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누군가 우릴 쫓아(1)
둘만 있던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티나?”
학생회 부원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세이먼이 움직이려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나와 세이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알아챘는지 무언가 눈치를 보는 표정이었다.
“세, 세이먼, 서류를 두고 가서.”
까무잡잡한 얼굴에 흑색 머리를 한 그녀는 금세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찾는 것이 있는지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나와 세이먼은 아무 말 없이 티나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티나는 부담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저 하던 거 해…….”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책상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망했다, 완전. 거의 다 된 거였는데.
아니, 사실 다 된 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세이먼이 몸을 움직이려고 한 것까지만 보았으니까.
“꼬마야, 뭔 짓을 하는 거냐?”
와중에 샐라임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
나는 민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얘가 평소엔 안 하던 짓을 하네.”
티나는 약 오 분 정도 책상을 뒤지다가 서류를 찾아내고는 소리쳤다.
“아! 여기 있네.”
그러고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좋은 시간 보내.”
다시 둘밖에 남지 않은 학생회실엔 어색한 공기만이 무겁게 감돌았다.
나는 또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퀘스트를 깰 수 있을 것인가!
한번 깨진 분위기를 다시 조성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세이먼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왔다.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요, 루나.”
“?”
나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운 채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다음에 봐요.”
그러고는 자신의 짐을 챙기더니 학생회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를 홀랑 두고.
“이런 젠장 할…….”
그렇게 학생회실에 혼자 남아 버리고 말았다.
샐라임은 그제야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세이먼이 나에게 고백을 한 상황에서 포옹을 받아 내라는 퀘스트가 내려왔고, 나름의 전략을 짜서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뜻밖에 학생회 부원이 들어와 버렸다고.
그래서 망했다고.
“페널티가 ‘누군가’에게 살인 표적이 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냐고요.”
내가 호소하듯이 샐라임에게 투덜거렸다.
“제한 시간이 여섯 시간이랬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회가 있을 거야.”
“이제 세이먼은 집에 갔을걸요…….”
절망적인 얼굴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단지 임무 완료 신고를 하러 왔던 것이건만, 세이먼의 일방적인 고백을 듣고, 입장 정리 또한 애매하게 끝내 버렸다. 게다가 오늘 세이먼의 모습은 아예 다른 사람 같았기에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원래 세이먼이 그런 성격이었나?
아니다.
착하고 다정한 남주인공 설정에 집착남 같은 면모는 없었단 말이다.
“뭐지? 왜 갑자기 나한테 집착을 하는 거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이내 가늘게 뜨던 눈을 번쩍 떴다.
왠지 알 것 같았다.
내 행동에 따라 미래가 바뀐다는 건 말이 되어도 본래 캐릭터의 설정이 바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다는 거야……?”
이것밖엔 말이 되지 않는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고, 게임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만 등장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부터 세이먼의 이상한 면모가 이해되었다.
알고 보니 세이먼은 착하고 다정한 스윗남이 아니었다는 거다.
이럴 수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속에는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불순한 마음을 숨긴 사람이라니.
나는 조금 전 세이먼의 모습을 생각하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런데 세이먼을 떠올리는 동시에 몸을 눕힌 소파가 너무나도 편하게 다가왔다.
뭐야, 이 소파가 이렇게 편했나.
퀘스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
“꼬마야, 자면 안 돼.”
“…네…….”
임무를 갔다 오고 난 직후라 너무나도 피곤했다. 매일같이 비가 오는 레인타운에서 며칠을 보냈고, 죽을 위험을 몇 번이나 넘겼다.
아카데미에 돌아오고 시간이 좀 지나자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으음…….”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그렇게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 * *
“루나?”
오 분 정도 지났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뿌연 시야가 이어지고, 누군가 가까이서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
잠에 취해 저세상에 갔다 온 것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나를 보고 누군가 푸흣, 하고 웃었다.
“표정 웃긴 건 여전하네.”
익숙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였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게 맞나……?
이거 꿈인가……?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내 앞에 있지, 그것도 함께……?
“헉!”
내가 순식간에 잠에서 깨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 눈앞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2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잰퓨어……?”
“루나!”
“에르셈프……?”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되레 내가 묻고 싶었다.
왜 둘이 학생회실에 나란히 있는 거야?
잰퓨어는 내가 정신을 차린 걸 알고는 활기차게 설명해 주었다.
“학생회실에 일이 있어서 가고 있는데, 왕자님을 뵙게 되었어.”
“나도 볼일이 있어서.”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르셈프가 이어 말했다.
“대련 시간 때 장갑 한쪽이 바뀌어서 찾으러 왔는데, 세이먼은 어디 있는지 아나? 당분간 검법 수업도 휴강이라 오늘 바꿔야 하는데.”
그의 표정은 난처해 보였다.
“집에 갔어요.”
성의 없게 대꾸를 하던 나는 누워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세이먼의 집을 찾아가는 거다!
세이먼은 현재 기숙사가 아닌 집에서 통학을 하고 있으므로 그를 만나려면 집으로 찾아가야만 했다.
게임을 할 적에 보았던 맵을 기억하고 있으니 집의 위치는 대충 알고 있었다. 제한 시간 안에 퀘스트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나는 그들을 휙 지나쳐 학생회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때, 잰퓨어가 말을 걸었다.
