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2)

13화

빨개진 그의 귀를 보며 물었다.

“더워요, 당신?”

“아… 응, 좀 덥군.”

그는 제 귀에 닿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손으로 귀를 감싸며 유리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긴 우리가 앉은 테라스 테이블 자리는 햇빛을 직방으로 받는 곳이고, 그는 셔츠에, 베스트에, 재킷까지 갖춰 입은 상태라 더울 만했다.

제크론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운동 선생과는 이야기가 잘됐나?”

“네, 다음 주부터 주말마다 오셔서 수업 진행해 주시기로 했어요.”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룹 수업을 하게 됐다고 알려야 했다.

강의실을 메릴 선생님에게 임대해 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제크론은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으므로 용기를 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룹 수업을 하기로 했어요.”

“무슨 수업?”

“그룹! 수업이요.”

“당신 말고도 다른 수강생들도 우리 성으로 온다는 것인가?”

“네.”

끄덕끄덕.

케이크를 한 입 더 입에 물며 여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당신과 수업을 같이 들을 사람이 있다고? 당신에게 그럴 만한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빠직.

순간 욱해서 소리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진짜 바보한테 ‘너 바보지?’라고 말하면 화나는 법이다.

진짜 친구가 없는 사람한테 ‘너 친구 없지?’라고 말하면 화나는 법이다.

그러니까 말 좀 가려서 해 주면 좀 좋아, 이 사람아!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친구!”

“친구 따위 필요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아, 엘프윈이 그랬구나.

친구 ‘따위’라고 했구나.

친구가 필요 없다고 했구나.

빠드득, 어금니를 꽉 힘주어 물었다.

“인생에서 꼭 많은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임신 중에는 친구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혼자 있으면 기분이 오락가락 기뻤다가 슬펐다가 엉망이라서….”

“좋아. 어쨌든 지금은 당신 한 명이라는 거지?”

확인사살인가?

싸우자는 건가?

남자 주인공이 뭐 이래?

기본적인 매너가 없어, 매너가!

하지만 사실이니까, 일단 넘어가 주도록 하겠다.

“네, 저 한 명 맞아요. 지금은 그렇지만 곧 수강생이 많아질 거예요.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의 요소킨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유행할 테니까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감이죠, 감! 여자의 감!”

당당하게 외친 나는 커다란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우걱우걱 씹었다.

그가 고이 접은 냅킨을 내게 넘겼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으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그런데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냥 제크론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화르르 일었다.

사실 난 그다지 고분고분한 성격이 못 된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진짜 엘프윈과 얼핏 닮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건네는 냅킨을 받는 대신 내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내밀었다.

눈빛으로 그가 직접 닦아 주길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푸스스,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짙푸른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반으로 접혔다.

‘이 사람,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남자 주인공의 웃는 모습에 끄떡없는 심장을 갖고 있는 여자 캐릭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당연히 없을 것이 뻔했다.

여기는 소설 세계이고, 그는 남자 주인공이었으니까.

그의 모든 모습은 옳았으니까.

한낱 조무래기 조연에 지나지 않은 나는 남자 주인공의 미소 한 방에 흐물흐물해지는 심장이 야속했다.

제크론은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줬다.

“고마워요.”

무시하지 않아 줘서.

아내에게 무심하고 냉정할 줄만 알았는데, 이런 모습은 색달랐다.

얼굴에 조금씩 열감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부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혹시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어라?

이 여자 어디서 봤었는데?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의 요소킨 운동 수업을 들으시나요?”

그래, 맞아!

그녀는 오늘 낮에 봤던 여자였다.

금발 머리의 그녀는 왕립 아카데미 교정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세 명의 귀부인 중 한 명이었다.

나와 같은 임산부인.

나머지 두 명은 옆 테이블에 앉은 채 여기를 보고 있었다.

“네, 맞아요. 오늘 선생님과 만났고, 다음 주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기분 좋은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오늘 만났다고요? 저희도 오늘 메릴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일정이 다 꽉 찼다고 하더라고요.”

“…….”

“그런데 부인께서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고요?”

“저 혹시… 수업 같이 들으실래요?”

벌떡 일어나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구불거리는 금발 머리에 옅은 파란색의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당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대뜸 수업을 같이 듣자고 하면 놀라는 게 당연했다.

부연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행운에 자꾸만 웃음이 나 한동안 말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   *   *

“이 찻잎의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있겠소?”

매튜 루이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 안에는 엘프윈의 방에서 발견된 아르젠토 찻잎이 들어 있었다.

매튜가 의학 서적과 연구실 집기 쇼핑을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바로 제도 최대의 약재상이었다.

“아르젠토 찻잎이군요.”

반질반질 대머리 약제사가 돋보기로 찻잎을 꼼꼼히 살폈다.

“순도가 높고 최상급의 찻잎입니다. 이 정도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은 위벨 신전뿐입니다.”

제국민의 대다수가 섬기는 위벨교의 신전에서는 특정 약재를 재배하고 상품으로 만드는 사업도 진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르젠토 찻잎이었다.

위벨 신전에서 만드는 약재의 경우 상품의 질이 높아서 좋은 가격에 거래됐다.

“하지만 신전의 찻잎들은 진단서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게 아니오?”

“그렇지요.”

그런데 엘프윈 마님은 진단서가 없었음에도 찻잎을 구할 수 있었단 말이지.

‘어떻게 구하셨을까?’

매튜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진단서 없이 신전에서 이 찻잎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전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엄연히 불법인뎁쇼.”

“그렇지.”

매튜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진단서를 위조했다면 모를까. 어쨌든 신전에서 찻잎을 구하기 위해서는 꼭 진단서가 필요하죠.”

“진단서를 위조한다고?”

“돈을 위조하고, 졸업장을 위조하는 사람들도 있는 마당에 진단서라고 위조하지 못할 리가 없죠.”

“하긴, 그렇군.”

꽤 일리 있었다.

하지만 엘프윈 마님께서 진단서를 어디서 위조했단 말인가?

그녀에게 그럴 만한 정보력이 있었던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단 말이지.’

하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르젠토 찻잎을, 그것도 다량으로 갖고 계셨던 분이 아닌가.

약제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면밀히 찻잎을 살폈다.

돋보기로도 살피고, 조금 잘라 맛도 봤으며, 물에 녹여 보기도 했다.

매튜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약제사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탁.

마침내 대머리 약제사는 들고 있던 돋보기를 내려놓고 매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확실합니다. 이것은 신전의 상품입니다.”

약제사의 눈동자가 확신에 차 번득였다.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고맙소.”

약재상을 나오는 매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엘프윈 마님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양의 아르젠토 찻잎을 소지하고 있는지 밝혀내야 했다.

꽤 난해한 과제가 될 것 같았다.

일단 제크론 공작 전하께는 비밀에 부친 상태에서 스스로 조사에 착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 우선 거기로 가 보자.’

매튜는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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