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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은 너무 많잖아요 (40)화 (40/156)

39화. 누군가 우릴 쫓아(2)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에르셈프의 입에서 ‘공작가’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 나를 쫓고 있다는 걸 예상했다는 것. 그는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가?

그리고 하나 더.

저 괴한은 왜 저렇게 태세 전환을 했을까.

그는 분명 돈을 받고 일하는 해결사일 것이다.

해결사라면 절대 애송이 같은 실력을 가진 자도 아닐 거다.

처음에 보았던 무거운 분위기와 날렵한 몸짓이 꽤 실력자 같았는데……. 왜 에르셈프를 보자마자 살려 달라고 하는 거지? 감옥으로 잡혀갔을 때를 걱정하는 건가? 애초에 그건 에르셈프를 이기면 되는 일이잖아.

자칫해서 수틀리면 도망이라도 치면 될 텐데……. 무엇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든 걸까.

나는 의아한 얼굴로 에르셈프의 뒤에 있었다.

허리를 삐끗한 나머지 제대로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에르셈프는 허리춤에서 롱 소드를 뽑았다. 잘 닦인 칼날은 아름답게 빛이 났다.

그는 칼끝을 괴한의 얼굴 앞으로 갖다 대었다. 괴한은 눈에 띄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곧 죽음을 맞이할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살려 주십시오. 모든 걸 불겠습니다.”

그는 손바닥을 비비며 싹싹 빌었다.

에르셈프가 그의 모습을 보더니 헛웃음을 쳤다.

“요샌 이런 녀석들도 활동을 하는군. 의뢰인의 비밀을 보장하는 것이 네놈들의 신념 아닌가?”

“…….”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맞지 않냐고.”

에르셈프가 무릎을 구부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짧게 말을 이었다.

“복면 벗어.”

그의 말에 괴한은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벗었고, 이어서 복면을 벗었다.

이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험악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앞에 앉은 에르셈프와 명확하게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괴한 쪽이 훨씬 무섭게 생겼지만 에르셈프가 풍기는 기세가 그를 눌러 버렸다.

게다가 괴한을 향해 서 있는 에르셈프의 여유로운 뒷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를 연상시켰다.

“이름.”

“에스포에트 빌게인이라고 합니다.”

“소속은?”

“‘나무’라는 해결사 조직에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활동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조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그때였다. 에르셈프가 입술을 비틀며 미소를 짓더니, 말을 내뱉었다.

내가 아는 에르셈프가 맞나, 싶었다.

“너 같은 놈 다루는 방법을 잘 알지.”

나에게 대하는 눈빛과 표정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날카롭고 살기 어린 얼굴로 괴한을 대하고 있는데, 왜 저 남자가 에르셈프의 말만으로도 벌벌 떠는지 알 것 같았다.

“다리 하나 자르기 전에 알아서 불어.”

“‘나무’에서 저에게 보낸 첫 번째 임무였습니다. 저도 위에서 일을 받아 활동하기 때문에 의뢰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커헉!”

그때였다.

에르셈프가 시퍼런 칼날을 그의 허벅지에 꽂았다.

새빨간 피가 사내의 바지 위로 물들었고, 그는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다시.”

“헉…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의뢰인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게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저 돈을 벌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거고. 아악!”

에르셈프는 정말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내를 심문했다.

다리를 파고드는 칼의 깊이를 조절하면서 그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그의 모습은…….

악마 아냐?

잔인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고,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위협한 곳인 만큼 정체가 알고 싶었다.

떨리는 마음을 최대한 잠재우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 저년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은발 머리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계집을 죽이라고. 이름은 루이아나지만 가명을 쓸 수도 있다고…….”

“…….”

“죽, 죽이지 못하면 혀라도, 혀라도 자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말을 하지 못하도록. 아마! 아마 저년의 입을 막는 게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에르셈프의 표정이 세게 굳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그제야 열렸다.

“다시 말해 봐.”

“죽이지 못하면 혀라도 자르라고, 악!”

“누구를 죽이라고 했다고?”

“저, 저 녀, 년! 허억!”

“제대로 말해야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아! 아아! 저분입니다. 루이아나 님입니다. 루이아나 님을 죽이라고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르셈프가 이어 말하라는 듯 턱짓을 보냈다.

“마을 곳곳에 사람을 심었습니다! 시장가만 해도 열댓 명이 있을 겁니다. 저는 아카데미 앞에서 지키고 서 있던 것, 이고요.”

“그래서 아까부터 쫓아왔구나?”

“네, 그렇습니다! 교문 앞에서, 죽치고, 루이아나 님을 기다리라고 했고, 저는 그렇게 했을 뿐, 입니다. 저는 이게 다입니다. 알려 드리고 싶어도, 더 알려 드릴, 컥!”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흐윽…….”

괴한의 눈에선 눈물이, 다리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의뢰인은 밀리센트가일 거고, 이 마을 전체에 사람을 심어 놨다는 정보를 알아냈으니 말이다.

나는 에르셈프를 향해 소리쳤다. 아무리 에르셈프가 조절하고 있다고 하지만 고문받는 장면을 두 눈 뜨고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르셈프! 이, 이제 그만해요! 저러다 죽겠다고요……!”

그리고 사람이 죽는 건 더욱이 보고 싶지 않았다. 협박도 할 만큼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에르셈프가 뒤를 돌아봤다.

