줘요.”

    “그러지.”

    제크론의 손에서 자유로워진 내 얼굴은 재빨리 다른 곳으로 향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왜 그랬냐.’라는 질문은 나중에 따져 묻기로 했다.

    지금은 몸 전체가 너무 쿵쾅거려서 생각도,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엘프윈, 진정하렴.’

    나는 가슴을 토닥토닥 쓸어내리면서 속으로 엘프윈을 다독였다.

    갑작스레 훅 들어온 제크론에게 열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엘프윈의 심장이니까 말이다.

    시선을 돌렸는데 아까 부딪힐 뻔했던 귀부인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귀부인은 깃털 부채로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부채 뒤에는 분명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본 듯한 표정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슈라더 후작 부인 아니십니까?”

    제크론이 먼저 그녀를 알아봤다.

    그러면서 내게 살짝 눈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사람이 슈라더 후작 부인이구나.’

    이렇게 제 발로 와 주시다니, 오늘 연회 참석의 목적도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 공작 부인.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 참 보기 좋네요!”

    호호호, 부채를 살랑이며 이쪽을 쳐다보며 웃는 슈라더 후작 부인은 아담한 키에 동글동글 통통한 몸매를 지닌 40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사실 황궁으로 오는 마차에서 내내 원작 소설의 내용 중 ‘슈라더’라는 이름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떠올려 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원작 소설을 읽은 지 얼마 안 된 내가 ‘슈라더’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슈라더 후작 가문은 쉐리던 제국 내에서는 명망 높은 고위 귀족 가문이기는 했으나, 원작 소설의 주요 줄거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역할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가족들도 아니었고, 악역도 아니었으며, 비중 있는 조연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원작 소설과 별로 상관없는 인물이라니 확실히 부담은 덜 가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슈라더 후작 부인을 살폈다.

    제크론에게 향했던 후작 부인의 시선이 바로 나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슈라더 후작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얼른 꾸욱 눌러 담았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진짜 엘프윈이 후작 부인을 전에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후작 부인의 얼굴은 푸근한 인상을 풍겼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와 그녀 사이에는 확실한 벽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호감이 없었다.

    아니지.

    그녀는 엘프윈에게 호감이 없었다.

    후작 부인은 한껏 예의 차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대를 앞에 둔 사람의 분위기를 숨기지 않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요. 오늘은 키도 별로 안 커 보이고요.”

    “네. 몸이 점점 무거워지다 보니 좀 더 편한 드레스, 편한 신발을 찾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훨씬 좋아 보여요.”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억지로 웃으려니 입가 쪽 근육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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