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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매튜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파이크 서점이었다.
제도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고서적부터 최신서적까지 없는 책이 없었다.
하지만 매튜는 그곳에 책을 사러 간 것이 아니었다.
물론 윌트슨 공작과 공작 마님께 최신 의학 서적을 구입한다는 핑계로 나왔으므로 뭔가를 사긴 살 테지만 말이다.
3층 건물 전체가 서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각 층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다랗게 이어진 책장에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매튜는 서점 안에 들어서자마자 3층 제일 구석 낡은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점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점원은 비쩍 마른 남자였는데, 매튜가 쓴 것보다 훨씬 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문서 하나를 의뢰하고 싶은데.”
“어떤 게 필요하신데요?”
“아르젠토 찻잎을 살 수 있는 진단서.”
안경 너머 점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매튜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점원의 입에서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가 신관이 아니라서 불가능하다는 건가?”
매튜는 분명 봤다.
제 손등에 한동안 머물던 점원의 시선을 말이다.
손등을 살폈다는 것은 상대하는 이가 신관이나 신녀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신관과 신녀들의 손등에는 특정한 표식이 있었다.
연한 하늘색의 문신이었는데, 오른손에는 태양의 문양이, 왼손에는 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물음에 비쩍 마른 점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대, 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아르젠토 찻잎 진단서는 그 누가 와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르젠토 찻잎에 대한 진단서만 불가능하다는 건가?”
“다른 것도 필요하신 겁니까?”
“아니, 아르젠토 찻잎에 대한 것만 필요하네.”
“그럼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아.”
힘없이 벌어진 매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파이크 서점의 3층.
이곳은 종이로 된 것이라면 뭐든 위조가 가능한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런데 아르젠토 찻잎에 대한 진단서는 안 된다니 매우 수상했다.
게다가 깡마른 점원의 눈초리는 또 어떻고.
그의 ‘가능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은 매튜를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본 이후에야 나왔다.
‘가능합니다’라는 대답과 ‘가능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가르는 기준이 사람의 외양에 드러나는 신분의 차이라면?
신관과 신녀는 아르젠토 찻잎에 대한 진단서를 주문할 수 있지만, 매튜와 같이 그 외의 사람들은 주문할 수 없다면?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 역시 신관이나 신녀가 아닌 보통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진단서를 위조할 수도 없었을 텐데?’
매튜의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진단서를 위조한 것도 아니라면 대체 윌트슨 공작 부인은 어디서 아르젠토 찻잎을 구하신 걸까?
‘기억을 잃으셔서 본인에게 직접 여쭤볼 수도 없고 말이지!’
매튜의 속이 타들어 갔다.
* * *
한창 외출 준비 중인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드디어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의 요소킨 운동 수업을 듣는 첫날이었기에 들뜨는 것이 당연했다.
‘1년 뒤에야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재수가 좋다니!’
후훗, 그날 디저트 가게 ‘마카마카’에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옆 테이블의 귀부인에게 용기를 내서 물어보길 참 잘했다.
“마님, 그렇게 좋으세요?”
“물론이지.”
외출 준비를 돕던 하녀가 묻자, 앨리슨이 명랑하게 답했다.
“너도 잘 알잖아. 임신한 뒤로는 과격한 운동은 안 된다고 해서 참고 참았던 거. 그런데 요소킨 운동은 과격하지도 않고, 여성이나 임산부도 쉽게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니!”
그녀는 임신 6개월 차로 볼록한 배를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며 말했다.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은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육체 활동을 즐겨 하는 편이었다.
특히 승마를 좋아했고, 검술이나 활쏘기도 즐겨 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니 다 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임신 6개월이면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승마나 검술은 역시 무리였다.
간간이 활쏘기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 때마침 요소킨 운동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다른 부인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일정이 다 꽉 찼다는 아쉬운 이야기만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풀이 죽은 채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서 이 운동 욕구를 해소시킬 수 있을까 고민할 때 구세주처럼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엘프윈 윌트슨!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소문과는 많이 다른 그녀의 성품에 다소 놀랐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과 함께 하는 건 괜찮으세요? 워낙에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들어서요. 게다가 최근 크게 앓고 나서는 머리에도 문제가 있는지 좀 이상해졌다고.”
“흐음….”
물론 앨리슨도 이미 들었던 소문이었다.
솔직히 걱정이 하나도 안 된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렇지만… 지난주 우연히 만났던 윌트슨 공작 부인은 멀쩡해 보였는걸. 게다가 너무나도 선뜻 그룹 수업에 초대해 줬고. 영 잘 맞지 않으면 임신 기간 중에만 하지, 뭐.”
이것은 하녀의 물음에 답하는 말이기 전에 앨리슨이 제 자신을 다독이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 하고 싶었던 운동이지만, 사실 엘프윈 윌트슨, 그 여자가 좀 걸렸다.
워낙 소문이 좋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싫은 여자’라는 것이 윌트슨 공작 부인이 달고 다니는 꼬리표였다.
그날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두 부인들은 결국 요소킨 운동을 포기했는데, 이유는 고작 운동을 위해 굳이 윌트슨 공작성까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것이 개운치 않았으리라.
반면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의 경우,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걱정보다 운동에 대한 열망이 훨씬 더 강했다.
‘괜찮겠지 뭐. 어차피 3, 4개월 정도야. 아니지. 만약 오늘 만나 봐서 진짜 별로면 다음부턴 못 하겠다고 해도 되는 거고.’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앨리슨은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막 방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문이 열리더니 디아브 백작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장신에 다부진 체격의 앨리슨에 비해 다소 왜소한 체격의 사내였다.
“당신 꽤 신나 보이는군.”
“어머, 여보! 물론이죠! 제가 그동안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잘 아시잖아요.”
앨리슨이 백작의 목에 팔을 두르며 속삭였다.
그리고 백작 부부의 진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대기 중이던 하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운동을 하려고 꼭 윌트슨 공작성까지 찾아가야 할 만큼이야?”
“어머, 당신까지 왜 이래요, 정말? 사람을 소문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할 땐 언제고요?”
“그렇긴 하지만… 소문이란 게 아예 없는 얘기가 지어지는 건 아니잖아? 뭔가 근거가 있으니까 만들어지는 거지.”
앨리슨은 감았던 팔을 풀고 남편을 바라봤다.
백작의 표정이 꽤나 진지해서 그녀는 내심 놀랐다.
앨리슨이 누구를 만나든지 단 한 번도 관여한 적이 없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근심 어린 조언이 좀 당혹스러웠다.
“난 그 윌트슨 공작 녀석도 밥맛이거든. 새파랗게 어린 게 잘난 척은 수준급이란 말이야.”
“당신보다 고작 다섯 살 정도 어린 것 같던데 새파랗다니요? 당신 그거 질투예요. 전쟁 영웅한테 그런 태도는 못 써요.”
푸흣, 앨리슨이 입꼬리를 살포시 올리며 웃었다.
하긴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윌트슨 공작의 존재에 질투하지 않을 귀족 남성이 과연 있을까?
앨리슨은 순수하게 질투심을 내보이는 남편이 귀엽기도 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걱정 말아요. 오늘 같이 해 보고 소문대로 진짜 이상한 여자면 다음부터 안 가면 그만인걸요.”
앨리슨이 남편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