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42)
  • 12화

    매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거기엔 제크론이 다른 신사들과 함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오늘도 제도에 일정이 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거대한 나라의,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서, 이렇게 우연히 만난다고?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어서 그런 걸까?

    남자 주인공의 등장에 엘프윈의 몸이 반응했다.

    마침내 제크론도 우리를 발견하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른 신사들과 인사를 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속한 모두의 시선이 제크론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상점가를 걷던 여성들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볼 정도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이 찬란했다.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한쪽 눈을 질끈 감아야 할 정도였다.

    ‘역시 남자 주인공! 대단하군!’

    나는 애써 침음을 삼켜야 했다.

    “공작 각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회의가 있었어.”

    “왕립 아카데미에서요?”

    “그래. 뎀프샤에 왕립 아카데미의 분교를 짓게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오, 대단한 소식이군요! 역시 번성하는 뎀프샤답네요!”

    제크론은 매튜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내내 나에게로 향했다.

    심해와 같은 짙푸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괜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럼 회의는 이제 다 끝나셨습니까? 공작성으로 돌아가시나요?”

    “응, 그래.”

    “그거참 잘됐습니다. 그럼 두 분이서 오붓하게 카페에 가셔서 디저트를 드시면 어떨까요?”

    “뭐… 왜요?”

    내가 놀란 눈을 하고 매튜에게 물었다.

    좋다고 흔쾌히 승낙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빼기 있냐고!

    “하하, 저는 오랜만에 제도에 온 김에 최신 의료 서적과 연구실 집기 쇼핑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괜찮겠습니까, 공작 각하?”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네. 그럼 전 이만.”

    냅다 달려가는 매튜의 뒷모습이 마치 도망치는 자의 그것과 꽤나 흡사했다.

    ‘흥, 칫!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봐?’

    멀어지는 매튜를 보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도망가는 뒷모습에서 다량의 청량미가 검출되는 건 또 뭐람.

    이놈의 소설 속 세계!

    “잘됐군.”

    “뭐…가요?”

    “하루에 30분씩 같이 있기로 한 거 말이야. 편지로만 약속하고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잖아.”

    워낙 이런저런 일정들로 바쁜 그였다.

    그래도 매일 내 침실에 들르기는 했지만, 5분 내지 10분 정도 머물렀다 가는 것이 전부였다.

    “계속 미안했는데 오늘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됐으니 말이야.”

    중저음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었나? 역시 남자 주인공이라서 다 가졌구나! 치잇.’

    그의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향한 질투를 감추며 생긋 웃었다.

    “워낙 바빴잖아요. 이해해요.”

    “먹고 싶은 건?”

    뭐가 좋을까?

    무난한 것으로 하자.

    “케이크요.”

    “그럼 거기에 가지. 그 왜, 지난번에 가고 싶어 했던.”

    “…….”

    “물론 당신은 기억 못 하는 것 같지만. 자!”

    제크론이 팔짱을 끼라는 신호와 함께 제 팔을 내밀었다.

    아…?

    순간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 곱게 차려입은 남녀 커플은 다들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곳에선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예의인가 보다.

    매정한 제크론이 내게 아무렇지 않게 팔을 내미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었다.

    주춤거리며 그의 팔에 내 팔을 감았다.

    내 손이 그의 몸에 닿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작게 덜커덩거렸다.

    말을 섞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이렇게 몸이 닿은 것은 처음이라서 매우 어색했다.

    제크론은 내가 애정하는 캐릭터이자 내 남편이었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만난 지 얼마 안 된 잘 모르는 남자이기도 했으니까 어색한 게 당연했다.

    그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지금 가려는 곳, 맛있어요?”

    “몰라, 안 먹어 봐서. 지난번에 당신이 가고 싶어 했지만, 결국 못 갔거든.”

    “왜 못 갔는데요?”

    “그날… 가게 앞에서 다퉜거든.”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제크론은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다툼.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십중팔구로 엘프윈이 원인을 제공했을 것만 같은 안타까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엘프윈. 네 편 들어 주지 못해서. 하지만 그동안 네가 해 놓은 짓이 있으니… 이해해 주라.’