핏방울이 얼굴에 튄 상태였다.

“무슨 소리야, 루나. 당신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

내가 말을 잃었다. 그럼 대체 누굴 위해서 한단 말인가.

“의뢰인만 말하면 안 죽일게. 진짜야.”

에르셈프가 괴한의 다리에서 칼을 뽑아내며 말했다. 자비를 베푼다는 목소리였다. 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에르셈프가 칼을 뽑아 주니 정말로 죽지 않고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미, 밀리센트 공작 가문입니다. 카를로스 밀리센트라는 자가 직접 의뢰했습니다.”

결국 그는 다 털어놓았다.

의뢰인을 말했다는 건 더 이상 숨길 게 없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밀리센트 가문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첫째 오빠였을 줄이야. 왜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그만큼 내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건가?

어째서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가?

단지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일을 벌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컸다.

내가 그들에게 약점이 되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약속은 지켜 줄게.”

에르셈프가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내를 뒤로 한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순간이었다.

에르셈프가 등을 돌린 틈에, 사내가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움직여 내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허리를 다친 후로 바닥에 앉아 있었던 나는 예상하지 못한 사내의 움직임에 얼어붙었다.

“죽어라!”

마지막 발악이었다.

괴한은 한 손에 짧은 단검을 든 채 내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 번에 급소를 찔러 죽여 버릴 셈인 것 같았다.

단검이 내 목을 향해 다가왔고, 나는 팔을 들어 목을 막았지만 소용없는 듯했다.

날카로운 칼끝이 내 팔에 닿았을 때였다.

그때.

서걱!

사내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허, 허억……!”

내가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한다는 얼굴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영화에서만 보던, 아니,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 장면이다.

아무리 임무를 하며 몬스터를 처치했다고 해도, 인간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건 처음이었다.

살해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자 저절로 온몸이 벌벌 떨렸다.

“보지 마!”

금세 다가온 에르셈프가 내 얼굴을 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었다.

괴한의 목을 한 번에 날려 버린 건 에르셈프였다.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나는 나도 모르게 에르셈프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남기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으니까.

에르셈프는 단단한 팔로 내 얼굴을 고정하며 더욱 끌어안았다.

“후우…….”

심호흡을 내쉬었다. 시야가 차단되고 사람의 온기를 느끼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괴한이 에르셈프의 얼굴을 보자마자 항복을 외친 이유를. 단 한 번의 일격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검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가히 사람의 몸짓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검사보다 월등한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절제되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일격으로… 그렇게 괴한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약속은 지킨다고 했건만.”

게임 속에서 자주 본 장면이 현실에서 일어났기 때문일까, 머리가 텅 비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르셈프는 말없이 나를 안아 주고 있을 뿐이었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에게서 고개를 빼내었다,

난 엄연한 아카데미 학생이다. 임무를 나갔다 온 만큼 실전을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고.

사람 한 명의 죽음 가지고 난리를 치기엔 마음이 너무 나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내가 짧게 대꾸하자 갑자기 그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서 훅 멀어지며 혼자 팔짱을 끼는 것이 아닌가.

아까까지 지상 최고의 악마처럼 굴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호들갑 떠는 걸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그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시선을 휙 돌렸다.

그러곤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이런 거에 울곤 하니까. 정말 귀찮게.”

누가 뭐래요?

저 말이 목 끝까지 나왔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그래도 에르셈프는 왕자니까 내가 혼자 생각한 말은 못 한다.

“어엇…….”

그제야 나는 내 팔을 볼 수 있었다.

왼쪽 팔에 길게 베인 자국이 있었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까 괴한이 내 팔에 단검을 들이댔을 때 주욱 베인 상처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팔을 본 에르셈프가 몸을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분한 사람처럼.

“괜찮아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핏줄을 건드렸는지 팔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혈을 해야 해.”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상처에 갖다 대었다.

부드러운 실크로 이루어진 녹색 손수건에는 금실로 왕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

그는 내 상처를 묶으면서 잠시 멈칫, 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스멀스멀 밀려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눈을 찌푸리고 참고 있는데,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시스템의 음성이었다.

[시간 초과로 인해 ‘드러나는 속마음’ 퀘스트에 실패하였습니다!]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페널티로 ‘누군가’의 살인 표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시계가 없어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퀘스트 실패가 떴다는 것은 이미 여섯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내가 에르셈프에게 팔을 맡긴 채 혼자 중얼거렸다.

죽지 않기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데 너무나도 쉽게 누군가의 살인 표적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이런 페널티를 줄 수 있는지 게임 시스템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냥 살리질 말지.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야?

나는 순식간에 몰려오는 증오심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게임 마스터를 찾아서 아까의 에르셈프처럼 목을 서걱 잘라 버리고 싶었다.

“하아…….”

땅이 꺼질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건지 에르셈프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지혈제를 사야겠어. 마을로 가지.”

그리고 나는 에르셈프의 부축을 받으며 함께 어두웠던 골목을 빠져나왔다.

길거리를 밝히는 불빛이 없기도 했고, 허리를 다친 까닭에 움직이는 게 아주 불편했지만 별수 없었다.

조금 더 걷자 넓은 길의 어귀가 나타났고, 에르셈프가 무얼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에서 살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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