“루나, 기숙사에 가는 거면 같이 가.”
“기숙사에 안 가. 학교 밖으로 나갈 거거든.”
“어딜 가는 건데?”
“세이먼을 찾으러 갈 생각이야. 오늘 안에 만나야 하는 일이 있어서.”
나는 굳이 세이먼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세이먼에게 관심이 있다고 오해를 하는 편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에르셈프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그럼 나와 같이 가지. 나도 세이먼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이런, 귀찮은 일이 생겨 버렸다. 에르셈프와 함께 세이먼에게 찾아가야 한다니.
하지만 동시에 그 제안이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현재 밀리센트가에 쫓기는 처지이기 때문에, 학교 밖은 위험했다.
하지만 에르셈프와 함께라면 혹여나 생길 위험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지켜 줄 사람 한 명 정도는 옆에 두는 것이 좋겠지.
“…그럼 어서 나가죠.”
그러자 이번엔 잰퓨어가 나를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루나!”
활기차게 소리친 그의 말에 에르셈프가 약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손이 세 개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러고는 커다란 박스를 쳐다보았다.
* * *
결국 나와 에르셈프만이 교문 밖을 나서게 되었다.
“장갑이라면 다른 걸 써도 되지 않나요?”
“손에 익은 게 좋을 뿐이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뭐가 문제냐는 양, 태연한 말투로.
에르셈프에겐 항상 교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근위 기사가 존재했다.
“혼자 갔다 오겠네. 호위는 필요 없어. 끝나고 바로 궁으로 가지.”
“왕자님,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네.”
근위 기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르셈프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해도 되나? 실제로 나와 함께 있으면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저번에 에르셈프를 처음 만날 때도 밀리센트가의 수행원으로 추정되는 괴한이 나를 잡으려 했으니까. 그래도 한 나라의 왕자인데 호위를 받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에르셈프,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은데.”
“필요 없어. 이 나라에 날 위협할 자는 없으니까.”
에르셈프는 별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자신감 한번 대단하네.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위 기사를 뒤로한 채 마차를 잡아탔다.
“세이먼의 집을 아는 건가?”
“아, 어쩌다가 들었거든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분명 게임에서는 마을의 가장 동쪽에 있는 거리에 세이먼이 살았지. 맵에서 남주인공이 있는 곳을 클릭하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서 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우리는 테일하트 거리에서 내렸고,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골목을 지나 세이먼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에르셈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에르셈프가 나를 옆으로 밀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
“우릴 쫓고 있군.”
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야. 누군가 우릴 미행해.”
“…확실한 건가요?”
“분명해. 학교 앞에서부터 느낌이 이상했는데, 쥐새끼처럼 여기까지 따라왔군.”
누군가가 우릴 쫓고 있다니. 지난번의 그 사람인가?
나를 노릴 곳은 그쪽밖에 없으니 아마도 맞을 것 같았다.
“쉿, 일단 나를 따라와. 이런 좁은 골목은 위험하니까.”
그가 내 어깨를 잡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기더니, 순식간에 다음 골목의 벽 뒤로 숨었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내 몸이 휘청거렸고, 그가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아앗!”
하지만 그가 허리를 받치기 전에 급하게 몸을 움직이느라 허리를 삐끗해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허리가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불쾌한 고통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허리를 부여잡은 나를 보며 에르셈프가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
움직일 때마다 아프긴 했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내가 그의 팔뚝을 잡자 그가 내 어깨를 감싸며 부축해 주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지만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자책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에르셈프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물어 왔다.
“루나, 당신을 쫓고 있는 거지?”
그의 물음에 내 눈동자가 멈추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야. 넌 나설 필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을 보았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
나를 쫓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생각도 잠시였다.
누군가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였다.
모자는 물론 복면까지 쓴 상태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돈을 받고 비밀리에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일 것이다.
인적 드문 거리에는 나와 에르셈프, 그리고 괴한 한 명만이 자리하고 있었고, 날이 저물어 달빛만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여자를 내놓고 꺼져.”
괴한이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였다.
역시 나를 노리는 게 맞았다.
움직이는 모습이 노련하고 풍기는 분위기가 살벌한 것이, 꽤 실력자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빙글빙글 칼을 돌리며 여유롭다는 기세를 보였다. 이런 애송이들은 금세 처치해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 같았다.
그때, 에르셈프가 눌러 썼던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인가?”
“……!”
나는 그의 입에서 ‘공작가’라는 단어가 나온 것에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에르셈프의 얼굴이 드러나자 괴한이 눈에 띄게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괴한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젠장! 3 왕자가 있다는 정보는 없었잖아!”
자신도 일이 꼬였다는 듯 그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괴한이 에르셈프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것이다.
대체 왜? 에르셈프가 왕족이라서?
괴한은 심지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둑어둑한 골목길에 침묵이 찾아왔고,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에르셈프가 앞으로 걸어 나와 괴한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싫다면?”
그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짧게 대꾸했다. 아주 여유롭다는 몸짓과 나른한 표정.
위험한 상황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작게 코웃음을 친 그는, 말을 이었다.
“죽기 싫으면 빌어 봐. 받아 줄진 모르겠지만.”