    그런데 묻고 싶진 않았지만, 달리 이야깃거리도 없었기에 눈 딱 감고 물어야 했다.

    “뭐 때문에 싸웠는데요?”

    “그야… 그런데 당신이랑 싸웠던 이야기를 다시 당신한테 들려준다는 게 영 이상하군.”

    하긴 내가 생각해도 제크론의 입장에서는 꽤나 난처한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기억을 잃었으니 말이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계속 앞을 보며 걷고 있었지만,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확연히 느껴졌다.

    나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과거가 다 사라지고 없는데, 같이 나눴던 대화, 같이 봤던 장면들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같은 사람이라고 하겠어요?”

    “…….”

    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래도 여전히 잘생기긴 했지만.

    “그러니까 그날 싸웠던 일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설명해 준다 생각하고 말해 보세요. 정 어색하면 지금부터 절 ‘윈 부인’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윈 부인이라니… 풉.”

    내가 턱을 치켜들며 당당하게 뱉은 아무 말 대잔치에 제크론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침 그가 어느 건물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가게 이름은 ‘마카마카’였다.

    ‘여긴가? 마카롱 파는 덴가?’

    디저트 숍은 파스텔 톤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당신이 여길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 얼른 포장해서 가든가 아니면 나중에 다시 오자고 했어.”

    “아… 그랬군요.”

    으윽, 역시 예상대로였다.

    제크론의 이야기만 들으면 엘프윈의 고집에서 시작된 다툼 같았으니.

    아니지!

    아직 한쪽 이야기만 듣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원래 매우 이성적이고 중립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싸움은 원래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 봐야 하죠. 당신 이야기만 들으면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지만, 내 버전의 이야기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애썼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처럼 들리길 원하는 마음을 담뿍 담아서.

    “그날 당신은 오랜만에 제도에 나온 거라 많이 들떴는데, 나와 함께 해야 하는 공식 일정들이 빠듯해서 제대로 즐길 틈이 없다며 불평했어.”

    “아….”

    “잘잘못을 따질 게 못 돼. 단지 그날 우리 둘 다 힘들었던 것뿐이야.”

    이 사람 참, 할 말 없게 만드시네.

    이럴 때는 말 돌리기 기술, 얍!

    “그럼…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거 맞죠?”

    내가 앞장서서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와아!”

    유리장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마카롱과 케이크를 보고 감탄했다.

    이 상점의 메인 케이크는 마카롤케이크였는데, 마카롱 반죽을 케이크 시트로 만들어 각종 크림을 넣어 만든다고 했다.

    나는 얼그레이 마카롤케이크와 쇼콜라 마카롤케이크를 골랐다.

    나와 제크론은 3층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화창하게 맑은 날 테라스에서 먹는 달달한 디저트라니!

    너무 황홀해서 실성할 정도였다.

    헤벌쭉 열리는 내 입을 제크론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당신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그동안 내내 공작성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나오니 너무 좋아요.”

    생글생글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같은 기분이라면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아도 계속 싱글벙글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업원이 우리가 주문한 케이크와 음료를 들고 왔다.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케이크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우와! 맛있어요! 대단해요!”

    거울이 없어서 보지 못했지만 분명 내 두 눈은 동그랗게 커졌고, 콧구멍은 벌렁벌렁, 입도 주체 못 하고 벌어졌을 것이 뻔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종종 비웃음 당했던 그 얼굴이리라.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얼굴 말이다.

    순간 극도로 추해진 내 얼굴에 놀랐을까.

    제크론은 한동안 멍하니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하지만 괜찮았다.

    어디서도 먹어 본 적 없는 최고의 케이크를 입 안에 넣은 이상 이 정도쯤의 못생김은 봐줄 수 있어야 한다.

    “당신도 어서 먹어 봐요!”

    “아… 난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단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왜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어서요! 딱 한 입만! 자!”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 제크론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좀 당황한 듯 두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어때요? 맛있죠?”

    “음… 달군.”

    제크론의 귀가 조금 빨개진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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